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회화는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회화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작가들은 회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해왔다. 야수파의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의 추상화,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앤디 워홀의 팝 아트까지 이어져왔다. 회화는 독창적인 길을 모색해 갔다.
회화와 사진이 평생 선을 그리며 함께 손잡을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회화 속으로 사진을 품은 작가가 있었다. 독일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이다.
리히터는 1932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그가 7살 때,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하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히틀러 나치 군에 징집되었다. 리히터는 10살이 되던 1942년 히틀러 청소년단 유겐트 Hiter Jugend에 징집되어 사상 교육을 받았다. 개인의 자유과 개성은 허용되지 않았다. 12살 그가 살던 동네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19살 드레스덴 학교에 입학했다. 오 년간 석고, 누드 등을 배웠다. 학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가르쳤다. 1959년 서독에서 열린 [제2회 카셀 도큐멘타 Kassel Documenta II] 전시회를 방문했다. 잭슨 폴록, 루시오, 폰타나, 진푸리 Jean Fautrier 등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처음 접한다. 드레스덴에서 사회주의 미술 교육을 받아오던 그에게 미국 팝 아트와 추상 표현주의 기법들은 새롭게 다가왔다. 이 전시회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1961년 3월 29세 리히터는 관광객 자격으로 드레스덴에서 모스크바로 혼자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레닌 그라드로 넘어갔다. 돌아오는 기차는 서독 베를린 역에 정차했다. 자신의 여행 가방을 그곳에 보관하고 아내 마리안느 Marinanne Eufinger를 데리러 드레스덴으로 들어갔다. 친구에게 부탁해 둘은 드레스덴에서 동 베를린까지 차로 이동한다. 동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서독으로 넘어왔다.
리히터가 넘어오던 이 시기, 1958년에서 1961년까지 70만 명이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왔다. 리히터 부모님은 아들이 동독을 떠날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도착하고 육 개월 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서독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갔다. 시그마 폴케 Sigmar Polke, 로라드 피셔 Konard Fischer Lueg, 블랑키 등과 함께 작업했다. 이 시기 첫 '흐리기' 기법 <보행자> <알스터>가 나왔다. 흑백 사진을 이용해 회화를 시작했다. 대상의 경계를 붓질로 흐리게 만들어 없애버렸다. 뿌연 안개 속에 있는 듯 은은하게 다가온다. 현실 속 인물은 가상 인물처럼 보인다.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간다.
사진첩을 열어 유년 시절 함께 했던 삼촌과 이모 사진을 봤다. 그리고 <삼촌 루디 Onkel Rudi>과 <이모 마리안나>를 작업했다. 이 작품을 만들 때, 이모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사진 속, 아기 리히터를 안고 있는 14살 이모는 나치 우생학 실험으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스무 살에 정신 분열증에 걸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까지 나치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굶어 죽었다. 그리고 팔천 여명의 환자들과 함께 땅 구덩이에 묻혔다. 리히터의 장인어른 Heinrich Eufinger는 독일 SS 의사로 정신병자들을 생체 시험하던 의사였다. 그가 이모 마리안나 역시 실험했을 것으로 훗날 조사되었다.
리히터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말했다. "너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이모처럼 끝날 거야."
(좌) 뒤샹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드> 1912 (우) 게르하르트 리히더 <계단 위의 누드> 1966
왼쪽은 머이브리지 사진에 영감을 받은 뒤샹의 <계단을 걸어오는 누드>다. 이 작품을 리히터는 다시 사진의 사실주의를 입혀 <계단 위의 누드>로 완성했다. 이 시기 리히터는 여성 누드, 에로틱 형태 이미지, 자연 세계, 도시 풍경에 관심이 있었다.
흐리기 기법을 사용해 여성은 유령처럼 보인다.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고 젖어 있는 유성 페인트 상태에서 브러시로 윤곽을 녹인다. 움직이는 피사체가 아닌 고정된 이미지를 흔들리는 듯 움직이는 효과를 낸다. 뚜렷한 인물은 흐리기 기법으로 기억 속 한 장면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 사이
1977년 그에게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색이 들어간 기하학적 회화, 추상회화, 회색 회화, 유리 작품 등으로 작품 범위를 넓혀갔다. 1987년까지 추상화에 몰두한다. 특히 1982~1983년 수많은 양초들을 그렸다.
미술관에서 초를 처음 마주하면 사진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한참 가까이에서 보면 회화인걸 알게 된다. 그의 양초 시리즈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지극히 정적이고 평면화된 프레임 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리히터는 사진은 회화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객관적 목적을 가진 것이고, 회화는 작가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사진만큼 역사적 사건을 재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에서 캔버스 속으로 들어온 양초는 우리의 시선을 오래 잡아둔다. 조용한 방안, 먼지가 쌓인 책상 위 양초 같다. 사물의 시간성, 존재의 생명력을 촛불로 담아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Skull with Candle> 1983 캔버스에 유화 100x150cmⓒgerhard-richter.com
양초 시리즈를 끝낸 그는 1988년 15장의 흑백 사진 회화 연작 <10월>을 작업했다. 1977년 10월 18일 교도소에서 모두 사망한 사건이 실린 사진들을 차용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모습을 담았다. 그만의 기법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역사화를 제시했다. 1980년대는 그에게 추상 회화 작품들과 양초 시리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시기였다.
사진과 회화 사이
전쟁의 파괴. 개인의 억압. 어두운 시간.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아름다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아름다움 역시 현실 속 가족 모습에서 발견했다.
나는 작품 <베티> 첫인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리히터 전시회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뒷모습이었다. 사진인지 아닌지 궁금한 것은 둘째 치고,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어떤 강렬함이 내 발을 붙잡았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데올로기의 파도를 넘었던 리히터를 보면서 이명준이 떠올랐다. 최인훈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은 남과 북이 아닌 제3세계로 배 타고 떠난다. 그리고 바다에 잠든다.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 실제와 재현, 과거 기억과 현재, 이분법적인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자신 작품을 어떤 특정한 미술 사조나 스타일로 정의하지 않았다. 단지 다양한 매체와 기법, 방법들을 평생 시도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창의적인 자유를 발산시키는 제3세계였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추상 표현주의를 벗어나 신표현주의라는 미술사의 대표주자 타이틀을 가진 리히터. 그 시작점은 무서웠던 과거 기억과 상처 그리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사진첩 속 삼촌과 이모 기억으로 시작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까지. 그 새로운 도전은 텅 빈 곳이 아닌 과거와 현실에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