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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Nov 06. 2021

너와 나의 연금술ㆍ최정화

최정화

모든 것이 예술 재료가 되는 시대이다. 버린 물건도 작품으로 탄생한다. 쓰레기는 후기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결과물이다.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물건이 미술관에서 새로운 미학적 텍스트가 된다. 산업화 사회 속 피해 갈 수 없는 쓰레기를 작가들은 예술의 개념으로 가져온다. 베개, 냄비, 빨래판, 타이어, 헌 고무신, 프라이팬 손잡이, 플라스틱 소쿠리. 이것들을 길에 내놓으면 초라해 보인다. 무시하고 지나치는 물건이 된다. 삶은 지나치는 잡다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그 물건들 위에서 고상하고 이상적인 일상을 찾는다. 최정화 작가에게 쓰레기란 무엇일까? 작가는 일상의 버려진 것들을 본다. ‘삶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조화를 만드는 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미의 조형 언어’라고 말한다. 최정화의 출발은 생활 쓰레기이다. 작은 것들이 치명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킨다. 구체적 일상의 힘 없이 형이상학적 담론이란 없다. 작은 일상은 살아 있다는 개별의 증거이다. 최정화는 기성품을 차용해 조형 요소로 이용한다. 기능을 상실한 사물이 쌓기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의미의 오브제로 탄생한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창조한다. 익숙함과 낯섦. 최정화는 그 사이에서 창조와 새로움이라는 맥락을 찾아간다.


최정화, <MMCA2018 최정화-꽃, 숲>전시회, 사진:예술사이


쌓는 반복


쌓기는 인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쌓은 돌탑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돌 쌓기는 산신에게 소원을 비는 샤머니즘적 풍습이었다. 몽골과 티베트에서도 소원을 비는 민간 신앙이었다. 불교의 영향으로 불탑을 건축했다. 성경 속 바벨탑에서 내세를 위해 쌓아 올린 피라미드까지 서양에서도 쌓기는 있었다. 쌓기는 건축 기술의 발달로 탑, 타워 형태로 발전했다. 근대화에는 타인을 감시하는 파놉티콘 건축 양식이 나타났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대도시 초고층 높은 건축구조가 나타났다. 자본을 가진 개인과 대기업들 사이의 욕망, 인간의 수직적 열망을 나타낸다.


최정화, <MMCA2018 최정화-꽃, 숲>전시회 일부, 사진:예술사이


최정화의 쌓기는 인류 역사가 아닌 재래시장에서 본 쌓인 물건들이 시작이었다. 최정화는 물건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다. 반복되는 물성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쌓인 물성은 자신의 물성 자체를 소멸하면서, 탑 안에서 새로운 즉자를 생성한다. 흄은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라고 했다. 반복적으로 쌓은 물건들은 수많은 덩어리가 되어, 미술관에서 자아의 것에서 타자의 것으로 태어난다. 관람자 입장에서 미술관 오브제는 절대적 타자였다. 최정화의 쌓기로 내가 썼던 물건이 작품 일부가 된 것을 보며 관람자는 주체가 된다. 타자에 대해 민감하고 고향으로 회귀 개념이 희박해진 현대사회에서 과거가 쌓인 탑을 본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내 물건과 너의 물건이 하나를 이룬다. 쌓기는 자아와 타자가 함께 연결되는 공간이다. 수직 공간으로 올라가지만, 수평적 공간이다.


최정화, 늙은 꽃, 중국에서 모은 나무 빨래판들, <MMCA2018최정화-꽃, 숲> 전시회 일부, 사진:예술사이


쌓기는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신던 고무신, 프라이팬 손잡이들은 시간의 흔적이다. 이것들을 쌓아 올린 탑은 물건을 사용하던 이들로부터 재해석하는 은유적 공간이 된다. ‘Blooming matrix’(2019, 도쿄)와 ‘잡화’(2019, 아트스페이스, 광교) 전시에서 낡은 베개들을 쌓아 올린 <꽃탑>(2018)과 중국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낡은 빨래판을 벽 전체에 규칙적으로 배열한 <늙은 꽃>을 선보였다. 낡은 것 모으기로 수많은 기억을 모았다. 기억은 전시실에서 물건으로부터 환기된다. 오브제가 되는 순간, 기억은 연장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마멸된 빨래판, 버려야 하는 물건. 소멸하여야 하는 시간이 아닌, ‘지속’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최정화는 쌓기로 대상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닌 완성된 제시(presentation)로 기억으로 가는 연결고리를 만든다.


최정화, 꽃의 향연, 2015 사용하던 부엌 그릇들과 상, 75.5x122x290cm, <MMCA2018최정화-꽃, 숲>전시회일부 사진:예술사이


최정화는 쌓기로 시간의 지속성을 탄생시킨다. <꽃의 향연>(2015)은 3대째 살고 있던 집 가구를 기증받아 구층 밥상 탑을 만들었다. 집 철거를 앞두고 부엌 정리에서 나온 밥그릇, 공기, 물 잔 등을 밥상 위에 올렸다. 손때가 묻어 있는 그릇을 쌓아 시간의 흐름을 만들었다. <꽃의 향연>은 과거 시간의 연속이다. 사람들과 함께 먹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부엌이라는 물질적 공간과 기억을 담았다. 시간이 쌓여 공간화되었다.


최정화, 카발라, 2013 plastic baskets, steel frame, variable installation,높이16m ⓒchoijeonghwa.com


공간 속 쌓기는 시각적 대상, 연속의 효과이다. 균일한 물건들이 동일한 수직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쌓았을 때, 적은 수의 물건보다 훨씬 장엄한 효과를 낸다. 양이 많을수록 시각적으로 숭고한 이미지를 준다. 5376개 플라스틱 소쿠리를 쌓아서 떠 있는 16미터 거대한 기둥 숲 <카발라 Kabbala>(2020, 대구미술관 어미홀)를 만들었다. 연이어 서 있는 소쿠리 기둥들은 계속되는 시각적 자극을 준다. 색채, 배열, 단순성, 반복적으로 쌓여 무한히 뻗어가는 연속적 효과를 낸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에서 거대한 바위가 바다 위에 떠 있듯, 일상 용품인 플라스틱을 켜켜이 붙여 허공에 매달았다. 시공을 넘어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집 마당에 흔하게 돌이 있듯,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씩은 있다.



최정화, 민들레, 부엌 냄비들 7000여 개, 2018년 국립현대미술 서울관, 사진:예술사이


기호 덩어리들


버려진 물건들은 기호의 효과이다. 최정화는 버려진 것들을 기표 과정으로 쌓기라는 결과를 만든다. 플라스틱 바구니는 더 이상 대중문화 소비재가 아닌 관객들에게 의미를 주는 생산적 텍스트가 된다. 소비재 텍스트와 고급 미술 텍스트라는 분할이 사라지는 경계이다.


예술과 비 예술 오브제 경계에서 최정화는 기호를 제시한다. 뒤샹처럼 실물을 그대로 제시하면서, 똑같은 물건을 모아 가공된 레디메이드를 완성한다. 같은 기호들의 집합 덩어리를 만드는 과정이다. 뒤샹이 기성품으로 사물과 예술의 양면성을 시작했다면, 최정화는 그 양면성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집에서 쓰던 냄비를 모아 9미터 <민들레>를 완성했다. 냄비들은 창작 작업과 일상생활의 연결고리라는 의미화 Signification의 집합체가 된다. <카발라>는 일상 영역에서 ‘차용한 것’을 예술 결과물인 ‘창조한 것’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차용과 창작은 상반되는 기의들을 함축한다. <카발라>는 빨간색, 초록색 플라스틱 소쿠리들이 서로 규칙적으로 어울리며 소쿠리 숲을 만들었다. 시각적인 기호의 장 semiotic field을 떠도는 물화된 기표들이다.



관객 참여


대중문화 소비 관점에서 대중은 상업성에 내맡겨진 재물로 수동적 소비자이다. 최정화 작품 속에서 수동적 소비자는 ‘참여 engagement’로 능동적 소비자가 된다. 창작 과정과 하나가 되는 상호 작용을 한다. 작가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모이자 모으자>를 해왔다. <살리고 살리고>(2011)는 시민 오천여 명과 함께 생활 쓰레기 20만여 개를 끈으로 연결해 완성한 작품이다. 시민 참여로 감상자와 창작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수동적 관람자를 능동적 창조가로 실현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관객 참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빛의 묵시록>(2019, ‘잡화’ 아트스페이스, 광교)은 시민들이 사용했던 스탠드 조명을 모았다. 사람들은 집에서 자율적 의사로 오브제가 될 물건을 가져온다.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작가에게 있다 하더라도, 버릴 물건을 가져오는 참여자가 각자의 내용으로 수많은 내러티브를 가진 오브제를 가져온다. 자신이 쓰던 물건으로 완성된 오브제를 보며 관객은 소통과 공감을 한다. 최정화 작품은 ‘작가의 개념’과 ‘작품의 오리지널리티 originality’를 모두 가진다.


최정화, 해피 투게더, 풍선 수 백개, 2009년 칠레 산티아고 ⓒchoijeonghwa.com


최정화는 ‘놀이성’을 열어놓는다. <코스모스 만다라>(2019, ‘잡화’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관객들은 앉아 있다. 아이들은 바닥에 있는 플라스틱 병뚜껑을 가지고 논다. 뚜껑을 연결하고 조합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만든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끈은 전시실을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수백 개 긴 풍선을 매단 <라이프 라이프>(2019, 롯폰기 아트 나이트, 도쿄)에서 아이들은 풍선을 터트리기도 하고, 원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잡화’ 전시에서 초록색 소쿠리 <알케미>는 도쿄에서 파란색 소쿠리로 전시했다. 사람 키보다 작은 소쿠리 탑 기둥을 흔들면 오뚝이처럼 움직이며 소쿠리 안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오뚝이가 떠오른다. <해피투게더>에서도 아이들은 소쿠리를 이리저리 발로 차고 뛰어다니며 논다. ‘작품을 만지지 마세요’가 아니다. 작품은 가지고 노는 놀이기구가 되었다. 초기 플럭서스 이벤트와 해프닝에서 관객 참여가 있었다. 대부분 작가가 정해 놓은 지시안에서 행동하는 것들이었다. 더 이상 구체적인 지시는 없다. 아이들은 뛰어논다. 관객은 눈, 귀, 손으로 감각을 경험한다. 작가는 말한다. ‘내 작품은 우주적 비빔밥(혹은 한정식 밥상)이다. 성속이 없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고 나면 작가 것이 아니고 관객 것이다. 나는 묵히고 익힌 물건이 나에게 말을 걸면 그때부터 작품을 시작한다.’ 작가의 말대로 작품을 끝내자마자 관객의 것이 되었다. 주체로서 예술가는 죽은 것이다. 예술을 창조하는 저자를 사라지게 하고, 작가 개념을 관객에게 맡기는 해체 작업이다. 이 해체 작업으로 최정화는 완성된 작품과 ‘거리두기’를 한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흔적을 지워가는 ‘공간 두기 spacing, espacement’[1]를 하고 있다



탈 분류


삶과 사회는 분류의 집합체이다. 모든 분류로 시스템화 된다. 최정화 작품은 분류화된 것을 벗어나 탈 분류를 꿈꾼다. 탈 장소화로 관객에게 유희를 준다. 예술작품의 변방 para에 있던 소쿠리, 고무바퀴, 등 파레르곤 parergon을 예술작품으로 가지고 온다. 이 작업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의 틀을 넘어선다. ‘잡화’ 전시는 수원 컨벤션 센터 주변 생태습지, 호수 공원까지 이어지는 야외 공간에서도 펼쳐졌다.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열렸던 <모으자 모이자>(2008년, 플라스틱 폐품, 잠실 종합운동장 설치)와 같은 작품도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대중이 함께 참여했다. 삶과 예술의 분류, 장소를 허문다. 사람들 머릿속 미술관이라고 하는 ‘틀’을 벗어난 장소를 선택했다. 전시실 공간과 일상생활의 공간, 그 경계를 넘어섰다.


최정화는 장소의 틀만이 아닌 소재의 탈주체화를 작업한다. 최정화가 선택한 물성들은 후기 소비 자본주의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라기보다, 일상에 필요한 대중의 기호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우리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계급 질서와 상징적 체계를 소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물건은 욕망을 사고파는 것이다. 후기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물건이 상징하는 기호를 소비한다. 소비한 물건은 개인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나, 최정화는 인간을 소비의 객체로 만드는 물건이 아닌, 주체로 사용한 것들을 모은다. 그것을 찾아 전국 재래시장, 고물상, 만물상을 돌아다닌다.


최정화, 청소하는 꽃, 2013, 대구 미술관 ⓒchoijeonghwa.com

나가며


최정화 작가는 쓰다 버린 사물들에 다른 이미지를 구연한다. 해체되어 떨어져 나온 물건을 모으고 쌓는다. 공간적 질서가 새롭게 창조된 배열이다. 쌓기는 관객과 작품이 함께 만들어 가는 사유의 공간이며, 능동적 관계를 맺는 작업이다. 단순한 레디 메이드의 범주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과 작품이 소통하는 장이 된다. 관객은 감상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로 창조에 참여하는 또 다른 주체가 된다. 예술가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된다. 버릴 냄비를 받아 예술작품으로 관객에게 돌려주었다. 작가는 냄비 탑 신화를 관객 각자가 만들어 내길 바란다고 한다. ‘당신의 마음이 나의 예술이다. 사람들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술은 다 없어질 것이다. 일상이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 일상을 이루고 있는 물건 쌓기로 예술과 삶의 간격을 좁힌다.


최정화가 쌓은 탑은 단순히 관조 대상이 아닌,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어떤 장소, 누구 삶 속에 있었던 것인가 상상하게 된다. 익숙한 물건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긴장감은 사라진다. 소반, 옛 부엌 그릇들, 고무신, 쓰던 빨래판들은 우리에게 따뜻한 노스탤지어를 선사한다. 물건은 우리에게 자신의 언어를 전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미적으로 인지할 뿐이다. 한 개가 아닌 수십 개가 쌓인 물건을 관조한다. 그것을 통해 기억을 회상한다.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환경에 의지하며 수많은 물건을 만든다. 물건은 각기 고유한 이름이 없다. 우리 주변에 버려진 산업화 물성들이 미적 가치를 줄 수 있는가? 즐거움을 줄 수 있는가?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술적 산물이라는 특수성은 포괄적으로 문화 현상 안에서 낳는 것이다.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낸 이 인위적인 자연은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미학적 대상이 되었다. 사라질 것, 수명을 다한 것을 반복적으로 쌓는다. 쌓인 것이 모여 풍경화가 된다. 오브제에 숨어 있는 개인의 일상. 최정화는 과거에 소통된 문화적 가치와 쓰임을 ‘버려진 것 쌓기’로 새로운 미학적 텍스트를 만든다. 삶, 문화를 들여다보는 원천이다. 쉬워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은유를 담고 있다. 기표는 기의로, 기의는 새로운 최정화식 기의를 만들어낸다.



참고문헌

[1] Peter Brunette and David Wills eds, “Introduction”, Deconstruction and the Visual Arts: Arts, Media, Architec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3


최정화의 코스모스 만다라

https://www.youtube.com/watch?v=uKMwnc1uM74&t=25s


Gravity Effect(그래비티 이펙트) 2021.02   Issue. 6: Euljiro호에 수록 (이미지 없이 글만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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