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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Apr 27. 2020

시작은 어디서 오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회화는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회화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작가들은 회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해왔다. 야수파의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의 추상화,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앤디 워홀의 팝 아트까지 이어져왔다. 회화는 독창적인 길을 모색해 갔다.


회화와 사진이 평생 선을 그리며 함께 손잡을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회화 속으로 사진을 품은 작가가 있었다. 독일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이다.


리히터는 1932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그가 7살 때,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하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히틀러 나치 군에 징집되었다. 리히터는 10살이 되던 1942년 히틀러 청소년단 유겐트 Hiter Jugend에 징집되어 사상 교육을 받았다. 개인의 자유과 개성은 허용되지 않았다. 12살 그가 살던 동네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19살 드레스덴 학교에 입학했다. 오 년간 석고, 누드 등을 배웠다. 학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가르쳤다. 1959년 서독에서 열린 [제2회 카셀 도큐멘타 Kassel Documenta II] 전시회를 방문했다. 잭슨 폴록, 루시오, 폰타나, 진푸리 Jean Fautrier 등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처음 접한다. 드레스덴에서 사회주의 미술 교육을 받아오던 그에게 미국 팝 아트와 추상 표현주의 기법들은 새롭게 다가왔다. 이 전시회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1961년 3월 29세 리히터는 관광객 자격으로 드레스덴에서 모스크바로 혼자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레닌 그라드로 넘어갔다. 돌아오는 기차는 서독 베를린 역에 정차했다. 자신의 여행 가방을 그곳에 보관하고 아내 마리안느 Marinanne Eufinger를 데리러 드레스덴으로 들어갔다. 친구에게 부탁해 둘은 드레스덴에서 동 베를린까지 차로 이동한다. 동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서독으로 넘어왔다.


리히터가 넘어오던 이 시기, 1958년에서 1961년까지 70만 명이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왔다. 리히터 부모님은 아들이 동독을 떠날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도착하고 육 개월 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서독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갔다. 시그마 폴케 Sigmar Polke, 로라드 피셔 Konard Fischer Lueg, 블랑키 등과 함께 업했다. 이 시기 첫 '흐리기' 기법 <보행자> <알스터>가 나왔다. 흑백 사진을 이용해 회화를 시작했다. 대상의 경계를 붓질로 흐리게 만들어 없애버렸다. 뿌연 안개 속에 있는 듯 은은하게 다가온다. 현실 속 인물은 가상 인물처럼 보인다.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간다.


(좌) <삼촌 루디>1965 87x50cm   ⓒGerhard-richter.com            (우) <이모 마리안나> 1965  ⓒGerhard-richter.com


사진첩을 열어 유년 시절 함께 했던 삼촌과 이모 사진을 봤다. 그리고 <삼촌 루디 Onkel Rudi>과 <이모 마리안나>를 작업했다. 이 작품을 만들 때, 이모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사진 속, 아기 리히터를 안고 있는 14살 이모는 나치 우생학 실험으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스무 살에 정신 분열증에 걸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까지 나치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굶어 죽었다. 그리고 팔천 여명의 환자들과 함께 땅 구덩이에 묻혔다. 리히터의 장인어른 Heinrich Eufinger는 독일 SS 의사로 정신병자들을 생체 시험하던 의사였다. 그가 이모 마리안나 역시 실험했을 것으로 훗날 조사되었다.


리히터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말했다. "너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이모처럼 끝날 거야."


(좌) 뒤샹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드> 1912          (우) 게르하르트 리히더 <계단 위의 누드> 1966

왼쪽은 머이브리지 사진에 영감을 받은 뒤샹의 <계단을 걸어오는 누드>다. 이 작품을 리히터는 다시 사진의 사실주의를 입혀 <계단 위의 누드>로 완성했다. 이 시기 리히터는 여성 누드, 에로틱 형태 이미지, 자연 세계, 도시 풍경에 관심이 있었다.


흐리기 기법을 사용해 여성은 유령처럼 보인다.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고 젖어 있는 유성 페인트 상태에서 브러시로 윤곽을 녹인다. 움직이는 피사체가 아닌 고정된 이미지를 흔들리는 듯 움직이는 효과를 낸다. 뚜렷한 인물은 흐리기 기법으로 기억 속 한 장면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 사이


1977년 그에게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색이 들어간 기하학적 회화, 추상회화, 회색 회화, 유리 작품 등으로 작품 범위를 넓혀갔다. 1987년까지 추상화에 몰두한다. 특히 1982~1983년 수많은 양초들을 그렸다.


미술관에서 초를 처음 마주하면 사진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한참 가까이에서 보면 회화인걸 알게 된다. 그의 양초 시리즈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지극히 정적이고 평면화된 프레임 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좌) <Candle> 1982 캔버스 유화 90x95cm         (우) <Two Candle> 1983 캔버스 유화 125x100cm ⓒGerhard-richter.com



리히터는 사진은 회화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객관적 목적을 가진 것이고, 회화는 작가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사진만큼 역사적 사건을 재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에서 캔버스 속으로 들어온 양초는 우리의 시선을 오래 잡아둔다. 조용한 방안, 먼지가 쌓인 책상 위 양초 같다. 사물의 시간성, 존재의 생명력 촛불로 담아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Skull with Candle> 1983 캔버스에 유화 100x150cmⓒgerhard-richter.com


양초 시리즈를 끝낸 그는 1988년 15장의 흑백 사진 회화 연작 <10월>을 작업했다. 1977년 10월 18일 교도소에서 모두 사망한 사건이 실린 사진들을 차용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모습을 담았다. 그만의 기법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역사화를 제시했다. 1980년대는 그에게 추상 회화 작품들과 양초 시리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시기였다.



사진과 회화 사이


전쟁의 파괴. 개인의 억압. 어두운 시간.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아름다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아름다움 역시 현실 속 가족 모습에서 발견했다.  


나는 작품 <베티> 첫인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리히터 전시회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뒷모습이었다. 사진인지 아닌지 궁금한 것은 둘째 치고,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어떤 강렬이 내 발을 붙잡았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베티 Betty> 1988 캔버스에 유화102x72cmⓒgerhard-richter.com

재혼한 부인에게서 얻은 11살 딸 베티 모습이다. 당시 리히터는 87세였다.  베티 사진을 기초로 한 유화 작품으로 오프셋 인쇄를 사용해 사진과 같은 인상을 준다. 표면은 니트로 락카 용액으로 코팅해 사진처럼 반짝인다.


전통적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초상화는 얼굴로 인물 정보 Identity를 전달해야 다. 감상이 목적이 아닌 누구인가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이 많았다. <베티>는 그런 고정관념을 버렸다. 뒷모습과 회색 바탕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Reader> 캔버스에 유화 1994 72x102cmⓒgerhard-richter.com


리히터는 우연히 바라본 아내 머리 위 쏟아지는 빛을 보았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물건을 소장하는 것이 아닌, 순간 인식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세 번째 부인 사빈 Sabine이다. 시적이며 정적이다. 고요하면서 아름답다. 



실제와 재현 사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흐리게 한다. 이것이 리히터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왜 사진을 베끼고 붓질을 해가며 다시 흐리게 했을까? 사진은 실제 사실이고, 흐리기는 추상이다. 사실주의 회화법과 추상표현 화법을 동시에 담았다.


(좌) <튤립>1995 캔버스에 유화 36x41cm     (우) <장미꽃> 1994 캔버스에 유화 46x51cmⓒgerhard-richter.com


그는 항상 본다는 것에 화두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지각, 이해가 그것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불확실하게 사물을 보여주는 그의 기법이 이를 말하고 있다.


흐리게 하기는 실제 진실과 그것을 기억하는 현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그 사이에 서서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미술은 사물을 재현하는 역할이었다. 리히터를 통해 사진은 현대 미술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Seascape> 1998 캔버스 유화 290x290cmⓒGerhard Richter, Vegap, Biblao, 2019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데올로기의 파도를 넘었던 리히터를 보면서 이명준이 떠올랐다. 최인훈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은 남과 북이 아닌 제3세계로 배 타고 떠난다. 그리고 바다에 잠든다.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 실제와 재현, 과거 기억과 현재, 이분법적인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자신 작품을 어떤 특정한 미술 사조나 스타일로 정의하지 않았다. 단지 다양한 매체와 기법, 방법들을 평생 시도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창의적인 자유를 발산시키는 제3세계였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추상 표현주의를 벗어나 신표현주의라는 미술사의 대표주자 타이틀을 가진 리히터. 그 시작점은 무서웠던 과거 기억과 상처 그리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사진첩 속 삼촌과 이모 기억으로 시작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까지. 그 새로운 도전은 텅 빈 곳이 아닌 과거와 현실에서 시작했다.


나의 시작은 어디로부터 출발했는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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