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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29. 2024

#06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이야기 젤리를 보관하는 나만의 상자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기록해 두는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지만,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나는 이 역시도 스프레드시트로 관리한다. 처음에는 손이 닿는 모든 곳에 기록했다. 다이어리에 기록했고 포스트잇을 사방에 붙였다가 점착력이 떨어져 날아다닐 때 즈음 되면 다 걷어서 모아두고 다시 새로운 포스트잇으로 도배를 했다. 공연하고 있을 때면 공연 기록을 남긴 작업노트와 대본에도 기록해 두고, 어떤 때는 읽던 책 귀퉁이에도 적었다. 손에 집히는 아무 A4 용지, 카페에서 주는 쟁반에 올려진 광고지 등 기록이 사방에 흩어져 있자, 안 되겠다 싶어 투명한 파일홀더를 사서 겉에 가제를 써넣고 항목별로 모아두었다. 포스트잇이나 연습장, 광고지 등은 한데 모아둘 수 있지만, 책이나 대본, 다이어리 같은 걸 찢기는 난감했다.


기기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다시 스티키 메모와 한글이나 워드 파일을 많이 사용했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 이번엔 모니터와 하드를 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모니터를 3개나 쓰는데 스티키 메모가 화면 가득이라 부팅 속도마저 느려졌다. 그러다 〈은퇴한 아이돌을 위한 나라는 없다〉, ‘프로 비혼러’, ‘블랙 로코’를 동시에 기획 및 프리 작업하게 되었을 때 더는 이렇게 어지럽게 관리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이 되려면 무엇보다 ‘정리’가 잘 되어야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 진행 상황]이라는 시트를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 관심 있는 소재는 코피노이다. 2020년 9월에 관심 있던 소재는 9) 폴리아모리였고, 비슷한 시기에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로 호러물에서 양아치가 보편적으로 빨리 죽는다는 ‘아치 호러’, 통통한 사람의 경연대회를 다룬 ‘뚱밍아웃’ 등을 썼다. 2020년 7월에는 주술, 청년 지방선거 의원에 관심이 있었다. 정리하고 보니 내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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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많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poly’,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amor’의 합성어이다.

우리말로는 ‘다자간 연애’라고도 한다.




《장르 글쓰기 01 SF, 판타지, 공포Now Write! Science Fiction, Fantasy and Horror》는 여러 작가, 각본가, 제작자들의 스토리텔링 비법을 모아 놓은 책으로, 여러 명언이 있지만 그중에는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도 나온다. 예를 들어 ‘모르는 것 쓰지 마라, 독자들에게 지적당한다.’ 글쎄. 어떤 경우에도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는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미래에도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이언맨Iron Man〉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수많은 공대생을 들끓게 했고, 〈스타트렉Star Trek〉이 없었다면 스타택이 나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위의 측면에서 보자면 〈컨택트Arrival〉에서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지 않고 원형으로 보는 외계인이 있다는 것,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에서 모든 인간의 정보는 스택에 저장되고 육체는 언제나 교환 가능한 슬리브라는 이야기가 모두 나올 수 없다. 결국, 모르는 것은 쓰지 말라는 것은 아예 이야기를 쓰지 말라는 것과 같다. 최선을 다해 필요한 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쓸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은 《악몽과 몽상1 Nightmares and Dreamscapes》의〈돌런의 캐딜락Dolan’s Cadillac〉 을 쓸 때 차체를 땅에 온전히 묻으려면 얼마 큼의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하는지, 어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지가 궁금했다고 한다. 이때 수학자인 형에게 도움을 청했고 형은 미니어처를 만들어 실험하며 함수를 이용해 설명한 비디오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스티븐 킹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에 필요한 수학적 이해가 있는 것이지, 수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과학 스토리텔러 양성과정]의 수강생이었을 때 써 내려간 ‘OS 새서울’과 《얼터드 카본》의 유사점을 처음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것은 자괴감이었다. 사람들이 SF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재이다. 소재가 겹치면 새롭지 않다며 실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많다. SF 덕후들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작품을 쓰기도 전에 망설이는 걸 꽤 봤다. ‘신선하지 않아, 뛰어나지 않아’의 망령이 계속 따라다니니까. 이과 출신도, SF 덕후 출신도 아니라서 나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괴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성취감부터 찾아봤다. 그렇다. 한때 유행했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지극한 10) ‘문송합니다’ 출신이라 SF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고 여긴 적도 있다. 내가 ‘OS 새서울’ 세계관을 만든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였다. 다음으로 《얼터드 카본》에서 쓰였던 11) 기믹과 내가 쓴 기믹을 살폈고, 배경, 인물, 사회 구성 등을 모두 살폈다. 그랬더니 《얼터드 카본》은 이미 디스토피아이고 ‘OS 새서울’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서막을 그린 작품이라 시제가 약간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얼터드 카본》은 이야기의 흐름이 주로 재구성된 현실사회에서 일어나지만 ‘OS 새서울’은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가는 웹 네트워크에서 일어난다. 만약 기믹과 소재가 겹친다는 것 때문에, 내가 그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쓸 수 없다면 최초의 우주 함대, 외계인과의 조우, 슈퍼히어로물 이후의 작품들은 모두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늘 앞선 작가보다 뒤선 작가가 모르는 게 더 많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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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과라서 (디지게) 죄송합니다.'라는 뜻.

11) gimmick의 어원은 ‘마술사가 사용하는 장치’를 지칭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재는 많은 분야에서 확장된 뜻으로 사용한다. 스토리 분야, 특히 영상화 스토리 분야에서는 패턴, 클리셰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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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관심 있는 이야기인 코피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국의 다문화 가구원은 100만 명을 돌파하여 국내 인구의 2%를 차지한다고 한다. 현재 초등학교 한 학급은 보통 20~25명이다. 이중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한두 명쯤 있는 학급도 많다. 이들이 곧 다가올 독자들이다. 그런데도 아직 한국에선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으로 그들을 구분한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한국 출생인지 귀화인지 묻지도 않고 그들을 모두 타인으로 퉁쳐 버리는 이 단어는 얼마나 안일한가.


모르는 것은 알아가며 쓸 수 있다는 내 믿음에 반해 시장과 전문가는 그런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은 공부할 필요 없다며.

소재를 다양하게 마음껏 쓰기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 웹툰 팀 PD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한국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는 동일 문화권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그러니 12) 이 땅에서는 잘 되는 이야기가 있고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네트워크 이전 시대의 이야기는 최대한의 공감이 가장 먹히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공감이란 보편적 다수를 상대로 하는 이야기이고 이는 자칫 이야기의 위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여전히 다수의 공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수의 사고를 확장하는 것, 이야기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폭넓은 관점을 키워 줄 수 있는 것은 약간은 새로운 소재, 낯선 이야기이지 않을까?


스프레드시트에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고 가장 뿌듯했던 것은 될 만한 이야기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누가 아이디어 젤리는 항상 빨강이어야 한다고 하면 노랑을 빨강으로 바꾸려 기를 쓰거나 새로운 유행이 나오면 이제는 파랑이어야 하는데 빨강밖에 없다며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자 그득 알 수 없는 색의 아이디어 젤리만 가득한데 어떤 것은 누르스름하고 어떤 것은 시퍼러딩딩한 데다 초록 점박이여도 그저 웃는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될 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 검열하지 않고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적으면서 왜곡하지 않으려 애썼기에 다시 처음의 흥분이 기억난다. 귀지 맛 젤리가 보편적 다수에게 맛있지는 않아도 누군가는 맛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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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프로이트가 쓴 글들을 묶은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의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글에서는 독일어를 기반으로 두려움을 표현한 단어들의 어원을 따라가 본다. 주로 ‘친숙한, 편안한’이란 단어는 ‘집같이 편안한, 익숙하며 친숙한’과 같은 단어들의 조합이다. 이들의 반의어는 ‘(집 같지 않아서, 해보지 않아서) 낯선, 두려운, 기괴한, 불쾌한’이다. 유튜브 채널 ‘영국 남자’의 조쉬는 영국인들이 매번 해봤던 선택을 한다고 했고, MBCevery1의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핀란드 편에서 핀란드 친구들은 핀란드인은 가봤던 곳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러니 한국인만 낯선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도 국가인데 북한 때문에 섬이 되어 버린 이 나라의 낯가림은 유독 심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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