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향수병

한국의 자연이 그립다

by 우 재

십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이 있듯 미국으로 이주한지 이제 강산이 한번 바뀌었다. 다행히 비교적 적응을 잘하며 살고 있다. 아마도 내가 살고 있는 오하이오주가 한국의 기후대와 비슷하여 4계절 뚜렷하고, 식생대도 한국과 비슷해서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한 몫하는 것 같다. 또 한국 음식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다. 미국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 미국 여행하려고 비자를 신청했다고 퇴짜를 맞은 이후로 미국의 오만함에 기가 차서 절대 가지 않으리라는 각오까지 했었다. 비자가 리젝트된 사유가 싱글 여성이란 이유였다. 1990년대는 단지 그 이유로 리젝트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람 팔자 알 수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보니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이런저런 여건을 따졌을 때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이 직장을 버리고 한국으로 오는 것 보다는 프리랜서인 내가 미국으로 와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내가 미국으로 건너온 케이스이다.


앞에서 나는 비교적 미국에 잘 적응하고 산다고 했지만 사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마음 한구석 휑한 곳이 생긴다. 삶 속의 불편함도 한 몫하는 것 같다.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미국은 한국에 비해 모든 것이 불편하다. 와이파이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행정 업무나 은행 업무 등 뭐 하나 시원하게 한번에 해결되는 것이 없다. 공무원들의 불친절함과 위압에도 적응이 잘 안된다. 또 매년 마다 새로이 갱신해야 하는 의료보험 시스템의 불합리성과 불편함은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후진적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 정도는 미국의 역사적, 지리적, 제도적 특성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며 산다. 도저히 이해안되는 불합리성이 많지만 이해가 안된다 하더라도 어쩌랴. 적응하며 사는 수 밖에....


정작 세월이 갈수록 나를 힘들게 하는 부분은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반도의 75%가 산으로 덮어있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고개만 돌리면 가깝게든 멀게든 산이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가고 싶은 산을 등산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산이 동네에 있으면 평일에도 가볍게 올라갔다 올 수 있다. 특별히 챙길 것도 없이 운동화만 잘 챙겨 신으면 야트막한 산은 몇 시간 만에 올라갔다 올 수 있다. 장시간 의자에 앉아 생활하던 나는 종종 허리병이 생겼는데, 그럴 때는 삼일 정도 연달아 가벼운 등산을 하면 씻은 듯이 나았다. 등산이 내 허리병의 최고의 의사였다. 그리고 이런 환경을 나는 당연시 하며 살았다.


그런데 미국에 왔더니 내가 사는 지역에 산이 없다. 애크론이란 지명의 뜻이 "꼭대기"라는 의미이다. 도시가 꼭대기에 있고 산 대신 도시 아래로 광활한 밸리가 펼쳐져 있다. 말하자면 산이 거꾸로 박혀있는 지형이랄까. 아무리 도리도리를 해도 산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영화에 나오는 광활한 미국의 중서부의 모습이나 프랑스 같이 비옥하면서도 넓은 농토를 가진 나라들을 보면 저들은 참 운도 좋은 나라에 산다고 생각했다. 그 넓은 평야에 농사를 지으면 우리나라 농민들처럼 힘들게 농사짓지 않아도 수확량이 엄청나게 나오고, 국민들도 널널한 땅에서 더 넓은 집과 땅을 누리며 사니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산으로 막혀 있으니 광활한 평야가 주는 느낌이 어떤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이런 것이 나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도시에 살고 있으니 광활한 평야가 있는 시골의 삶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런데 일상에서 광활한 평야 지역을 몇 시간이고 지날 때는 지루함을 넘어서 멍해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처음으로 광활한 대지를 본 것은 내가 사는 오하이오주에서 서북쪽으로 있는 시카고 미술관을 갈 때였다. 5시간 넘게 자동차로 달려가는 동안 고속도로 양편으로 건물이라곤 거의 없고 광활한 평야만 펼쳐졌다. 정말로 충격이었다. 이런 곳이 있구나. 약간의 현기증과 울렁증이 올라오면서 우울감을 느꼈다. 왜그랬는지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디든 이런 지형이다 보니 여행할 때 바깥을 보는 재미가 덜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어, 터널이 없네!' 한국에서는 그토록 자주 지나치던 터널이 미국에는 없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 여기에서 저기 갈 때만 해도 터널을 몇 개를 지나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몇 시간을 달려가도 터널이 하나도 없었다. 광활한 평야지대가 이어지니 당연히 터널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하이오주의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5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캐나다의 토론토를 갈 때도 터널은 하나도 없다. 우리집에서 캐나다 동부 끝까지 2박 3일간 거의 20시간을 달려가는 동안에도 터널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의 북동부에는 산들이 많지만 터널을 뚫어 놓은 곳은 보지 못했다. 혹시 다른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거쳐간 루트에는 하나도 없었다. 산들이 자동차로 넘어다닐 수 있는 정도의 야트막한 산이거나 산이 높더라도 경사도가 완만하게 높아지는, 산이 긴 형태의 지형이라 터널을 뚫기 어려운 구조인 것 같다.


그러다 지난 9월말 미국으로 이주하고 처음으로 터널을 보았다. 오하이오주의 남동쪽에 있는 게티스버그에서 남편의 피아노 콘서트가 있어서 동행을 했다가 돌아오던 길에 처음으로 터널을 지났다. 그곳은 산맥이 거대하게 펼쳐진 지형이었다. 얼마나 터널이 반갑던지 통과하면서 '터널이다!'를 외쳤다. 한국에서는 터널 통과하는 것이 싫기도 했고, 긴 터널을 지날 때는 약간의 공포심도 일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미국에서 터널을 보자 대단히 반가웠다. 사실은 터널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한국에서 익숙하던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 신나서 소리를 친 것 같다.


야트막한 산맥이 거대하게 앞에 펼쳐져 있다.
20251001_142615.jpg
20251001_142634.jpg
세 장의 사진은 게티스버그에서 오하이오주의 집으로 돌아오던 동안 지나친 산과 통과한 터널과 터널 내부의 모습




나는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산과 그 산들이 어디에서든 보이는 지형이 이토록 그리워질지 몰랐다. 산이 많으니 자연스레 생겨난 터널들까지 그리워질 줄이야.


내가 사는 곳은 산이 없는 대신 밸리가 넓게 펼쳐져 있고 나무가 많다. 밸리 주변으로 트레킹 코스와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잘 갖춰져 있다. 몇 해 전 어느 날, 너무도 등산이 하고 싶어 밸리를 갔었다. 한국 산처럼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과 반대로 내려갔다 올라오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등산할 때 느껴지는 다리 근육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경사도가 너무나 완만해서 다리에 힘쓸 일이 없었다. 흥미가 싹 사라졌다. 그렇게 한번 트레킹을 해보고는 다시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 한군데 아트막한 산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자갈도 있고, 바위도 곳곳에 있는 오르락 내리락이 잘 조합된 산이 있어서 등산할 때 발 밑으로 느껴지는 돌맹이와 바위가 주는 약간의 통증과 급경사를 오를 때 느껴지는 다리 근육의 팽팽한 긴장감과 숨이 가빠 저절로 헉헉 소리가 나오는 에너지의 폭발을 느끼고 싶다. 산 꼭대기에 샘이 있어 약수물 한 바가지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고.


사람들이 향수병 없냐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다행히 향수병은 없다고 대답하곤 했다. 진짜 그랬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한국 자연이 그리워 마음을 애태우게 되다니... 한국 산을 옮겨올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까. 요즘 외국인들이 한국 등산 맛을 알고 등산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인증 영상을 올리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매일 이런 영상들을 시청하기도 하고, 산골과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상들을 보며 향수병을 달래기도 하고,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읊조리기도 하니 이를 어찌할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주택을 위협하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