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연두 <백년 여행기> 가 열리고 있다. 전시실로 가는 지하 1층 공간 천장에는 열대 야자수 잎 조형물이 매달려 있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전시실 Ⓒ정유진
첫 번째 전시 공간은 검은 벽으로 둘러인 <백년 여행기-프롤로그>다. 한쪽 벽에 <백년 여행기>의 출발점이 된 제주도 백련초 사진이 있다. 정연두 작가는 제주도에 백련초의 씨앗이 200여 년 전 멕시코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멕시코와 한국 사이 백년 서사를 담기로 한다.
정연두, 세대 초상 Ⓒ정유진
두 번째 전시 공간은 마주 보는 대형 스크린<세대 초상>(2023)이 있다. 두 스크린의 주인공은 한국과 멕시코의 이주 한인 후손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영상으로 이민 1세부터 4세대까지 여러 한인을 보여준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전시실 Ⓒ정유진
세 번째 메인 전시실에는 정면에 대형 스크린과 그 아래 작은 모니터 세 대가 있다. 작은 세 개 모니터 안에서 차례로 진행되는 노래와 멕시코 풍경이 대형 스크린에 나온다. 왼쪽 모니터는 한복을 입은 소리꾼과 고수가 보인다. 가운데 모니터는 멕시코 전통 음악 '마이아치'를 부르는 멕시코 인들이다. 오른쪽 모니터는 일본 전통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앉아 일본의 '기다유'를 보여준다. 한 사람은 노래, 다른 사람은 목이 긴 세 줄짜리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 연주한다. 한국, 멕시코, 일본을 보여주는 세 모니터는 차례대로 돌아가며 멕시코 이주 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영상 속 이야기는 멕시코 한인 사회에 기록을 기반으로 한다. 배에서 태어난 최병덕의 이야기, 이민 2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할머니의 이야기, 황보영 시 '나의 길' 등이다. 정연두 작가는 2022~2023년 세 번에 걸쳐 멕시코를 방문하며 이민 후손을 취재하고 영상을 찍었다. 영상은 멕시코 도시의 현대 모습, 선인장밭에서 일하는 노동자, 이민 혼혈 후손이 한복을 입고 한국 무용을 하는 모습 등이다. 이러한 영상은 판소리, 마리야치, 기유다 노래에 맞춰 흘러나온다. <백년 여행기>(2023)의 첫 소절은 '순례자여(A pilgrim)'로 시작한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1904년 황성신문에 '멕시코는 문명 부강국,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 부자가 많고 난한 사람이 적다.' 배불리 먹고 멕시코는 경기가 좋다는 기사가 실렸다. 1905년 제물포항에서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로 가는 영국 선박 일포드 호에 몸을 실었다. 40일 후 도착한 낯선 땅의 날씨는 처음 느껴보는 더위였다.기차를 타고 어딘가에서 내린다. 벌판에서 자고, 다시 기차로 이동한다. 또 이동해서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건강한 남성과 아이, 여성은 25곳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 이야기가 판소리로 흘러나온다. 가르시아 할머니는 조선인 아버지와 마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양어머니와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결혼한 집에서 아기가 생기지 않자, 시어머니는 메히카노 여자를 아들에게 데려온다. 가르시아 할머니는 결국 구박받고 이혼해 집을 떠난다. 이후 6번의 이혼과 7번의 결혼, 마지막 결혼에서 딸 둘을 낳는다. 할머니는 어떻게 조선인들이 멕시코 농장에서 지내며 노예처럼 일했는가를 판소리로 들려준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영상을 보고 있으니,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방영근이 떠올랐다. 1904년 1차 한일 협약이 이루어지고 감골댁의 큰아들 방영근은 하와이로 떠난다. 방영근, 남용성, 주만상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한다. 일 년 반 뒤 주만상이 죽는다. 함께 지냈던 조선인들은 그날만큼은 일하지 않고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농장주에게 외친다. 그들은 주만상의 관을 만들고 장례식을 치른다. 『아리랑』1권의 마지막 부분, 마음이 무거웠던 그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아리랑』2권에서는 멕시코 유카탄주로 끌려간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하와이보다 더 싼 값으로 멕시코에 갔고 채찍질을 맞아가며 애니깽 선인장 잎을 잘라냈다고 나온다. 한인을 팔아넘긴 미국인 마야스와 일본인 다이쇼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아리랑』소설 속 그 인물들도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꾼 입을 통해서 살아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낯선 땅, 혹독히 일을 하던 하와이와 멕시코에 간 조선인 이야기를 말이다.
가르시아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판소리로 듣고 있으니, 20대 어느 날 엄마와 판소리 공연 갔던 날이 떠올랐다. 작은 소극장에서 우리는 입장할 때 하나씩 나눠 준 심청가 대본을 보며 심청가를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만나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에서 난 울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에 젖어 들어가게 만드는 처음 듣는 소리의 몰입감이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모든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펼쳐진다. 한 목소리에서 여러 역을 저렇게 실감 나게 노래할 수 있을까. 그날 영화관 음향보다 더 깊게 심장을 파고드는 그 소리에 취하고, 고수의 북소리와 추임새에 푹 빠졌다.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판소리와 멕시코의 국민 음악인 '마리아치'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 유산에 등재될 만큼 오랜 시간 민족의 애달픈 이야기를 풀어내는 노래다. 일본의 '기유다' 역시 서사를 전달하는 노래다. 한국, 일본, 멕시코 세 나라에 운명을 맡긴 이주민의 삶, 백여 전 그 시대를 살았던 한인의 소리를 판소리, 마리야치, 기유다로 풀어낸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한국 소리꾼과 고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멕시코팀은 무대에서 서로 마주 보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비친다. 반대로 멕시코나 일본 노래 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한국 소리꾼과 고수 역시 자연스럽게 앉아 마주 보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모니터에 나온다. 마치 공연장에서 한 팀이 무대에 올라가 있는 동안, 다른 팀은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 나누는 장면 같다. 멕시코 이주민뿐 아니라 이 시대인도 이야기는 이어진다는 의미일까.
머리에 베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려 휴지를 꺼냈다. 내려쓴 모자 아래로 눈가를 닦았다. 반대쪽 끝에 관람객 한 명뿐이었다. 낯선 멕시코 땅에서 7번 결혼한 할머니의 굴곡지고 서글픈 이야기가 소리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영상의 중간중간 손바닥처럼 넓은 멕시코 선인장 노빨(Nopal)를 손질해 요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빨의 가시를 칼로 긁어 제거하고 삶아서 데친다. 하와이로 간 조선인은 계약기간이 2년이었고, 멕시코로 간 조선인은 계약기간이 4년이었다. 멕시코로 간 이들은 계약이 해지된 이후에도 귀국할 돈이 없어 계속 농장에서 생활했고, 단 한 명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한국에서 멕시코로 오는 이민자도 없었다. 이들은 멕시코인, 마야인과 결혼했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영상 일부 Ⓒ정유진
<백년 여행기>의 첫 소절 '순례자여'로 시작한다. 순례자 영어 pilgrim은 라틴어 패레그리눔(peregrinum)에서 왔다. peregrination은 외국인을 뜻한다. 고대 로마에 바티칸을 방문하는 순례객이 많았기에 낯선(foreign), 타국(abroad)을 오는 외국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낯선 타국을 가는 목적은 여행이나 종교적 이유, 돈을 벌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다. 어떤 이유이든 멀고 낯선 땅으로 간다는 뜻이다. 멕시코에 간 한인은 여행도 순례도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채찍을 맞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예처럼 생활했다.
정연두, 날의 벽 Ⓒ정유진
영상을 보고 마지막 전시실로 갔다. 한쪽 벽면에 세계 각국의 농기구 모양 오브제를 쌓은 <날의 벽>(2023)이 있다. 163개 액자 안에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 오브제이다. 오브제 벽의 좌우 양쪽 벽은 통곡의 벽처럼 깊은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
얼마 전 브런치에 써서 올렸던 카라 워커의 설탕 작품이 생각났다. 설탕 작품이 담고 있는 제국 시대의 흑인 노예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탕수수에 담긴 제국주의와 흑인의 디아스포라가 아닌, 대한제국과 한국의 슬픈 디아스포라가 여기 있구나.
정연두, 날의 벽 일부 Ⓒ정유진
마지막 전시실을 무거운 걸음으로 나왔다. 미술관 정원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저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아려왔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잘 살아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