전시 리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안규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나름 가깝고, 좋아하는 공간에 위치해있기도 하고 아직 학생인 나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녀 온지는 꽤 되었지만 너무 좋아서 꼭 전시에 관한 글을 남기고 싶었던 한 프로젝트 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해당 전시는 2월 14일까지 계속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은 <국립 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일환으로 개최된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현대는 예술과 관련된 여러 좋은 사업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현대가 지원하는 프로젝트만 봐도 “아, 역시 현대!” 그런 느낌이랄까. 뭐 말도 많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는 안규철 작가님이다. 사실 나는 이 전시를 통해 작가님을 처음 접해봤다. 안규철 작가는 개념미술을 주로 작업하고 있다. 조각을 주로 전시했었지만, 최근은 주로 우리가 자주 마주치고 자주 사용하는 일상의 오브제를 통해서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질문들을 풀어가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규철 작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들이나, 관념적인 것들, 그리고 또 사회에서 사라지고 잊어진 것들에 많은 관심을 표하고 있다. 또한 예술의 경계나 예술에 대한 관점에서도 많은 고민들을 하는 작업들이 많다. 또한 안규철 작가의 작업 특징 중 특히 이번 전시와 잘 어울러 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 전시를 위해 건축적인 공간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그는 예술과 공간이 서로 소통하며 호응할 수 있도록 작업한다.
이번 전시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주제 안에서 작가의 서로 다른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전시이다. 전시 테마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마종기 시인의 시집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3.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도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씨의 시집에서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조국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인터뷰에서 안규철 씨는 시와 다르게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가 조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곳, 지금 여기에 없는 곳, 지금 여기가 아닌 어떤 다른 곳, 즉 부재하는 공간으로서 개념적인 공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전시는 그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우리가 잃어버리고 그리워하는 곳, 그런 곳들에 관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9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있음과 없음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각자의 전시 작품과 전체의 전시 구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 없음의 체험을 통해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가 있음을, 존재함을 체험하게 한다. 또한 각각의 작품들의 자신의 뜻을 담고 있고 또한 그는 전체적인 이 공간에서 호응을 이루게 된다.
결국 사랑인가? 그 긴 시간들을 다 보내고 나서 이제야 유행가처럼 속되고 흔하다며 외면했던 사랑을 말하게 되었나? 사랑은 너무 많고 싸구려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도 사랑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사랑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발길에 치이는 게 모두 사랑이고 입술에 발린 게 모두 사랑인 이곳에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사랑의 나라를 상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무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다시 해야겠다.
작가노트 인용
처음 전시장에 들어가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온통 하얀 벽에 그 중 커다랗게, 높게 솟은 전망대와 그 주위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독립되는 하나의 작품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과 같은 그런 작품들이었다.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아홉 마리 금붕어>이다. 9개의 동심원에서 서로 고립된 채 금붕어들이 살아가고 있다. 언뜻 보면 매우 예쁘다. 겹쳐 놓아진 9개의 원과 그 속의 금붕어들. 그러나 이 심미적인 것을 떠나 그 존재 하나하나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생각하면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9마리가 하나의 큰 원, 공간 안에 머물고 있지만 그들은 그 작은 벽 건너의 서로를 절대 만날 수 없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독한 길만을 헤엄쳐갈 뿐이다. 이 슬픈 고독과 심미적 아름다움의 아이러니가 날 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작품은 <피아니스트와 조율사>이다. 이것 참 발상이 참 좋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매일 같은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고, 매일 조율사는 와서 피아노 해머를 하나씩 빼간다. 하루가 지날수록 그 소리를 잃는 건반수가 늘어간다. 그렇게 작품이 전시되면서 시간이 흐르게 되면 결국 침묵에 이를 것이다. 소리와 침묵, 팜플렛에 나와 있듯이 음악과 침묵, 의미와 무의미,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상반된 것들이 함께 연주되는 작품이다. 완전으로 채워진 것이 하나 씩 해체되고 불안정으로, 불완전으로 이르는데 결국 그 도착지는 침묵이라는 또 다른 완전이다. 생성과 소멸 그 반복이 오히려 소멸로 향하는 모습이 아이러니 하게도 마음속의 공허를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하나씩 생성됨으로써 우리는 그 음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 인간이란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소멸하고 잃어버릴 때만 그 의미를 찾는다. 하나의 음을 잃을 때 그 음의 존재를 깨닫고, 침묵에 이르게 되면 침묵의 연주와 소리의 완전의 연주 둘 다를 모두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앞의 두 작품이 생성과 소멸에 좀 더 초점을 맞추었다면, 하나의 프로젝트인 이번 세 번째 작품 <1,000명의 책>은 고립과 연대의 상반된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전시 공간 중심 에 놓여 진 필경사의 방에서 1시간씩 신청자들이 주어진 책을 필사한다. 필사하는 동안은 신청자는 고립된 공간에서 오직 본인과 글쓰기만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고립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독립적인 행동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을 만든다. 고립이 연대로 가는 것이다. 이 작품 거의 사라져버린 글쓰기라는 행위, 글 쓰는 행위, -지금에 나만해도 타자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 그런 우리가 잃어버린 행위, 더 이상하지 않는 행위를 가져온다. 그 행위를 하면서 연대하는 작업을 가진다. 이 작품은 또한 여섯 번째 작품번호가 매겨진 <기억의 벽>과 조응된다.
<기억의 벽>도 글 쓰는 행위를 통해서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각자가 잃어버린 것과 그리워하는 것,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들을 각자의 작은 종이에 적는다. 그리고 이 종이는 커다란 기억의 벽을 채워가면서 그 글귀를 변화시킨다.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며 연대를 이루는 작품이다.
<1,000명의 책>과 <기억의 벽>은 서로 조응되는 작품이다. 또한 이 두 작품은 이 전시의 중심이기 도하다. 작가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전시는 사라진 것들에 관한 것이다. 그 사라진 것들 중에서도 ‘글쓰기’가 중심이 되는 것으로 이번 전시가 기획되었다. 작가님은 7년 정도 미술에 대한 글 또한 써오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생각이 있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가 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위의 두 작품은 전시 공간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기억의 벽> 작품은 또한 그 순간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함께 흘러가면서 완성되는 작품이기에, <피아노와 조율사>, 그리고 <식물의 시간2>와 시간적으로 조응되며, 시간이 흘러 연대하는 글쓰기 작업이라는 점에서 <1,000명의 책>과 조응되는 작품이다.
다시 번호 순서대로 흘러가자면, 다음은 <식물의 시간2>이다. 이 작품은 단순하게 기호적으로 상반되는 요소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공중에 올려져있는 15개의 화분들은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서로의 무게와 위치에 의해서 평행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평과 수직적인 것들이 어울러 함께 공존하게 되고, 또한 공간적인 요소와 시간적인 요소가 합치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은 <64개의 방>이다. 검푸른 벨벳으로 이루어지기도 한 이 방은 커다란 사각형인데, 그 안에 또 64개의 방으로 분할되어있다. 당신은 어디서든 시작해서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을 거쳐서 다시 이 공간에서 나올 수 있다. 이 것은 지극히 체험으로 가능한 작품인데 검푸른 벨벳의 방은 어둡고 좁은 작은 사각형들을 연달아 맞이하면서, 길을 헤매고, 그 속에 머물다가, 밖을 향해 나가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방황이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어두움의 공포 속에서 방황을 하면서 우리는 어둠이나 고요,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나, 다른 것들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사물의 뒷모습>으로 하나의 현상과 사건을 다양한 시각이나 관점으로 촬영하여 우리에게 부재하거나 사라지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영상작업 모음이 있다. 이 영상들은 대체적으로 무의미의 반복이다. 마지막에는 <침묵의 방>에 이른다. 관객들은 침묵의 방에 이르면서 전시장을 떠나게 된다. 침묵의 방은 둥글고 공허한 흰색 구로 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텅 빈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이 함께한다면 그곳은 자신의 고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없음과 있음을 경험하다가 마지막엔 우리는 침묵의 방에 이른다.
미술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작품과 전체적인 전시의 공간이 함축적이고 시적이다. 또한 예술이라는 장르 안에서 서로 이중적인 것들이 조응되는 공간이었다. 이것이 내게 많은 생각과 감명을 내게 안겨주었다. 또한 개념미술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작품들이 개념들이 잘 가시화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 또한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작가님이 이 개념들을 어떻게 가시화해서 보여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전시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부재했던 것들과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들을 만나는 경험들을 이룩했으면 좋겠다.
이중적이고 상반적인 것에 대한 예술 안에서의 조응과 연대, 그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자. 안규철 씨의 이번 작품은 변증법적이다. 생성과 소멸, 연대와 고립, 의미와 무의미, 있음과 없음, 플러스와 마이너스, 이 상반되는 두 가지 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낳는다. 본인은 그것이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더 소멸에 초점이 맞춰있는 듯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 상반된 것들을 통한 새로운 길로의 여정이 색다르고 너무 의미 있게 다가왔다.
무의미와 의미가 부딪혀 그 안에 더 큰 의미라는 것이 나온다. 이건 말로 표현되는 명확한 의미가 아니라 이상하게 마음이 채워지는, 공허가 채워지는 의미이다. 이것이 작가가 말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일까? 보이지 않는 사랑을 내가 느낀 것이 아닐까?
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일까? 왜 이것은 사랑일까? 내게 사랑은 참으로 변증법적인 존재이다. 사랑 안에는 놀랍게도 미움과 애정이 있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한다. 내가 생각할 때 사랑은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이 낳은 또 하나의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부재할 때 그 사랑을 알게 된다. 상반된 것이 만들어 내는 세계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는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리워 할 때만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그렇기에 이 상반된 속성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 전시가 사랑이며 그것도 우리가 흔히 내뱉는, 지천에 너무 흔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 사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