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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Jul 01. 2016

주택에서 아파트로

'우리집'에 대한  소소한 단상들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과 관계의 총체적 반응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 딱딱한 분석적인 문장에서 나를 떠올려 보는 것은 사실 그다지 와 닿지는 않는다. 나는 흙냄새를 맡을 수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 나는 유머를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부당함에 분노를 느낀다. 나는 정말로 사람에 대한 프로이트식 단언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사람에 대한 유전자적 특성에 대해 제시하는 몇몇 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이것은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이트식 진단의 등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마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물학적 반응들이 우리 행동 패턴의 방향성을 ‘결정’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임에는 틀림이 없다. DNA나 생물학적 작용들이 사람의 성격과 지향성을 결정하는 근원적 조건이라는 것에 대해 굳이 부정적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람의 행동 패턴이나 멘탈 모델에 대해 적절한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 이래로 항상 지속적인 고민거리였으므로 이것은 나름 온당한 노력이다. (현상학에서 최근 DNA생태학으로 옮겨온 과도한 결정론에도 약간의 착시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고 애써 기대해 보지만 말이다.)




우리에겐 어떤 신비로운 기억, 혹은 그 시기 언어의 뉘앙스를 다룰만한
기억의 저장소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억이나 관계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관계에 대해 그다지 탁월한 재능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 파티에 가보자. 나는 항상 그런 자리가 불편하다. 차라리 나는 댄스 클럽이나 콘서트장이 더 좋다. 전문가 모임의 파티나 오프닝 행사는 정말이지 진땀 난다. 나는 누군가? 이 사람들의 친구인가. 동지인가. 정말로 깊은 전문적 인식으로 연대한 영적 공동체인가. 머 솔직히 나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서로들 잘 아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솔직함과 이해심이 깃든 우정의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관계에 대한 어떤 어두운 과거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삶과 본질적으로 관련을 맺는 비범한 관계는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반대로, 그렇게 과시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제한된 공간에서 가지는 친밀한 표현은 어떠한 관계적인 것들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가설인데, 그러한 외시성 (어떠한 내면화되지 못한 그럴싸하게 만들어지는 가면무도회 혹은 사회적인 제스처) 가운데에 자리 잡은 불안 같은 것. 그것이 사람들을 연대하게 하고 모이게 하고 자꾸 가시적인 무엇인가를 만들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역사 이래로 불안을 섭취한 그 어떤 시도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 우리 집 마당에서 감나무를 타고 장난을 치던, 형제들과 싸우던, 흙을 뭉쳐서 옆집 동네 아이들을 골탕 먹이려 만들던 흙 폭탄들 속에 나의 흔적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나는 기억과 관계라는 말은 어떤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식 명재나 유전학적 결정론보다 더 멋있고 아름답게 와 닿는다. ‘우리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자. 나는 며칠 전 이 말의 신비에 대해 생각이 났다. 나는 내가 살아왔던 각각의 다른 집들에게 ‘우리 집’이라고 명명했다. 그 각각의 주택들은 각기 다른 집주인과 천차만별의 계약조건과 다른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위치한 국가 조차 다르다. 그런데도 놀랍게 그 집들은 ‘우리 집’이라고 명명한 이후 동일한 분위기의 집으로 변모했다. 인테리어나 여타 계약조건을 압도하는 그 우리 집의 공기는 정말로 분명하게 그곳을 동일한 정도의 분위기로 변모시켰다. 



나는 갑자기 이런 것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것이 어쩌면 언어의 신비일까? 아마도 이것이 기억, 혹은 사물과 사람들과 맺고 내가 주고받은 관계들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의 대응관계나 차이들이 없다면 한 사람의 정체성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미개의 언어나 문명도 처음부터 완전한 체계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 그 우리 집과 그 골목길들 모퉁이 사이사이 내가 명명했던 이름들과 사물들이 실상 나를 결정하고 함께 성장하여 왔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말의 신비에 대해 주목한다. 그 말들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이름, 명명하기, 설명들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나’를 결정해 온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 나의 인맥, 나의 유전적, 성격적 방향성 이상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창의성과 변화는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언어를 발화하는 순간 얻는 신비도, 기억도, 갑자기 변화는 기적의 희열도 21세기의 생태학이나 유전자학이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서 어떤 영적 숨결을 기록해 온 것일까? 기술적인 어떤 과정으로 변모한 언어, 네트워크 속의 자아는 소용이 없으니 옛날의 비문명적인 상태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어떤 신비로운 기억, 혹은 그 시기 언어의 놀이와 명명하기를 통해 진정한 이름을 찾곤 했던 기억의 저장소가 필요하다. 




photo by Benoit Paillé  (프랑스 사진작가 베노이트 페일레의 작품)



며칠 전 나는 주택에서 아파트로 집을 옮기게 되었다. 마당에 늘 자주 오곤 했던 고양이, 아침마다 잠을 깨우던 시끄러운 참새 친구들, 쓰레기를 항상 우리 집 쪽으로 치워서 눈총을 받곤 했던 러닝 차림의 아저씨, 나무 그늘, 이런 것들은 이제 딸아이의 아련한 기억 속으로 작은 흔적만을 남길 것이다. 내내 드나들 때마다 이층의 조그만 창문에 얼굴을 뾰족이 내밀고 인사를 했던 딸아이에게 줄 수 있는 그런 기억만큼 소중한 선물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지어 불렀던 (설사 내가 태초의 그 단어의 창조자가 아닐지라도) 그 ‘우리집’이라는 단어만큼은 영원히 우리와 더불어 살 것이고, 나도 모르게 순간의 나를 결정하며 신비의 순간 속에 머물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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