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신예희
바스크, 스페인, 신예희
스페인은 꽤 넓은 나라다. 대한민국 면적의 약 5배나 되는 땅. 피레네 산맥 줄기에 걸쳐 있는 북부 바스크 지방을 여행하다 곧바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나라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뜨거운 피, 로맨틱한 심장, 파티 그리고 파티. 스페인 하면 막연히 이런 간질거리는 상상을 하게 되지만 북쪽 끝 바스크 지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 잡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품은 민족이 바로 바스크인이다. 짧은 기간 그들의 왕국을 세웠던 아름다운 시절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외세, 즉 에스파냐 왕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바스크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민족이다.
우선 그들의 언어, 바스크어는 유럽의 여러 언어 중에서도 학습 난이도가 가장 높다고 알려졌는데 선사시대 언어의 흔적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언어라는 학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성이 밝혀지지 않았을 정도로 독립적이다. 두 번째는 그들의 혈액형인데, 순수한 바스크 혈통의 약 85%가 Rh- 혈액형이니 역시 독특하고도 독립적이다. 그래서일까? 바스크인들은 그 오랜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언어로 대표되는 바스크의 문화를 잃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민족주의 성향을 고수해 왔다.
게다가 꾸준히 스페인 정부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히며 국가 평균을 한참 웃도는 바스크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을 생각하면 단순히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만이라고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빌바오와 산세바스티안, 팜플로냐 등 바스크 지방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스페인 국기 대신 빨간 바탕에 녹색 십자가, 그리고 흰색 십자가가 겹쳐진 바스크의 깃발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미스터리 한 지역, 궁금해지는 사람들.
구석구석
바르
이 나라 사람들은 밥 대신 술만 마시고 사는 걸까?
호기심을 한가득 안고 바스크에 입성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일명 순례자의 길을 걸을 때 거쳐 가게 되는 곳이자 스페인에서도 특히 미식의 도시로 이름난 산세바스티안이다. 미슐랭 가이드가 인정한 레스토랑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인구당 미슐랭 별의 개수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일 정도. 그렇다면 멋진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의 깍듯한 시중을 받으며 우아하게 코스 요리를? 땡! 여기선 동네 술집이 곧 최고의 맛집이다. 스페인에는 널린 것이 술집인데, 지역을 불문하고 차가 지나다니는 큰 길이든 꼬불거리는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 이든 바르(bar)가 수두룩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밥 대신 술만 마시고 사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대부분의 바르가 술집과 카페를 겸하고 있으며 가벼운 스낵을 즐길 수도 있어 상황에 따라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런치와 디너 타임이 정해져 있어 자칫하면 식사 시간을 놓칠 수도 있는 번듯한 레스토랑 대신 어디나 있는 바르에서는 언제든 마음 편하게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문과 담배, 과자류에 심지어 복권 판매도 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편의점도 겸하고 있는 셈. 친구를 사귀기에도, 몇 시간이고 죽치면서 책을 읽기에도 좋은 곳. 길을 걷다 여차하면 후다닥 뛰어들어가 화장실부터 이용하고 멋쩍게 웃으며 나와도 뭐라 할 사람 없는 곳이 바로 스페인의 동네 술집, 바르인 것이다
돌직구적 핀초
오늘은 어떤 조합으로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까?
그뿐인가, 각 바르의 특선 안주를 맛보며 술을 홀짝이는 재미도 최고다. 자그마한 접시에 한 입 거리의 다양한 음식을 담아내는 스페인의 안주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타파스(tapas)로 알려져 있지만 바스크 지방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이름하여 핀초(pintxo). 다양한 변주와 맛의 조화가 일품인, 바스크 미식의 시작이자 끝이다. 핀초는 이쑤시개 같은 뾰족한 꼬치를 뜻하는 바스크어로, 일반적인 이쑤시개보다는 좀 더 길쭉한 꼬치로 여러 가지 음식을 콕콕 꿰놓은 음식의 형태를 말한다.
산세바스티안의 구시가지를 걷다 고풍스러운 바르의 묵직한 문을 끼익 열고 들어가면, 우와, 절로 탄성이 나온다. 기다란 카운터에 반짝이는 쟁반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고 쟁반 위에는 다양한 핀초가 가득하다. 눈이 위아래로, 왼쪽 오른쪽으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어쩌면 이렇게 맛있게도, 그리고 예쁘게도 생겼을까? 굳이 요청한다면 메뉴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눈으로 감상하다 마음에 든 핀초에 곧장 손을 뻗는 것이 보통이다.
바게트와 흡사한 빤(pan)이라는 빵을 얇게 썰어 받침을 만든 다음 꼬치를 꽂고 그 위에 다양한 치즈와 탱글거리는 새우살, 얇게 저민 하몽과 올리브, 아삭거리는 양파와 짜지 않은 안초비, 새큼하게 초절임한 피망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층층이 꽂아 쌓은 것이 가장 일반적인 스타일의 핀초다. '가장 일반적'이라고는 하지만 요리사의 상상력에 따라 무한한 변주가 가능한데, 치즈만 해도 그 종류가 얼마나 방대한가. 올리브 절임 역시 산지에 따라, 그리고 열매의 숙성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 풍미가 달라진다.
오늘은 어떤 조합으로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까, 재능 있는 요리사라면 더없이 신이 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정교한 조리법은 아닌 것이, 프랑스 요리가 다양한 재료를 곱하고 나누어 맛을 창조하는 느낌이라면 바스크 지방의 음식, 특히 핀초는 재료를 더하고 빼면서 조화로움을 찾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맛의 돌직구다. 가식 없는 맛이 겉으로는 터프해 보이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푸근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바스크 사람들을 똑 닮았다. 바르의 카운터를 가득 채운 현란한 핀초들을 가만히 보다 보면 재료만 보고도 그 맛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입에 덥석 넣기 좋은 음식이다. 특히 마요네즈를 듬뿍 얹은 것이 많은데,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유래한 소스라는 것을 생각하면 본고장의 맛을 보는 셈이다. 한 개 더 먹을 이유가 충분하다.
핀초의 사소한 재미 중 하나는 계산 방법인데, 카운터에 가득한 핀초를 하나, 둘 집어 먹다 보면 자연히 앞 접시 위에 빈 꼬치가 쌓이게 된다. 웨이터는 꼬치의 개수를 센 다음 분필로 카운터에 쓱쓱 계산서를 써 준다. 계산이 완료되면 앞치마 자락으로 다시 슥슥 지우는데, 포장마차 어묵 꼬치 계산 방법과 닮은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잠깐, 핀초는 물론 든든하고 저렴하고 맛도 좋은 훌륭한 식사 대용품이지만 그 본질은 엄연한 술안주다. 역시 좋은 술과 함께할 때 맛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다.
글 | 신예희
사진 | 신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