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저우│중국│이경택
그림자 마을에 술이 익으면
구이저우 | 중국 | 이경택
맑은 날이 얼마 없다는 산골에 전기마저 귀한 마을. 저녁이 되면 집을 나서기도 버거웠다. 이런 어둠 속에 길을 어떻게 찾아 지나는지 손전등이 없었다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논두렁을 지나 힘들게 조프니의 집을 찾아 도착하니 아뿔싸, 그녀는 내가 머무는 이장의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 분명 다른 손전등 불빛은 없었는데...
다시 돌아가니 마당 앞에 자수가 그려진 검정색 중국풍 옷에 예쁘게 머리를 말아 올린 한 여성이 와있었다. 조프니다. 그녀는 이곳 묘족의 27세 여성으로 나의 첫 번째 묘족 친구.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으며 원래 가려했던 그녀의 집으로 다시 향한다. 그녀의 가족들이 식사를 앞두고 있기에 발걸음이 제법 빨라졌는데, 이 어두운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논두렁을 질주하는 그녀에 반해, 넘어지지 않으려 뒤뚱거리는 내 모습을 보니 이제야 머나먼 곳에서 이 오지의 산골마을을 찾아 온 내 외지인 정체가 분명해진다.
"지난번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 모두 좋아해요. 남편은 술까지 담가 놨는데. 이렇게 다시 오셔서 정말 기뻐요." 조프니의 집에는 단 두 개의 전구가 밤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는 부엌에서 간신히 얼굴의 윤곽선 정도만 구분할 수 있는 밝기로, 나머지는 거실로 예상되는 커다란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사소한 불빛 사이로 지난해 만들어 줬던 그녀의 가족사진 액자가 어렴풋이 모습을 보였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지만, 야채 국이랑 고기 국을 끓였는데." 그녀가 수줍게 밥상을 낸다. 아쉽게 그녀의 남편은 다음날 마을 축제를 앞두고 곯아떨어져있었다. 남은 가족과 작은 전구 아래서 소수민족 묘족의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밤이다.
중국은 놀랍고 끝이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찬 나라다. 대책 없이 커지는 그들 산업문명의 여파로 옆 나라라는 것이 가끔 피곤할 때도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이런 다채로운 특색으로 가득 찬 나라가 멀지 않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나라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모습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구이저우(귀주성)는 중국의 남쪽으로, 서부의 신장위구르나 티베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 중 몇 군데는 시간을 벗어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묘족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수세기 동안 동일한 모습으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곳의 매력에 이끌려 내가 세 번째 이 마을에 찾았을 때. 마을은 한창 축제 준비에 분주했다.
"13년 만에 돌아오는 축제에요. 13년 마다 3년축제를 이어 갑니다. 그러니까 작년, 올해, 그리고 내년까지 이 시기에 용신을 받들고, 13년 후에 다시 3년 축제를 하는 거죠." 작은 마을 '랑덕묘채'에서 하는 축제라 규모가 크지 않아 기대치 말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작은 마을의 행사라도 그네들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기회라 기대가 남달랐다.
"올해는 중간해로 일주일간 진행하는데, 내일은 춤을 추고 산에 올라가는 날이랍니다. 엊그제는 소싸움이 있었던 날인데 못 봐서 아쉬우시겠어요." 소싸움도 보기 흥미로웠겠지만 사실 내 관심은 군무와 '용신제'라고 말하는 산에서 지내는 제사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을사람들이 아름답게 옷을 차려 입고 장신구로 치장하며 마을 춤사위 준비를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 화려해, 중국 내 가장 고운 복장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에서 담근 독한 술독이 올라오면 여인들이 계단에 줄을 서서 한 모금씩 방문객에게 선사하며 이 작은 마을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게 빨갛게 취기가 오르면 어느새 마을 광장은 춤사위 소리로 가득 찬다. 금속 장식구가 맞닿아 찰랑 찰랑 소리를 내며 작은 체구의 여성들이 우아한 몸짓으로 시작하는 춤사위. 이어지는 노래로 흥을 돋으며 작은 산골 마을에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남성들은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관악기를 쥔 채 행렬에 맞춰 연주를 시작한다. 마을 광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를 중심으로 뱅글 뱅글 도는 형식이었다. 곧이어 구경하던 마을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원형 군무를 이룬다. 마지막 행렬이 꼬리를 물며 그렇게 빙글 빙글 마을 사람들이 하나 되면 이 거대한 춤의 무리는 정점에 이른다.
군무를 마무리한 마을 사람들은 장신구를 내려둔 채 마을 뒷산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하늘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날, 어느 문화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다가올 추수철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 익숙하고 든든한 공동체 의식이다. 과거에는 이 공동체 의식이야 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산으로 올라 하늘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우리를 잊지 말고 풍요를 달라고.
묘족 마을 중에 유독 랑덕묘채가 내 발길을 잡곤 했다. 조프니와 친구들이 살고 있는 촌이기도 하고, 크지 않은 규모의 정겨운 마을이기도 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여행자를 위해 공연하고 수익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그리 쓸모 있어 보이진 않지만 온갖 수공예품을 들고 다가와 팔기도 한다. 조프니는 그 시작점에 서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 산에는 오르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오니 또 반가운 소녀가 손짓을 한다. 여고생인 천징화는 주중에는 근교 도시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주말에만 마을로 돌아오는 학생. 이 마을에 대부분 아이들이 학업을 위해 평소에는 밖에 나가 있다. 지난 번 운 좋게 주말에 공연을 본 덕에 그녀의 사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한참을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다 한국에서 가져온 화장품에 비명을 지르며 환호를 한다. 아이들이 나눠 갖는 도중에 해맑은 실랑이를 했다. 나는 말리는 척을 하면서도, 속으로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다.
스무 살이 되면 혼기가 꽉 차는 오래된 세기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었다. 이렇게 풋풋한 10대의 소녀에서 불과 몇 년이면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어 버리는. 왠지 조금은 슬프고 안쓰러웠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다 가늠할 수 없는 자신들의 방식과 자신들의 질서가 있으리라.
지난 저녁 조프니는 아들이 장성해도 묘족으로 살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대의 변화와 문명의 속도가 아마도 곧 이곳의 삶을 변화시키겠지만 묘족의 삶과 묘족의 정체를 오래오래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반면, 천징화는 졸업을 하면 도시로 나가 대학생활을 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직장을 잡고, 빠른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길 바랐다. 불과 10살 차이가 나지 않는 그녀들이었지만 미래와 삶의 방식에 대한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저녁이 익어, 커다란 가마솥이 등장하며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논벌레와 쌀로 죽을 써서 술과 함께 먹는 행사. 단순한 요기가 아니라 축제의 중요한 부분이라 한다. 그렇게 마을 광장은 또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마을 축제의 후원금을 낸 사람들을 호명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한동안 여러 이름이 지나가고, 옆 동네가 아닌 한국에서 온 내 이름이 호명되자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 머나먼 산골마을의 축제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말린 돼지고기가 있는데 가방에 가득 넣어 드릴까요?"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광장은 웃음으로 가득 찬다.
나는 말린 고기 대신 잘 익은 술을 두어 병 얻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 달진 않지만 그 향만큼은 십 리를 갈 것 같다. 코 끝에 길고 아련하게 술 익은 향기가 맴돌았다.
글│이경택
사진│이경택
artravel vol.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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