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영화 로마(2018)
1권의 공저 출판작, 6편의 웹툰, 1편의 웹소설을 썼다.
이 중, 작년에 론칭된 네 작품은 각각 최소 5개월에서 최대 22개월을 준비한 작품이다.
작년 한 해동안, 네 작품 연재 준비 외에 무수한 공모전 도전과 기획안 제출을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렇게 스무 여번 상심했다.
올해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 꼭 될 것만 같았던 계약이 되지 않았고, 제안받은 건 앞서 다른 작가님이 쓴 걸 그대로 이어 써야 한다는 데에 자신이 없었다. 어떤 공모전에서는 당선되었으나 플랫폼 자체가 없어져 장기연재를 지원하지 못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떨어지는 데는 이골이 났다.
배우 하던 시절엔 서류만 300번, 오디션은 100여 번에 가까이 떨어졌다.(이렇게 떨어지고도 몇몇 배역을 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경이롭다.) PD로 전향하여 취업하려던 시기에도 80번은 떨어진 것 같다. (이렇게 떨어지든 말든 알바를 30여 가지를 해봤다는 것도 경이롭다.)
떨어지는 데 이골이 났어도 상심의 크기는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번 떨어지나 백 번 떨어지나 아프다.
이솝우화의 여우는 못 먹을 포도를 보고 '그래! 저건 맛이 없을 거야! 완전 신맛이 날 거라고!' 하고 큰 소리를 쳤다는 데 나는 이런 성격이 못 된다.
내가 뭘 제대로 알고나 쓰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나의 쓸모도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번에도 호기심이 지독한 열등감을 이겼다. 세상엔 알고 싶은 게 아직 너무도 많다.
이야기를 단순화해 보자.
내가 뭘 모르는 것 같아 우울하다면 알게 되면 더 이상 안 우울하게 되는 거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면, 난 아무래도 많이 소모되었던 것 같다. 아는 것은 이미 많이 써먹었다. 모르는 것도 어떻게든 배워가며 썼지만 연재 펑크 내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쓰니까 쓰는 게 즐겁지 않았다.
작가가 쓰는 게 즐겁지 않다니. 큰 일 났다.
그래서 중고로 브리태니커 1998을 샀다.
뜬금없이 백과사전?
오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공모전마다 떨어지고 계약은 계속 엎어져서 돌아버렸는지 모르겠다. 빈 통장이 울부짖는데 난데없이 백과사전을 사다니. 학교 다닐 때 일부 조선 양반님네들께서 집에 쌀이 떨어져도 책을 봤다고 해서 기염을 토했는데 그 피가 내게도 흐르나 보다.
중고거래 판매자들은 대체로 ‘장식용’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거실에 장식해 놓으면 있어 보인다고. 얼마 전에 본 「로마」(2018)라는 영화에서도 멕시코 부잣집 거실 장식장에 브리태니커가 놓인 걸 보았다. 애석하게도 우리 집에는 거실이 없다. 그러므로 거실 장식장은 더욱 없다.
깨끗한 책을 고이 넘겨주신 참 고마운 중고거래자 님께서 세 박스에 나눠 담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직접 실어오셨다. 그가 말했다.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 말투가 진귀한 동물을 보며 놀라워하는 것만 같아 눈을 마주치기가 좀 그랬다. 왠지 내가 사는 허름한 건물 외관을 보고 거실이 없는 집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총권 28권.
브리태니커 한 권은 약 55권의 책을 엮은 것과도 같은 양의 정보가 담겼다고 한다.
당장 읽기에는 조금 버거워 나중에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타고나게 산만한 나는 한글 자모의 배열이라는 규칙성만 있을 뿐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는 이 임의의 정보가 궁금해 참기 힘들었다. 검색엔진으로 타깃 검색을 하거나 알고리즘으로 연관정보를 이어주는 요즘 세상에서는 임의의 정보를 무작위 하게 읽는 것조차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구매한 지 채 3일도 못 버티고 결국 브리태니커 1권을 집어 들었다. 1권은 총 688쪽. 하루 2쪽씩 읽으면 일 년이면 충분히 읽을 양이지만 그렇게 읽었다가는 28권을 읽는데 28년이 걸리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빠르게 읽기에는 정보량이 조금 버거웠다.
모르는 단어를 모두 찾아가며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단어는 반드시 알아야만 다음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떤 단어는 생경함에서 오는 호기심에 검색엔진을 열어 검색해야만 했다. 검색한 단어는 알고리즘을 타고 위키와 위키를 건너가며 새로운 정보를 내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날아갔다. 빈 통장이 신경 쓰였지만 읽는 시간 동안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20P 읽기를 시도했다. 실패했다.
하루 10P 읽기를 시도했다. 역시 실패했다.
하루 5P 읽기를 시도했다. 20P, 10P를 읽기로 했을 때, 1, 2P 읽기에 그쳤던 것에 반해 조금 버거웠지만 성공했다. 하루 5P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3번, 2주 차까지는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예상하셨겠지만, 그 후로 열어보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많다. 먹고살기 바빴다. 계약 원고를 써야 했고, 살림이 만만치 않았다. 트렌드에 신경 쓰기도 바빴고, 빨리 돈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심했다. 결정적으로 반려가족이 무지개다리를 건널 위기에 놓여 심란했다.
습관이 든 어떤 일은 그저 무의식적으로도 한다. 하지만 습관이 들지 않은 일은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이미 자리 잡은 다른 일들에 밀리게 되는 거 같다.
공부하면서 기록했던 것들을 여기 올리게 되면 좀 더 규칙적으로 공부할까 싶어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