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괄량이 길들이기⟫

셰익스피어 희곡 다시 읽기

by 우 재

* 이 작품은 중앙대 신상웅 교수 번역의 동서문화사 출판본으로 읽었다.


아무리 셰익스피어라도 시대적 한계 속에 갇혀있다고 느끼는 또하나의 작품이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이나 다시 읽은 지금이나 뒷맛이 몹시 씁쓸하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성장한 남자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품 구성


이 작품은 서막과 본극의 2중 구성으로 짜여 있다. 작품의 제목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이 작품 속에서 극 중 극으로 행해지는 또 한편의 연극이다. 정작 극 중 극으로 행해지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이 작품의 본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도 이 작품을 제 정신으로 공연 무대에 올리기에는 부담감을 느꼈던 것일까? 혹시 공격을 받을까봐 서막에 등장하는 슬라이를 골려먹는 극 중의 극의 형식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공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의심이 드는 작품이다.



줄거리


우선 서막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슬라이라는 땜장이가 벌판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쫓겨난다. 유리잔도 깬데다 술값도 내지 않고 쫓겨난 그는 벌판에 쓰러져 잠이 든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영주와 사냥꾼들이 그를 발견한다. 영주와 사냥꾼들은 그를 골려주기로 한다. 그를 영주의 궁에 데려다가 영주의 옷으로 갈아 입힌 다음, 영주의 침대에 재우고, 또 한 시동을 영주의 부인으로 변장시켜 슬라이를 남편이라고 받들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마침 배우들이 영주를 방문했기에 배우들도 영주를 도와 슬라이 앞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로 한다. 술에서 깨어난 슬라이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모두가 영주로 모시니 진짜 자기가 영주인 줄 안다. 마침내 슬라이 앞에서 배우들이 연극을 시작한다. 그 연극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다.


Christopher_Sly_(Orchardson).jpg 윌리엄 퀼러 오차드슨 삽화, 찰스 윌리엄 샤프 판화, <슬라이와 영주>, 1876



본극인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줄거리를 살펴 보자면, 작품의 무대는 파도바이다. 이곳의 갑부 밥티스타에게는 결혼 적령기에 달한 두 딸이 있다. 큰 딸 카타리나는 제어 불능의 드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 말로는 “말괄량이”라고 번역했지만 오히려 드세다는 의미가 더 맞을 듯 하다. 결혼에 뜻이 없는 만큼 남자들에게 관심도 없고, 그만큼 공격적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런 딸을 굳이 결혼시키려 한다. 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이니 아버지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반면 둘째 비앙카는 한마디로 다소곳한 요조숙녀이다. 그러니 비앙카에게는 구혼자가 몰려들고 있다. 경쟁률이 세다. 피사의 부잣집 아들 루센티오와 파도바에 사는 나이 많은 그레미오, 호르텐시오가 큰 딸을 제쳐두고 모두 둘째에게 구혼하고 있다. 그러나 두 딸의 아버지 밥티스타는 큰 딸 카타리나를 시집 보내기 전에 둘째 딸을 시집 보낼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자 둘째딸 구혼자들이 어떻게든 첫째 카타리나가 시집가도록 꽤를 내고 있다.


그런데 마침 큰 딸에게 구혼하겠다는 작자가 나타난다. 베로나의 신사로 페트루키오 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전혀 신사라 할 수 없는 작자이다. 그는 자기에게 지참금만 많이 준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청혼하겠다고 하고, 마침내 청혼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드센 카타리나를 어떻게 휘어잡는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Carl_Gehrts_Petruccios_Hochzeit_1885.jpg 카를 게르츠, <페트루키오의 결혼>, 1885



어찌 어찌 비앙카도 피사의 갑부집 아들 루센티오와 맺어지고, 나이 많은 호르텐시오는 파도바의 한 과부와 맺어진다. 그리고 큰 딸 결혼식 피로연에서 남자들끼리 어떤 부인이 가장 남편에게 복종하는지 내기를 하며 돈을 건다. 여성들끼리 다른 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데 남편들이 자기의 배우자를 불러 누가 가장 빨리 나오는지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다소곳한 비앙카도, 과부도 아닌 카타리나가 즉각 남편의 부름에 호응하여 나오고, 그것을 본 모두가 놀란다. 그러자 페트루키오는 아내 카타리나에게 다른 부인들에게 부인의 덕이 무엇인지 좀 가르쳐주라고 한다. 그러자 카타리나는 비앙카와 과부에게 부인의 덕이란 무엇인지 일장 훈계를 하는 것으로 극이 끝난다.


그런데 본 극이 끝난 이후로 서막에 등장했던 슬라이와 영주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이 작품이 끝나버린다. 영주의 슬라이 골려먹기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나 보다.



당시의 결혼 풍습


18세기의 영국의 여성 작가들 (제인 오스틴, 조지엘리엇, 브론테 자매 등)이 쓴 작품들을 보면 영국의 결혼 풍습이 어떠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이탈리아 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결혼 풍습은 영국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가야 했다. 지참금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구혼자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은 공주나 부유한 왕실 여성들은 수많은 왕가나 귀족 자제들의 청혼을 받았다. 부 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 까지 걸린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져올 경우에는 당사자를 납치하는 일도 벌어졌다. 반면 결혼한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집안의 재산을 모두 상속할 수 있었다. 정략 결혼이 보편적이었던 당시의 결혼은 사랑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남자들의 경우는 집안의 유산이 장남에게 물려지기 때문에 차남 부터는 자기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군인이 되던가, 성직자가 되던가, 아니면 지참금이 많은 여성이나 남편을 잃은 돈많은 과부를 찾아 인생역전을 꿈꾸었다. 결혼 문화가 이러하니 돈 없는 집 딸들은 지참금을 챙길 수 없어 독신으로 사는 처자들도 많았고, 남자들도 장남이 아닌 경우에는 스스로 생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페트루키오도 지참금만 많다면 나이 불문, 외모 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사에 보면 그가 부친으로 부터 돈도 토지도 모두 상속을 받았다는 것으로 봐서 장남임에도 부인이 가져올 지참금에 집착한다. 결혼을 통해 더 재산을 불리려는 것이다.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이다. 그리고는 어차피 자기가 죽으면 모든 재산은 부인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앙카에게 구혼하는 나이 많은 구혼자 중 한 사람도 비앙카의 아버지에게 자기의 장점에 대해 나는 나이가 많은 대신 일찍 죽을 것이니 따님이 내 모든 재산을 빨리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배필로 선택해 달라고 호소한다. 이 경우는 지참금에도 관심이 있지만 돈으로 젊음과 사랑을 사려는 경우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결혼 전에 여성이 가져올 지참금에 대해서 장인될 사람과 미리 계약서를 작성하고, 또 결혼한 이후에 자기가 죽으면 전 재산을 부인에게 상속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결혼 전에 미리 작성하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결혼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분명히 문서에 못박아 놓는 것이다.


그렇게 맺어졌더라도 다행히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터 행복한 인생을 산 커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커플도 많았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데 배우자와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부와 권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야망을 가진 남자들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불행해진 여성도 많았다. 지금도 많이 보지 않는가.



작품에 대한 비판


가부장제 문화에서 성장한 남자들은 여자 보다 힘으로나 머리로나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여자는 무조건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극 속의 페트루키오는 분명히 관객의 환호를 자아냈을 마초적인 남자이다. 드센 여인을 길들여 고분 고분 말 잘 듣는 부인으로 변모시켰으니 말이다. 그 과정이 대단히 코믹하니 관객들은 웃음보가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인에게 하는 짓을 보면 참으로 못났다. 사랑과 배려와 상대에 대한 믿음으로 부인이 스스로 남편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힘으로 부인의 기본권을 박탈하면서 자기에게 복종케 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여자라면 이런 남자와 잘 살기위해 복종을 하나의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단지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자에게 복종하는 삶을 남자와 더불어 사는 방편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이 극 속의 카타리나 처럼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여성의 도리이자 미덕으로 믿어버리는지에 따라 여성의 주체적 삶은 좌우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카타리나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아쉬움이 크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의 명에 따라 카타리나가 나머지 두 부인에게 부인의 덕에 대해서 일장 훈계하는 장면은 모욕적이다. 또한 페트루키오의 어리석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관계라면 저절로 배우자에게 서로 복종하게 되어 있다. 한쪽이 유독 부인의 도가 어떠니, 남편의 도가 어떠니 하며 목청을 높인다는 것은 이미 그 부부가 평등한 부부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햄릿이 엄마를 향해 했던 말을 뒤집겠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이니라!’ 센 척 하지 마라. 그냥 사이 좋게 살자.


나는 이 극을 전혀 희극으로 보지 않는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공포물이다. 극 속의 페트루키오는 남성들의 지배적 본능이 빚어낸 남성적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실제 그런 판타지가 삶 속에서도 드러나 부인을 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기록들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딸 가진 부모라면 과연 이런 사위를 맞고 싶을까? 내용은 코미디에 가깝지만 나에게는 썩 유쾌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작품이다.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