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여행을 계획할 때,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일 눈이 오는 곳이라 우산을 쓸 수밖에 없을 거라고. 당연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평소에 눈이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나였기에, 비도 아니고 눈쯤은 그냥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나였기에, 우산을 챙기지 않고 비행기에 오른다.
도착하자마자 밀려오는 후회.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온몸에 눈꽃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 망했다. 호텔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과연 내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눈길을 헤쳐 도착할 수 있을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산 없이 저 문을 나갈 수가 없다. 옷이 젖는 건 걱정되지 않는다. 옷은 여유 있게 가져왔으니까. 문제는 머리다. 평소에도 헤어스타일을 꽤나 신경 쓰는 편이다. 머리가 예쁜 정도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결정될 만큼, 머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건 내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야지. 머리가 젖지 않도록 모자를 쓰고 간다. 머리가 눌려서 모양이 일그러지는 건 정말 싫지만, 눈에 젖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지니 그냥 맞는 것보단 낫다. 분명 10분이면 도착한댔는데, 왜 호텔이 보이지 않는 걸까. 높이 쌓인 눈을 헤쳐가야 하기 때문이겠지. 여행 시작부터 이런 시련을 겪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나는 분명 기분 좋은 여행을 기대했는데.
호텔에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걸까, 우산 없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다르게 웃음이 가득하다. 우산도 없이, 모자도 없이, 온몸으로 눈을 받아내고 있다. 머리에 소복이 쌓이는 눈도, 옷깃에 하얀 눈송이가 맺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쩌다 눈발이 세차게 몰아쳐도 그저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툭툭 털어줄 뿐이었다. 누군가는 손바닥을 펼쳐 눈송이를 받아보고,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눈을 맞는 걸 즐거워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곳에서 외적인 모습에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을 막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처럼, 나도 조금은 흐트러져도 괜찮지 않을까. 모자를 쓴 건 머리를 망가지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산 없이 걷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였던 건 아닐까. 많은 생각 끝에 자유로워진 나는, 조심스레 모자를 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