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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비비 Feb 27. 2021

제주에서의 사색

1편: 고행(2021년 2월 22일)

세계 어디에서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신대륙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것도 이들의 짓이었으며,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며 신문물을 실어나른 장본인도 이 사람들이었다.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돌이켜 보면, 인간이 살기에 어느 정도 적합한 요건을 갖추게 된 나라들은 모두 이들이 거쳐 갔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다만,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역사에는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가 더 상세히, 정성껏 기록되기에, 떠돌이들은 손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돌이들을 내심 부러워한다. 그들만큼 동물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들도 없기 때문이다. 비옥한 땅에 터를 잡아도 인류는 늘 마을 울타리 밖으로 눈을 돌렸다. 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수평선 너머로, 수평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섬 너머로. 그로 인해 발달한 행위가 여행이었으며, 여행 산업은 현대에 이르러 발전한 수많은 사업 중 제일 크고 돈이 많이 오가는 사업이었다.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뒤엎기 전까지.


지금만큼 움직임의 행위가 배척당하고 비난받는 세상은 없었다. 중국에서 뚱딴지처럼 등장한 정체모를 바이러스는 인간의 시선보다 항상 빨랐다. 이제 인간보다 바이러스가 더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어느덧 까마득해진 여행의 관습, 아직도 그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생명의 위협마저 불사르는 나방 같은 날갯짓을 지닌 채, 그들은 오늘도 지도를 뒤적이고 부지런히 온라인 채팅방에서 손가락을 놀린다.


그리고 평화롭지 않았던 어느 날 오후, 나는 내가 나방들의 대열에 합류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모든 것은 건강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했다. 거리두기 원칙을 철저히 지킨 모범시민 엄마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 나 또한 전면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6개월 동안 한 자릿수 평대의 작은 방 안에서만 지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졌음은 물론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근육도 옛날같지 않았다. 이 모든 요인들로 인해 우리 둘이서 10평대 초반 아파트 안에서 얼마나 전쟁터 같은 나날을 보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를 세로로 가로지르고 작은 해협을 건너, 저 멀리 있는 제주도에서도, 내가 완벽하다고 여겼던 마당 있는 집들에서도 건강 문제는 피해가지 않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있든 없든 항상 불완전했던 게 생명체의 건강이라, 결국 나와 엄마는 온갖 방호용품으로 중무장을 한 채 '여행 아닌' 여행을 떠나야 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러 가는 길이었지만 바다 바로 옆에서 3박 4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만석이었던 제주행 비행기도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곧게 비행했다. 몸은 20대의 신체이지만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을 지닌 채, 나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보다 바다 건너를 볼 줄 아는 한 마리의 독수리를 꿈꾸며 제주도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첫째 날의 키워드, '고행'이 시작된다.

자, 제주국제공항에 지칠 대로 지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한 사람과, 그보다 덜 지쳤지만 제주의 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시피 한 한 사람이 내렸다. 전자는 약 2년만의 방문, 후자는 9년만의 제주도 방문이다.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은 오랜 기간 동안 집 밖 땅, 적어도 자신들이 기거하는 동네 밖 땅을 밟아 본 적도 없고 대중교통이나 승용차 또한 탑승한 적이 없음을 명심하시라. 이 둘이 공항으로부터 몇 시간 정도 떨어진 친척의 집에 방문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헤매임과 헐떡거림, 두리번거림과 전화 통화가 오갔는지 모른다.


이것이 첫 번째 고행이었다. 낯선 환경에 스스로를 던져 넣은 결과이자, 어찌됐든 새로운 문명이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한다는 신호였다. 환경이 온몸으로 반겨 주지 않으면 환영의 팡파레 따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익숙함의 연속이라는 암울한 상황이므로.

세 발 달린 야자수를 지나 도착한 외할머니 댁에서 나는 두 번째 고난을 맞닥뜨렸다. 바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좌식 생활'이었다.

방바닥에 펼쳐진 개다리소반, 허리를 온통 수그려야 겨우 맛볼 수 있는 조촐한 음식들, 매트리스 없는 잠자리. 이는 감사할 줄 모르고 자란 현대인 특유의 시선이다. 또한 어느덧 사라져 가는 (그렇다고 해서 연민을 품어 줄 정도로 건강에 좋지만은 않은) 전통 생활방식에 대한 예의없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 이해한다. 나는 그 속에서 한없이 밀려오는 이질감에 휘둘리며 묵묵히 수저를 놀려야 했다. 마음 속 해일이 거센 천둥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매서운 물결을 잠재운 듯한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그토록 즐겨 봤던 드라마와 영화를 몰아서 봐도, 또는 충동구매를 일삼아도 해결하지 못했던 마음의 병이 단 몇 시간 만에 해결되었다. 명의는 멀리 있었다. 이제는 가까이에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와 엄마는 다른 친척의 차에 몸을 싣고 해안도로를 구경했다. 요리조리 굽이치는 1차선 도로와 반짝이는 반사판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어둠, 또 어둠......


몇 번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교통수단에 있을 때면 꼭 이어폰을 꽂아야 멀미가 나지 않는데도 이어폰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급커브를 돌 때도 몸이 쏠리지 않도록 척추뼈에 힘을 줘야 했다. 그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 무서웠던 것이다.

누구는 밤바다에서 낭만을 보고, 누구는 밤바다에서 운율을 느낀다는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공허 뿐이었다. 저것이 물인지, 텅 빈 거대한 통의 입구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바다(라고 불리우는 것). 이토록 어둠을 두려워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둠을 친구처럼 여겼던 나는, 낮보다 밤을 훨씬 좋아했던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밤은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등이 비치되어 있고, 눈만 돌리면 아파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있고, 불 꺼진 가게 위에 홀로 빛나는 간판이 무조건 비치되어 있었던 밤이라는 것을.


이것이 진실한 밤이었다. 아직 불을 발명하지 못했던 때의 호모 에렉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느 날 사냥터에서 돌아오다가 처음 불을 피웠을 때에, 한밤의 드라이브에서 돌아온 내가 마을의 불빛을 봤을 때처럼 안도했을까?

자동차가 다시 주차장에 주차되었을 때, 나는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 번째 고행은 '밤바다'였다.


'시간의 주름'의 세 마녀처럼 내 곁에 찾아온 세 가지 고난들. 제주도에 발을 내딛은 첫째 날,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시간을 보았고, 사색의 힘을 배웠다. 빌딩숲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시시각각으로 느꼈고,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에 탈 비행기의 이륙을 느꼈다. 이는 어릴 때부터 지속된 내 습관이다. 다만 이번 (여행 아닌) 여행이 다른 점은 치유의 성격을 띰과 동시에 내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신경써야 하는지 친절히 일깨워 주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여행의 끝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세 발 달린 야자나무를 기억하며,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 일렁이다가 철썩철썩 몸부림치는 파도를 기억하며 첫째 날을 보냈고 둘째 날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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