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작가에게 권선징악 같은 건 없다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고, 그만큼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다고 좋은 글 혹은 돈이 되는 글이 나온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5) 삶에 사건 사고가 잦으면 소재도 많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만, 관찰자로서 통찰력을 가지는 것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덤불 속에 갇혔는데 발등에 불까지 떨어진 주인공으로 사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픽션에서는 주인공이 갑자기 모든 것을 해결할 아이템을 얻을 수도, 누군가에게 구조될 수도 있다만 현실에서는 눈앞의 건 건을 해결하느라 통찰과 상상 따위는 사치 같았다. 사기당한 직후 쓴 드라마 대본은 아직 폴더에 잠들어 있다. 분노와 절박함만이 담겨 있어 일부 캐릭터는 과잉되었고 일부는 입체적이지 않은 데다, 다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이야기 전반이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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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즈카 오사무가 전후의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하다며 부러워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데즈카 오사무는 경험의 유무를 떠나 감수성의 빈곤과 노력의 정도를 지적한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マンガ の描き方》 데즈카 오사무, AK커뮤니케이션즈,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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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여전히 계속되는데 모니터 앞의 나는 빈 종이와 싸울 때가 더 많다. 뭐라도 쓰다가도 끝을 보지 못하고 더 쓰지도 더 자지도 더 먹지도 못하고 방 안만 빙빙 돌 때도 있다. 오래전에 끼적인 것들을 다시 열었을 때도 마음만 조급할 뿐, 다시 읽는 것조차 부끄러울 때도 있다. 상상은 짤만 남길뿐, 온전한 이야기를 주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럴 땐 ‘국어사전부터 다시 시작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온라인과 앱의 사전이 넘쳐나는 때에 나는 종이 사전을 두고 ㄱ부터 읽어 나갈까, 아니면 아주 고전적인 수법으로 찢어 먹을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여기에 통장 잔액을 괜히 확인해 우울감이 더해 갈 때면 ‘기회비용과 효율’ 두 단어가 계속 맴돈다. 나의 최근 화두는 상상과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라는 에세이에서 글을 쓰려면 온전히 집중하여 쓸 수 있는 공간과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대 여성들은 보통 자신만의 공간과 소유가 없어 글을 쓰기 어려우며 이는 불합리하다고. 그런 버지니아 울프도 숙모로부터 6) 2,500파운드의 유산을 받는다. 비슷한 시기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툭하면 유산을 둘러싸고 살인이 일어나는데, 그 액수가 7) 약 2만 파운드부터 많게는 100만 파운드다. 86세의 생애 동안 단편, 장편 등을 포함하여 약 200여 작품을 썼다는 이 대단한 글쟁이는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40억 부의 책을 팔았다. 100만 파운드를 묘사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얼마 큼인지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의 〈헤스페리데스의 사과The Apples of Hesperides〉 편에서 주인공 푸아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불필요한 행동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야, 조르주.
인생에는 황금률이 있다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을 절대 직접 하지 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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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받은 2,500파운드(1909)는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4억 1,000만 원가량으로 추산된다. (2021 measuringworth.com 기준)
7)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는 1920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76년 그녀가 사망하던 해까지 작품을 출간했다. 작품을 처음 출간했을 1920년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이고, 작품 활동 중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기에 작중 유산의 값어치는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영향력과 물가의 부침과 관련이 깊다. 1926년 출간한《애크로이드 살인 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에서 애크로이드가 살해당하자 조카 플로라는 2만 파운드의 유산을 받는다. 1926년의 2만 파운드는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8억 1,500만 원가량으로 추산되지만 구매력으로 환산했을 때는 약 159억 5,000만 원가량이다. 이 정도도 억 소리가 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1937년 출간된《벙어리 목격자Dumb Witness》의 테레사 아룬델은 30만 파운드가량을 물려받았는데, 이를 다 탕진하는데 걸린 기간이 3년 남짓이라 한다. 1937년의 30만 파운드는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302억 6,000만 원 정도이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1,950억 9,000만 원가량이다. 1949년 출간된 《비뚤어진 집Crooked House》의 소피아는 최소 100만 파운드 이상의 유산을 받으며 할아버지의 자산이 너무 많아 정확하게 계산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100만 파운드 이상은 상상에 맡기겠다. (2021 measuringworth.com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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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나는 위의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유산을 물려받지도 못했고, 젊은 시절 작품이 대박 나서 선순환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쓸모없는 줄 알면서 몇 푼을 위해 불필요한 행동에 에너지를 낭비해가며 글을 쓰고, 글만 쓰겠다며 그 쓸모없는 일을 당장 그만둘 수는 없다. 이런 내가 그녀들보다 유일하게 잘 타고 태어난 건 21세기가 통신과 프로그램이 발달한 시대라는 것. 작가는 도구가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전업이 아닌 나는 작가 모드로 전환할 때 앱이나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