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25
어린 시절 책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거대한 모아이 석상들. 그리고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섬, 이스터 아일랜드를 말이죠. 하지만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그곳을 가볼 수 있을 거라 꿈조차도 사치였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서태지가 <Moai>라는 노래를 들고 나왔습니다. 참 좋은 노래였죠. 뮤직비디오 속에 비춰진 푸르고 아름다운 섬, 그리고 모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꿈을 가져보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쯤 그곳에 가고 싶다고. 사진가로 삶을 시작하며 그 꿈은 조금씩 더 커져만 갔습니다. 저만의 사진으로 모아이를 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제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기나긴 남미로의 사진 작업을 계획했을 때, 이스터 아일랜드가 포함되어야 했던 것은 그래서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마침 남미 여정의 시작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였습니다. 산티아고는 이스터 아일랜드로 통하는 관문이죠. 제가 떠나기로 한 시기는 5월초. 사실은 비수기로 분류되는 때였습니다. 이스터 아일랜드는 12월 정도부터 유명한 축제가 열리는 3월까지 성수기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5월에 방문하니 사람이 너무 없어 섬이 텅 빈 것 아닌가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의 기우였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죠. 산티아고 공항에서 이스터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제가 남미로 타고 온 비행기들 보다 훨씬 큰 드림라이너였으니까요. 그 거대한 비행기는 관광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 찼습니다. 아, 내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스터 아일랜드를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하고 반성했습니다. 그나마 비수기라 이런 비행기가 하루에 한 대 뜨지 성수기에는 여러 대가 뜬다고 합니다. 저를 포함 여행자들을 한 가득 태운 거대한 비행기는 드디어 이스터 섬을 향해 약 5시간의 비행을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비행기의 크기, 넘쳐나는 관광객의 숫자와 달리 이스터 아일랜드의 공항은 아주 작고 조촐했습니다. 공항이라기보다는 버스 터미널에 가까운 크기였죠.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들은 각자 마중 나온 숙소의 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저는 이스터 아일랜드의 현지인 꼬리나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민박집을 예약했는데요, 할머님은 직접 나와서 저의 목에 꽃을 걸며 환영해주셨습니다. 공항에서 할머님의 숙소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공항이 위치한 마을, 이스터 아일랜드 유일의 마을인 항가 로아(Hanga Roa)가 그만큼 작은 마을이었던 거죠. 지도를 펼쳐 우리의 위치와 어디에 가면 뭐가 있는지 천천히 알려주신 할머니의 도움으로 한걸음에 저는 마을 중심가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투어를 찾아서 섬을 둘러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투어를 제공하는 곳들을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옵션이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모아이들을 이른 아침과 밤에 보고 싶었던 저와 주로 낮에만 방문하는 투어들은 잘 맞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생각한 게 오토바이를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섬이 크지 않기에 오토바이를 통하면 쉽게 돌아다니며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미쳐 국제 면허증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한국 면허증으로는 오토바이를 빌려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좌절하려는 찰라, 일반적인 차는 빌려줄 수 있다는 조삼모사 같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자동차 렌탈은 너무 비싸기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세계 60개국을 넘게 여행하면서 저는 한번도 차를 직접 운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중교통보다 렌트비가 싼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여기도 대부분의 자동차 렌탈은 최소 15만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차고 구석에 다 망가져가는, 문도 잠기지 않고 창문도 닫기지 않는 차를 7만원 정도에 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문득 이것도 신의 뜻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아이들을 제대로 보려면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싼 자동차까지 나타났으니 타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런 마음으로 허름한 자동차 한 대를 렌트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저는 이스터 아일랜드를 탐험하러 떠났습니다.
이스터 아일랜드는 무척이나 작은 섬입니다. 차를 타고 섬을 탐험하며 더더욱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도로는 하나뿐입니다. 차로는 2두세 시간이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죠. 시원한 바다와 아름다운 노란색 꽃들, 여기저기 솟아오른 작은 오름들. 이 풍경을 보면서 저는 이스터 아일랜드가 제주도와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안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며 가끔은 제주도의 바다 근처를 운전하던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말이죠. 하긴 생각해보면 돌하르방도 모아이들과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각자의 섬이 가진 역사와 매력은 다르지만, 참 신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섬이라는 이곳에서, 제주도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이스터 아일랜드 최고의 일몰 명소, 바로 아후 타하이(Ahu Tahai) 입니다. 다섯 개의 모아이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은 물론 근처에 다른 모아이도 두 개가 더 있습니다. 무엇보다 항가 로아 마을과 가까이에 있기에 더더욱 많이들 찾는 장소입니다. 매일 저녁마다 저는 이곳을 찾아 해가 지는 풍경과 노을이 만들어내는 빛, 그 빛이 모아이들과 이루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조화를 사진으로 담고는 했습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은, 매일 새롭게 느껴지던 풍경이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일몰 시간에 맞춰 이곳을 찾았지만 모아이들이 가진 웅장함 때문인지 무척이나 엄숙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는 했습니다. 수평선 뒤로 넘어가는 태양 앞으로 가만히 서 있는 모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경외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아후 타하이가 일몰의 명소라면 일출의 명소는 따로 있습니다. 사실 일출뿐 아니라 이스터 아일랜드에 있는 모아이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웅장한 녀석들이 모여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 15개의 거대한 모아이들이 줄지어 늘어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이미 아후 타하이를 본 사람이라도 압도될 수 밖에 없는 풍경입니다. 주변 풍경이 특히나 더 거칠고 드라마틱해 이 모아이들에게 더 영적인 힘을 부여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기에 해가 뜰 때도 좋지만 실은 언제 찾아도 좋은 장소이기도 하죠. 저는 일출 때는 물론 낮에도 오후에도 여러번 이곳을 찾았습니다. 물론 이곳은 항가 로아 마을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차가 없으면 여러번 들리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분명 한번 이상 들릴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후 통가리키와 밤하늘의 별이 가득한 풍경을 담으려고 차를 타고 늦은 밤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국립공원인 관계로 밤에는 문을 닫고 입장을 불허한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안타까워 어찌하나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했습니다. 차를 타고 근처를 돌며 조금 먼 거리에서 모아이들과 밤하늘을 담았습니다. 가까이 가지 못해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 그래도 별들과 모아이를 함께 담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때가 보름달이라 별이 풍성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오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생애 단 한번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곳이지만 또 모르죠. 두 번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보름달이라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지기 일보직전의 보름달과 조금씩 밝아지는 일출의 색을 담은 사진은 제 모아이들 사진들 중에서도 특히나 좋아하는 한 장이 되었습니다.
라노 라카쿠(Rano Rakaku)는 아후 통가리키나 아후 타하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장소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진정한 모아이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던 장소였습니다. 완벽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는 통가리키, 타하이 등의 모아이들과 달리 라노 라카쿠의 모아이들은 높은 언덕 여기저기 제각각 자세와 포즈로 말그대로 널부러져 있습니다. 어떤 녀석은 누워 있고 어떤 녀석은 몸의 일부가 없습니다. 만들다 만 것 같은 녀석들, 망가진 녀석들까지 다양합니다. 그래서 이 곳은 모아이들의 병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매력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아이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경험은 정말 특별합니다.
라노 라카쿠는 국립공원 입장권으로는 단 한 번 밖에 방문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방문하고 싶으면 80불짜리 국립공원 입장권을 또 사야합니다. 그러니 날씨 좋을 때 준비 잘해서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의 위치가 아후 통가리키와 가까운 관계로 대부분 통가리키의 일출을 본 후에 오전 중에 방문을 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오후의 방문을 추천합니다. 그때 더 많은 햇살이 모아이들을 비추어 더 멋진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이스터 아일랜드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모아이를 보기 위해서 오지만, 이 작은 섬이 가진 매력은 모아이가 끝이 아닙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항가로아 마을에서 4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휴화산, 라노 카우(Rano Kau)입니다. 택시로는 10분이면 도착하지만, 이건 너무 쉽고요. 하이킹으로 1시간반 정도 걸어 정상에 도착하는 여정이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돈을 아끼기 위해 걸어갔는데 조금 힘들긴 했지만 정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을 그만큼 더 기억에 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화산이 멈춘 자리에 자연이 색을 칠해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화산이 바로 바다 옆에 있다는 것도 매력이고요. 화산 바로 옆에는 오롱고라는 이름의 과거 부족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모아이를 볼 만큼 봤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싶다고 해도 아직 한가지, 이곳에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터 아일랜드의 전통 춤입니다. 폴리네시아 제도의 섬들에서 대부분 부족들이 그렇듯 이곳의 부족들 또한 춤을 사랑했고 오랜 세월 전통으로써 지켜 내려왔습니다. 항가 로아 마을의 몇몇 장소들에서는 이 전통을 이어나가는 젊은 춤꾼들의 멋진 연주와 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흥겹고 화려한 춤의 즐거움은 물론이고, 춤을 감상함으로써 이 작은 마을의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갈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으니, 이스터 아일랜드에서의 여정을 마치는데 이보다 더 완벽한 피날레는 없을 것입니다.
처음 산티아고에서 이스터 아일랜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서태지의 <Moai>를 들었습니다. 처음 모아이들의 앞에 섰을 때, 직접 저의 두 눈으로 모아이들을 봤을 때, 다시 한번 <Moai>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터 아일랜드를 떠나며 또 한번 그의 노래, <Moai>를 듣습니다. 언젠가 모아이들을 만나면 이 노래를 그 앞에서 꼭 듣고 부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것도 꿈이라면 꿈이니까요.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일 하나를 끝냈습니다. 이 낯선 길 위로 조각난 풍경들을 저의 사진으로 담고, 모아이들에게 저의 욕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노래 선율을 작별의 인사로 삼아 떠납니다.
'내 가슴 속에 남은 건 이 낯선 시간들. 내 눈에 눈물도 이 바다 속으로...'
글│케이채
사진│케이채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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