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어둠 속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일종의 공연(?) 같은 프로그램인데 세계에서 상시 열린다고 했다. 공연 치고는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이어서 고민했지만, 궁금한 마음이 더 커 결국 거금을 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진행자는 관람객들을 모아 줄을 세웠다. 검은 커튼 속으로 줄을 맞춰 들어가자 조금 후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가 펼쳐졌다. 희미한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곳이었다. 참고로 참가자들은 모두 커플이었다. 나. 만. 빼. 고. (이런 공연을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다니 조금 안타까웠다)
프로그램의 구성은 나름대로 잘 짜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안내자를 만났고, 짧게 자기소개를 한 뒤 (어쩌면 긴) 여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의 소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물 흐르는 소리나 새소리 같은 평소에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곤 벽이나 도로의 턱 같은 각종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마트를 찾아가 장을 보거나 카페에서 음료를 마셨던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시간 반 가량의 여행을 마치고 관람객들을 안내했던 남자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20대 초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다. 프로그램 특성상 그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기에 목소리로 추측했을 뿐이다.
저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어릴 적 사고를 크게 당했는데, 그때부터 앞을 보지 못해요.
이 공연은 시각장애인들이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금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더 와 닿았다. 그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인 사람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 불의의 사고로 신체 기능을 잃는다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남자의 말에 관람객들은 "앞이 안 보이면 불편하지 않나요?" "항상 보호자가 같이 다녀야 하나요?" 같은 질문을 했고, 나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날 갑자기 앞이 안 보이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죠?"
안내자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잠시 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었다. "앞이 안 보이는 것은 정말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니 살만해졌다"고 말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남의 시선을 견뎌내는 것이었다고.
그 말이 맞다. 자신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남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느낄 때, 얼마나 큰 위압감을 느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저 불편하고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것.
그 남자는 덧붙여 말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어쩌면 당연한 말이긴 하나 왠지 더 공감됐다.
나도 어릴 적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단순한 감기에 걸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날벼락을 맞았다. 한참 후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다른 한쪽 귀는 기능을 120% 발휘하도록 진화(?)되었다"고 했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들리지 않는 한쪽 귀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릴 적 친구들이 들리지 않는 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랐고, 후에는 항상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면서 누구도 나에게 말 걸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떤 사고나 질병으로 앞이 안보이거나 신체의 일부를 잃는 일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 인생을 위험하다고만 생각할 건 아니지만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이미 그런 고통도 이겨내고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심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