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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This Is Water」 후기 ⑤

눈을 감으면 그날. 거기. 그곳에.

by 아노 Art Nomad

사기당한 금액은 총 2- 3억 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 금액 안에는 우리가 필리핀에 입국하기 전에 지불한 미국 비자 신청수수료, 필리핀 현지 생활비 / 받지 못한 월급, 원금, 이자 등이 들어간다.


당시 취업 사기를 당한 동료들의 나이는 스물여섯에서 서른이었다.

만 나이로 치자면, 스물다섯에서 스물아홉.


‘눈을 감으면 그날, 거기, 그곳에 서 있었다.’로 시작하는 ‘놈’을 경찰서로 데려가던 날에 대한 은혜의 회상은 모두 찐이다. 아직도 떠올리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날의 온도, 습도, 냄새 그리고 그 길이.


경찰서에서 조서를 써야 하는데 영어로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 두 명 밖에 없었다. 결국 둘이서 인원을 나눠 통역을 도왔다. 내 황망함의 무게만도 감당하기 벅찬데 어쩔 수 없이 내막을 전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조서를 쓰는 방 바로 앞에 유치장이 있었다. 우리가 진술하는 동안 그가 철창 앞에 바짝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 사이에는 사람 하나, 둘 겨우 지날만 한 좁은 복도 뿐이었다. 지독한 더위 때문에 경찰이 조서쓰는 방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다 들렸을 것이다. 동료들은 그가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봐 두려워했다. 눈치보며 진술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떠듬거리는 내 영어가 얼마나 정확하게 상황을 전달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담당 경찰은 즐거워했다. ‘이거 완전 오션스 일레븐인데?’라면서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단 한국 사람은 해외에 있어도 ARS로 몇 분 안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2014년 당시, 필리핀 은행에서는 직접 찾아가 한참을 기다려 여러 서류를 작성하고도 6개월 걸릴 것을 한국 은행에선 단 몇 분 안에 승인해 준다는 것도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봤다. 내가 통역하지도 않은 말을 적으며 슬픈 표정도 지었다.


그가 사기꾼인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슬펐다고.


내가 통역해 준 그녀는 전혀 슬픈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정정 요구를 해도 이렇게 써야 한다며 바꿔주지 않았다. 이 말도 그 놈은 듣고 있었을 것이다.


대표를 사칭한 사람은 지역 갱과 연이 있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람들이 갱이였는지 아니면 순진한 지역 주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보스(Boss)라 불리는 자칭 한국 기업 사장이며 지역 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주말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다. 지역주민 입장에서는 그런 좋은 사람을 경찰에 찔러 넣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었지 않을까? 게다가 우리가 아홉 번 째라면 한 번의 피해자들을 모두 고용유인하고 사기 치는 데까지 최소 1년만 잡아도 장작 10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이 기간 동안 기업인 행세를 하고 지역복지를 위해 힘썼다면 지역 유지와 친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그가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걸 본 적 있다는 한 동료의 말에 우리는 조서가 끝나는 즉시 흩어지기로 했다. 대부분은 한국행을 택했다.


필리핀에 남아 있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이미 대출금이 두어 달 연체되어 인천공항에서 휴대폰을 켜자마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끌려갈 것만 같다며 한국행을 꺼려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엔 대출금이 연체되었다고 당장 체포하러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만, 그때 우리는 모두 어리숙했고 어안이 벙벙했다.


남은 돈을 그러모아 변호사를 선임하고 흩어졌다.


열정을 다 했던 만큼 피가 거꾸로 솟은 내가 피해자 대표 격으로 변호사와 소통하기로 했다.


약 한 달 뒤, 변호사에게서 검사와의 약속이 잡혔다며 검사를 만나러 와야 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약속한 날 나와 필리핀에 체류하기로 한 동료 하나, 변호사가 함께 검사를 만나러 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정에 클락으로 가는 비행기를 구하지 못해 마닐라까지 가서 택시를 타고 앙헬레스로 가야 했다.


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필리핀 드라마 「아모: 어둠의 보스」, 다큐멘터리 「행복한 교도소」등을 보고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검은돈을 요구하는 제스처였는데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변호사는 추가적인 비용을 요구했고 동료들은 모두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땐 다들 없었던 일로 여기고 일상을 회복하기에도 벅찼던 것 같다. 필리핀에 체류하기로 한 동료 역시 더 이상 이 일에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놈의 얼굴이라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약 3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유치장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변호사에게서 놈이 검찰에 송치되었다거나 불구속 기소 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검사가 불렀다고 해서 가봤더니 검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아직 유치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경찰서로 갔다.

머릿속에 그날의 온도, 습도, 냄새가 떠올랐다.


검사에게 당한 게 있어 황망함, 허탈감 등으로 내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들어와선 안 될 곳에 발을 디딘 어린아이처럼 한껏 주눅도 들어 있었다.


「그놈 좀 볼 수 있을까요? 제가 그놈의… 」


여기까지 말했을 때, 한 경찰이 대표를 사칭한 남자의 영어 이름을 듣고 반색하며 달려왔다.

내가 그의 친구인 줄 알고.


「제가 그놈의 피해자인데… 」


경찰은 갑자기 낯빛을 바꿨다.


「그놈이 왜 아직도 있어, 구치소에 갔지.」


순간 나는 직감했다.

대표를 사칭한 남자가 경찰과 검사에게 뇌물을 먹이고 빠져나갔다는 걸.


그제야 조서를 쓰던 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 몇몇이 대표 이름으로 넘겨주었던 박스,

필리핀에서 제일 맛있다는 졸리비 치킨,

그것도 뇌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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