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런던에서 혼잣말 내뱉어 보기
십 년이 지나면 강산이 바뀐다는 말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2005년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끝날 줄 모르는 하얀 구불거림과, 사람 눈을 어둡게 하는 노란 불빛이 코엑스몰을 뒤덮기 전이었다. 식당가 바닥 아래에는 인공 시냇몰이 졸졸 흐르고 있었고, 지금은 과거에 스러진 오래된 영화관에서 나는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장편영화를 처음 조우했다. 거대토끼의 저주(The Curse of the Were-Rabbit)라는 부제를 달고, 천재 발명가지만 어딘가 조금 모자른 Wallace와 그의 충견 Gromit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대사보다 음악에, 감정선보다 연출에 집중하던 감상 습성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흐르기 일보 직전인 오늘, 참으로 오랜만에 Wallace & Gromit 시리즈의 새 영화가 공개되었다. 모처럼 영화관에서 낯선 사람들과 아무런 갈등 없이 하하호호 웃으며 전체관람가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가운 얼굴들도 여럿 등장했으며 영국이라는 나라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금새 눈치채고 박장대소를 불러일으킬 장면도 많았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경적과 안개와 관광객이 들끓는 피카딜리의 길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갓 최면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멍했다. 한겨울 낮의 꿈에서 깨어났다기보다 되려 그 어렸던 내 꿈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제목인 Vengeance Most Fowl이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될지, 영화 속 영국식 유머들이 어떻게 지구 반대편 관객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할지 우려되는 한편 중대한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전 Wallace & Gromit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Netflix라는 단어가 오프닝에 등장했다. 이제 BBC 뿐만 아니라 넷플릭스가 아드만 애니메이션과의 협력 끝에 비(非)영연방 국가의 배포를 담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지구촌 사람 거의 모두가 넷플릭스를 들어봤을 테지. 없던 것이 있던 것과 손잡고 힘을 키우는 시대,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옆좌석에 자리한 내 가방 안에는 Hatchard에서 갓 산 'A Christmas Carol'이 들어 있었다. 더 저렴한 각종 판본이 많았지만 발품을 판 끝에 Quentin Blake 일러스트레이션 판본을 구매했다. 앨리스가 말했듯 어른들은 그림 없는 책을 무슨 재미로 읽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내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처음 선사한 한국어 번역본이 이 판본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거의 모든 책을 두고 왔고 번역본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분명 5년도 더 이전이었을 테지만 삽화만은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었으며 과연 기억 그대로였다. 오디오북과 함께 1장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희뿌연 것이 점차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릴 적 소망이 걸어나온 게 아니라 내가 소망을 현실로 만든 후 그것을 화폭 삼아 뜬구름이었던 꿈 속으로 걸어들어갔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국적, 나이, 인종, 직업과 무관하게 내게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왜 하필 영국인가? 왜 소설인가? 왜 영화인가? 이는 상대방을 표상으로 정의내리려는 인간의 오랜 습성일 게다. 말로 진부하게 설명하는 데 질릴 대로 질린 나는 다소 게으른 내 천성을 존중하여 이제 말보다 글로, 표정보다 그림으로, 반응보다 음악으로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지 힌트를 주려 한다. 이는 27년 만에 생애 최초로 어떠한 학업 부담과 무엇무엇 '마감일'이 없는 진정한 휴가를 맞이한 데서 오는 영혼의 부르짖음일 테지만 그 뒷편에 나만의 작은 크리스마스 전통이 자리한다.
친구 한 명 없는 외톨이 외동은 자랄수록 자신의 능력을 선보일 때 외에는 말을 할 기회를 그다지 누리지 못한다. 그러니 유럽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 장르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Mio Mao', 'Plonsters' 속 주인공들은 말을 한다기보다 서로 옹알거린다. 패트와 매트는 아예 말을 내뱉지 않는다. Wallace & Gromit 속 Gromit도 대사 없이 행동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Feathers McGraw의 카리스마도 움직임, 연출, 음악으로 유도된다. 그리하여 나의 크리스마스는 감각 기관에 메아리치는 사유와 그에 따른 내면의 혼잣말이 화려한 장식, 왁자지껄한 파티, 오고 가는 선물들을 대체하였다.
대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장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공포. 이 또한 연출과 음악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고 공포영화들을 다섯 편 정도 봤다고 얘기하니 사람들이 참으로 당혹스러워하더이다. 그들은 자기 동굴에 나를 어떤 모습으로 새겼을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공포/스릴러. 이 둘은 언뜻 보면 너무나도 상극인가 보다. 어찌됐든 두 범주 모두 내 크리스마스를 수놓는 일꾼들이다. 그들은 과연 모 아니면 도일 뿐인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앉은자리에서 세 번 반복해서 읽은 후 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뜬구름 잡기였으나 이제 알겠는 것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 저런 집이 semi-detached house겠구나. 저 캐릭터들이 Yorkshire 주에 살았던 게로구나. 어라, Camden Town이 등장하네, 번역본에도 있었던가? 나는 세 크리스마스 유령을 맞이한 스크루지 꼴이었다. 도합 4층짜리 집에 홀로 앉아 창밖에서 간혹 들리는 비행기 소리에 끼익거리는 층계참을 문 바깥에 두고 과거의 간절했던 바람을 되뇌이며, 현재에 머무르며,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란.
한평생 런던을 집으로 여겼고, 놀랍게도 이제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 본 영화에서는 현대 기술을 비꼬는 동시에 악용당하는 동시에 활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기술이 내 밥벌이를 주도하고 있고, 내가 열정을 지닌 것들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유령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황무지가 된 런던에 초라하게 묻혀 있는 뼈들을 보여 줄까, 아니면 새 미디어와 기술을 응용한 신(新) 장르의 도약을 보여 줄까?
문화·예술, 목표, 소망⋯⋯. 이들은 각 객체를 빚는다. 그리하여 탄생하고 자라나는 객체들은 도로 기여하여 또 다른 사회에 이바지할 터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오늘에야 상반된 듯한 밝은 멜로디의 음악과 음산한 문장 들이 다시금 암송해 준 시대 불변의 법칙이다. 나라는 꼬맹이는 앞으로 나를 무엇으로 대표할 것인가? 왜 소설인지, 왜 영화인지 궁금하다고? 그것들은 이 입 틀어막기 좋아하는 사회에서 비로소 서로가 서로의 의견에 경청할 기회를 제공하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공포, 이들은 관객이 지니던 언어 등의 습성을 공평하게 무력화시키기에 크리스마스에 최고의 조합이다. 불이 환하게 켜진 번화가의 대로보다 기찻길 뒷편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에 반성과 번영의 씨앗이 흩뿌려져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