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와 제국의 개혁

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1), 지중해의 해체에서 대서양의 발견까지

by 자유학예가



3세기의 위기


284년 11월, 페르시아 원정에서 귀환하던 중 황제 누메리아누스가 시해되었다. 부패한 시신이 황제의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의 장인이자 근위대장인 아페르가 암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공동 황제였던 카리누스가 제위를 주장했으나 동방 주둔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군대는 회의를 열어 달마티아 출신의 군인 디오클레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고, 디오클레스는 즉시 아페르를 처형했다. 그는 곧 자신의 이름을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로 바꾸어 전통적인 로마 황제의 형식을 갖추었다.


당대인들에게 이 사건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반세기에 걸쳐 반복되어 온 패턴의 충실한 재연이었을 뿐이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라인 강변에서 자기 병사들에게 살해된 이후, 로마는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반세기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스무 명을 넘었으며, 대다수는 자연사가 아니라 살해나 전쟁으로 제위를 마감했다. 황제의 평균 재위 기간은 2~3년에 불과했다. 갈리에누스(253~268년)처럼 10년을 넘기는 경우는 예외적이었고, 그마저도 암살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이 시기를 단순히 개인의 연약함이나 도덕적 타락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3세기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구조적 문제였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 제국이 채택한 원수정은 황제를 '제1시민'으로 규정함으로써 공화정의 외양을 보존하는 동시에 실질적 군주권을 행사하는 묘한 균형 위에 서 있었다. 이 체제는 원로원의 묵시적 동의, 군단의 충성,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단일 황제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 기원후 1~2세기, 소위 '오현제 시대'에 이 구조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그 안정성은 제도의 탄탄함이 아니라 개인의 탁월함에 기댄 것이었고, 제국의 팽창과 함께 한계점에 다가서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제국이 직면한 외적 압력은 이전과 질적으로 달랐다. 동쪽에서는 226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대체하며 훨씬 공세적인 강국으로 부상했다.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에 포로로 잡히는 전례 없는 사건은 로마의 군사적 무적 신화를 산산조각 냈다. 북쪽에서는 알레만족, 고트족, 프랑크족 같은 게르만 부족 연합체들이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방어선을 동시다발적으로 위협했다. 단일 황제가 이 양면의 압박에 동시에 대응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황제가 동쪽 전선에 집중하는 동안 북방은 무너졌고, 북쪽으로 달려가면 동쪽이 흔들렸다.


이 군사적 공백을 메운 것은 지역 군사령관들의 자립이었다. '30인의 참칭자'로 불리는 일련의 지방 군벌들이 제국 각지에서 독자적 권력을 선언했다. 갈리아 제국(260~274년)과 팔미라 왕국(263~273년)의 분리는 한때 로마를 세 조각으로 쪼개놓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변경에서 실질적인 군사 위협에 맞서던 지역 군단들이 중앙의 지휘 체계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존을 도모한 결과였다. 황제의 권위는 이 시기 사실상 자신을 추대한 군단의 창끝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유효했다.


경제적 파탄은 이 악순환을 가속화했다. 끊임없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역대 황제들은 주화의 은 함유량을 지속적으로 낮추었다. 3세기 중반이 되자 사실상 청동에 가까운 주화가 은화로 유통되었고, 화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제국 경제를 강타했다. 세수는 줄고 지출은 늘었으며, 군인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이 경제적 압박은 변경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속주의 농민층에게 가장 가혹하게 전가되었다. 3세기 갈리아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 농민 반란은 그 사회경제적 압력이 폭발한 징후였다.


이 누적된 위기가 드러낸 것은 원수정 체제의 근본적 결함이었다. 원수정은 제국이 일정 규모 이하로 유지되고 외적 위협이 관리 가능한 수준에 머물 때만 작동하는 체제였다. 군사 지휘, 행정 감독, 법률 집행, 종교 의례, 외교 교섭을 황제 한 인격이 모두 겸해야 하는 이 구조는, 통치 부담이 한 인간의 역량을 초과하는 순간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3세기는 바로 그 임계점이 도래했음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참혹하게 증명한 시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후 보여줄 행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은, 그가 권력을 개인적 영광의 획득이 아닌 제국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달마티아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군에 들어와 오로지 실력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 이 인물은, 프로부스와 카루스 황제 치하에서 복무하며 제국의 작동 원리를 그 누구보다 내부에서 목격해 온 사람이었다. 그가 직면한 문제는 분명했다. 하나의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커진 제국, 군대의 창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황제 권위, 그리고 붕괴 직전의 경제. 그가 내린 해법들은 성공과 실패의 정도는 달랐지만, 모두 이 근본 문제에 대한 응답이었다.


원수정에서 전제정으로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물려받은 것은 제국의 영토만이 아니었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위기가 철저히 훼손해 놓은 황제 권위의 잔해도 함께 떠안았다. 원수정의 언어는 여전히 공식 문서와 의례 속에 살아 있었지만, 그 실질은 이미 공허했다. '제1시민'이라는 칭호는 원로원과의 협치라는 허구를 전제했으나, 3세기의 황제들은 원로원이 아닌 군단의 창끝 위에 서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균형의 언어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깊어진 나머지, 황제 권위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사실상 잃은 상태였다.


문제의 핵심은 정당성의 공백이었다. 군대의 추대는 황제를 만들 수 있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지키지는 못했다. 다른 군단이 더 유망한 지휘관을 옹립하는 순간, 전임 황제의 정당성은 소멸했다. 이 구조에서 황제의 생존은 끊임없는 군사적 성공과 포상 능력에 달려 있었고, 그것이 흔들리는 순간 죽음이 기다렸다.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면한 과제는 단순히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대의 추대를 넘어서는, 보다 안정적인 정당성의 기반을 새로이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법은 황제 권위의 원천을 인간적 영역에서 신적 영역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3세기 위기 속에서 심화된 절대군주화 경향의 제도적 완성이었다. 이미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지배자이자 신(Dominus et Deus)'으로 불리기를 원하며 황제 권위의 성역화를 시도한 바 있다. 한 세기 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신 숭배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격상시켜 황제 권위를 보편적 신적 질서와 결부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흐름을 체계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통치 이념으로 정착시켰다.


그 구조의 핵심이 이른바 '요비우스-헤르쿨리우스(Jovius-Herculius)' 체계였다. 287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요비우스(Jovius)', 즉 유피테르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채택했고, 공동 황제 막시미아누스에게는 '헤르쿨리우스(Herculius)', 즉 헤르쿨레스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배역 분담은 이념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유피테르가 신들의 주권자로서 질서와 계획을 관장하듯,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통치의 최고 설계자로 기능했다. 헤르쿨레스가 유피테르의 의지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영웅적 집행자이듯,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에서 그 의지를 군사적으로 관철하는 역할을 맡았다. 황제들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의 지상 대리자였다. 이 구분은 의도적이었다. 황제를 직접 신격화하는 것은 전통적인 로마의 종교 관념과 마찰을 빚을 수 있었고, 대리자라는 위치는 신적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그 마찰을 최소화하는 절충점이었다.


이 구도는 단순한 이념에 그치지 않았다. 두 황제는 직속 정예 부대를 각각 요비아니(Ioviani)와 헤르쿨리아니(Herculiani)로 명명했는데, 이는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라는 황제의 신적 칭호를 부대 이름에 각인한 것이었다. 황제를 폐위하거나 심지어 제위를 경매에 부친 전력이 있던 프라이토리아니(로마 제국 황제의 호위부대 겸 직할 중앙군)의 정치적 위험을 고려하면, 이 새로운 근위 전력의 강화는 황제 개인에게 더 충성적인 군사 기반을 구축하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역화 시도는 궁정 의례의 전면적 재편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전 황제들의 방식과 단절하는 정교한 접견 의례를 확립했다. 황제 앞에 나아가는 자는 엎드려 절해야 했으며, 가장 총애받는 자에게만 황제의 의복 자락에 입을 맞추는 특권이 허용되었다. 황제는 금관과 보석으로 치장했고, 보라색 의복은 황제에게만 허락되었다. 황제 자문회의도 종전의 콘실리움(consilium)에서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으로, 다시 말해 황제 앞에서 '서서 기다리는' 회의로 바뀌었다. 이 모든 장치는 황제를 일상적 인간의 영역 위로 격리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초월적 질서의 현현으로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데는 지리적 조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가 아닌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를 통치 거점으로 삼았다. 로마는 여전히 원로원의 도시였으며, 원수정 체제의 황제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며 '제1시민'이라는 공화정적 외형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니코메디아에서 통치하는 황제는 그 정치적 관습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었다. 원로원의 정치 문화로부터 멀어진 공간에서, 새로운 궁정 의례와 황제 권력의 신성화는 훨씬 과감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의례적 과시의 강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황제 권위의 문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원수정에서 황제의 권력은 원로원의 위임과 군대의 지지라는 불안정한 합의에 근거했다. 도미나투스(Dominatus), 즉 주권자 체제에서 황제의 권력은 신적 질서의 위임에 근거했다. 전자는 합의가 철회되면 권력도 소멸하는 구조였다. 후자는 황제를 신성한 질서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도전을 단순한 정치적 반란이 아닌 신성한 질서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했다. 군단이 황제를 갈아치우는 행위는 이 체제 안에서 순리를 거스르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념적 재구성의 내적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황제 권위의 신성화는 정당성의 문제를 완화했지만, 승계의 문제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신의 대리자라는 지위는 혈통이나 지명을 통해 다음 세대로 자동 이전되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305년 이후 사두정치 체제가 급속히 붕괴하고 내전으로 치달은 것은, 이념적 정당성만으로는 권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요비우스-헤르쿨리우스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두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 너머의 승계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이 전환이 로마 제국의 통치 구조에 남긴 흔적은 깊고 지속적이었다. 신성한 권위에 근거한 전제적 지배와 정교한 궁정 의례를 통한 황제의 격리와 신성화라는 도미나투스의 논리는 콘스탄티누스가 그 자리에 기독교 신학을 대입하는 순간 훨씬 강력한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이후 황제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수정은 황제를 시민들 중 가장 탁월한 자로 자리매김했다. 도미나투스는 황제를 시민의 세계 위에 존재하는 신성한 질서의 현현으로 격상시켰다. 이 전환을 제도로 완성한 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사두정의 도입


285년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고, 이듬해 286년 3월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 뒤, 293년 3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 동방과 서방의 부제로 임명함으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른바 사두정치(Tetrarchy), 즉 네 명이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완성했다. 후대의 시각에서 이 체제는 종종 제국 분할의 선례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는 사두정치의 본질을 오독하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한 것은 제국의 물리적 분할이 아니라 통치 기능의 분업이었다. 제국은 여전히 하나였다. 법령은 네 황제의 이름으로 공동 발포되었고, 화폐는 제국 전역에서 통용되었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최고 선임자(Senior Augustus)로 위치시키며 체제 전체의 최종 결정권을 쥐었다.


이 체제가 해결하려 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군사 대응의 신속성, 그리고 승계 질서의 제도화였다.


군사적 측면부터 살펴보자. 3세기의 위기가 반복적으로 증명한 것은 단일 황제가 제국의 모든 전선에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두정치는 이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직접적 응답이었다. 각 황제의 거점은 이 군사적 논리를 충실히 반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를 본거지로 삼아 부유한 동방 지역을 관할했다. 갈레리우스는 시르미움 또는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다뉴브 하류와 발칸 반도를 담당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에 주둔하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맡았다. 콘스탄티우스는 트리어(또는 에보라쿰)를 거점으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지휘했다. 전통적 수도 로마는 이 배치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네 거점은 예외 없이 위협이 현실화되는 변경 가까이에 위치했다.


두 번째 문제인 승계 질서의 제도화는 더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3세기 황제들이 반복적으로 살해된 배경에는 명확한 승계 원칙의 부재가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문제를 혈통 중심의 계승을 제도적 지명의 원리 아래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두 정제(Augustus)가 각각 한 명의 부제(Caesar)를 임명하고, 정제가 퇴위하면 부제가 승격하며 다시 새로운 부제를 지명하는 구조였다. 황제직의 승계는 이를 통해 혈통이 아닌 절차와 지명의 원리에 따르는 것으로 재정의되었다.


이 제도를 안정화하기 위해 그는 네 황제 사이에 인위적으로 구성된 가족적 유대를 결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상징적 형제 관계를 표방했고,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와 혼인했으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결합했다. 이러한 혼인과 상징적 친족화는 자연적 혈연을 대체하기보다, 지명 원리를 보강하는 정치적 결속 장치로 기능했다.


이 실험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생전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갈레리우스는 296년부터 299년까지 벌어진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제1차 니시비스 조약(299년)을 이끌어냈다. 이 조약으로 로마는 티그리스 강 동쪽의 다섯 사트라피아(고대 페르시아의 행정 구역)를 확보하고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콘스탄티우스는 293년부터 296년 사이에 브리타니아의 카라우시우스-알렉투스 반란을 종식시켰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이집트의 찬탈자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를 제거하고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켰다. 네 황제가 각자의 전선에서 동시에 이 성과들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체제의 군사적 효율성이 적어도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체제의 내적 긴장은 처음부터 잠재해 있었다. 사두정치의 작동은 네 황제 사이의 자발적 협력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인적 권위에 크게 의존했다. 기번은 이 체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런 균형을 이루려면 두 번 다시는 찾아내기 힘들 여러 가지 상이한 기질들과 능력들이 어우러진 행운이 필요했다. 두 명의 황제에게는 질투심이 없어야 했고, 두 명의 부황제에게는 야심이 없어야 했으며, 네 명의 독자적인 군주들이 항상 전체적인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Gibbon, 1776/2008, p. 483)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동시에 퇴위하자, 지명 원리는 즉각 혈통 원리와 충돌했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지명에서 배제되었고, 이 배제는 향후 다시 시작될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실패는 사두정치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지명 원리는 황제직의 혈통 세습이나 군단의 자의적 추대를 제도적 승계 절차 아래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였으나, 그것을 관철할 강제력이 없었다. 군대의 충성과 혈통적 이해관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걸출한 인물의 권위 위에서만 작동하는 체제였고, 그 권위가 퇴장하자 체제도 함께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사두정치가 로마 제국의 통치 구조에 남긴 유산은 체제 자체의 수명보다 훨씬 길었다. 행정 중심지의 다원화, 황제의 지역 분산 통치, 생전의 후계자 지명을 통한 황위 계승의 제도적 관리라는 발상은 이후 제국 통치의 영구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사두정치가 제국의 인적 통치 구조를 재편했다면, 그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세밀하고 광범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네 황제가 각자의 거점에서 군사와 행정을 처리한다는 발상은, 황제에게 실시간으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황제의 명령을 속주 말단까지 집행할 수 있는 관료 체계가 존재할 때만 현실화될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혁은 이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다.


개혁의 출발점은 속주 체계의 전면적 재편이었다. 그는 기존의 약 50개 속주를 100개 내외로 세분화했다.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 시대의 전통에서 이탈리아는 속주가 아닌 본토로서 특별한 행정적 면제를 누려왔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특권을 폐지하고 이탈리아를 여러 속주로 분할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효율화를 넘어 상징적 함의를 가진 결정이었다. '로마 시민의 본토'라는 이념적 특수성이 제국 전체를 균질한 행정 단위로 통합해야 하는 필요성 앞에서 꺾인 것이었다.


속주 세분화의 핵심 목적은 개별 총독의 권한 축소였다. 3세기 위기의 반복적 패턴은 광대한 속주를 관할하는 총독이 군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장악했을 때 독립 세력화하거나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속주를 작게 나눔으로써 어떤 단일 관리도 반란을 조직할 만큼의 인적·물적 자원을 독자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차단하려 했다. 동시에 증강된 군단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통제해야 하는 군사적 필요 역시 속주 분할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와 함께 민정과 군정의 분리가 제도화되었다. 속주 총독(praeses)은 민사 행정을 담당했고, 군사 지휘권은 별도의 군사령관(dux)에게 귀속되었다. 한 인물이 행정과 군사를 겸직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이 분리는 군사 전문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내전의 구조적 가능성을 억제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된 약 100개에 달하는 속주들을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를 위해 중간 행정 단위인 디오케시스(dioecesis)가 도입되었다. 약 12개의 디오케시스는 여러 속주를 묶어 하나의 광역 단위를 형성했고, 각 디오케시스의 수장인 비카리우스(vicarius)는 속주 총독들을 감독했다. 디오케시스들은 다시 네 개의 프라이토리오 관할구(praefectura praetorio)로 묶였으며, 각 관할구는 프라이토리오 장관(praefectus praetorio)이 통할했다. 본래 근위대장직에서 출발한 이 직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군사 지휘권을 잃는 대신, 황제를 대리하여 사법, 재정과 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민정 관직으로 재편되었다. 그 결과 황제-프라이토리오 장관-비카리우스-속주 총독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행정 구조가 완성되었고, 제국 전역은 단일한 명령 체계 안에 편입되었다.


이 행정 팽창의 필연적 결과는 관료 수의 폭발적 증가였다. "수취하는 자가 경작하는 자보다 많아졌다"는 락탄티우스의 통렬한 비판은 다소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행정 비용 증가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조세 개혁은 이 압력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3세기 내내 제국 재정을 괴롭혀온 구조적 문제, 즉 속주마다 다른 징세 방식, 자의적 평가, 만연한 부패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핵심은 이우가티오-카피타티오(iugatio-capitatio) 체계였다. 토지의 생산 능력을 기준으로 환산한 과세 단위(iugatio)와 노동력을 기준으로 한 인두세(capitatio)를 결합한 이 방식은, 제국 전역에서 토지와 인구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전제로 했다. 이집트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문서들은 이러한 조사가 실제로 마을 단위까지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세금은 곡물, 기름, 포도주 등 현물로 징수되어 군대를 유지하는데 투입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는 군대 유지 비용을 기준으로 과세 규모를 산정하는 재정 운영 방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화폐 체계의 재정비도 이루어졌다. 294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새로운 은화와 대형 청동화를 도입하여 수십 년간 이어진 통화 혼란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비와 행정비의 구조적 팽창 속에서 인플레이션은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고,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이 뒤따랐다. 약 1,000여 품목의 가격과 임금에 상한선을 설정한 이 칙령은 위반자에게 극형을 규정했지만, 가격 통제 아래에서 공급이 위축되면서 거래는 음성화되었고 칙령은 곧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


이 일련의 개혁이 낳은 더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결과는 사회 이동성의 제약이었다.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납세자를 토지와 직업에 묶어두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특히 iugatio-capitatio 체계는 토지와 경작자를 하나의 과세 단위로 묶는 효과를 낳았으며, 그 결과 토지에서 이탈하는 소작인은 단순한 계약 파기자가 아니라 조세 질서를 교란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에서 콜로누스(colonus, 소작농)는 경작하는 토지에, 쿠리알레스(curiales, 도시 참사회의 구성원)는 지역 조세 징수 의무에 제도적으로 결박되었다. 법률 문헌에 등장하는 '등기된 소작인'이라는 개념은 이 변화를 제도적으로 반영한다. 국가의 세수 확보와 지주의 안정적 노동력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이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단기적으로는 세수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자원의 유동성을 감소시키고 사회 계층의 고착화를 심화시켰다. 이 경향이 후기 로마 사회에서 사실상 농노제의 전신으로 평가되는 콜로나투스 체계를 형성해 갔다는 점은 현대 역사학의 폭넓은 동의를 받는 분석이다.


기독교 박해


303년 2월, 니코메디아에 새로 건축된 기독교 교회가 황제의 명령에 의해 허물어졌다. 이튿날 발포된 첫 번째 칙령은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 성전의 파괴, 성서의 소각, 기독교인의 집회 금지와 법적 권리 박탈을 명령했다. 봄과 여름에 걸쳐 두 번째 칙령(성직자 체포·투옥)과 세 번째 칙령(제의 참여자 석방, 거부자 처형)이 뒤따랐으며, 304년 초 네 번째 칙령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기독교인에게 공개 제의 참여를 강제하고 거부자는 사형이나 강제 노역에 처하도록 했다. 후대 기독교 역사가들이 '대박해'로 명명한 이 사건은 로마 제국 역사상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이자 가장 조직적인 국가적 탄압이었다.


이 박해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종교적 불관용의 산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치세 전반기 내내 기독교에 대해 사실상 관용 정책을 유지했다. 그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는 친기독교적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정 내에도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20년에 가까운 치세 동안 기독교를 방치하다가 퇴위 불과 2년 전에 갑작스럽게 대규모 박해를 개시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박해가 순수한 종교적 동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박해의 직접적 계기로 사료들이 지목하는 것은 299년의 한 점술 의식이다. 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황소를 제물로 바치며 미래를 점치는 의식을 거행했을 때 내장 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관들이 그 원인을 의식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존재로 돌렸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와 궁정 내 기독교인들에게 제의 참여나 퇴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박해의 충분한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그것은 계기였을 수 있지만, 박해를 추동한 구조적 동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박해의 구조적 동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전체의 논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가 구축하려 한 것은 신성한 질서의 대리자로서의 황제, 로마의 전통적 종교 의례를 통해 유지되는 우주적 질서, 그리고 그 질서에 복속하는 통합된 제국이었다. 이 구도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다른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황제의 성역화를 거부했고, 로마의 공식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신앙을 황제의 권위 위에 놓았다. 요비우스-헤르쿨리우스 체계로 상징되는 이념적 구조 안에서, 이는 단순한 종교적 이탈이 아니라 제국 통합의 원리에 대한 거부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박해는 전통 의례에 기반한 제국 통합 계획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칙령의 집행 양상은 제국 전역에서 균일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가 관할하던 동방에서는 교회 파괴와 체포, 고문과 처형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콘스탄티우스가 담당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는 교회 건물 파괴에 그치고 기독교인에 대한 직접 박해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막시미아누스 관할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는 그 중간 어딘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통치하던 동방의 핵심 지역에서는 칙령이 비교적 엄격하게 시행되었고, 특히 니코메디아 궁정 주변에서는 체포와 처형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방에서도 지방 총독의 태도에 따라 집행 강도는 크게 달랐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위 이후 동방의 박해는 갈레리우스 치하에서 더욱 격화되었다.


여기서 박해의 근본적 역설이 드러난다. 303년 시점에서 기독교는 이미 제국 사회에 상당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인, 관리, 상인, 귀족 계층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의 분포는 광범위했다. 전통 제의 참여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이 공동체를 해체하거나 제국의 문화적 단일성을 회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박해는 오히려 반대 효과를 낳기도 했다. 순교자들의 고통은 기독교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서사로 전환되었다. 갈레리우스가 311년 임종 직전 사실상 박해의 실패를 인정하며 관용령(세르디카 칙령)을 반포한 것은 이 현실의 공식적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 실패는 공통 종교 의례가 더 이상 제국 인구를 결속시키는 유효한 매개체가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실패한 자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임자의 실패가 로마 전통 신앙이 더 이상 제국 통합의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충분히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진 퇴위와 은거


305년 5월 1일, 니코메디아 외곽의 한 언덕에서 전례 없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21년 전 디오클레스라는 이름의 군인이 황제로 추대되었던 바로 그 언덕에서, 이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와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자주색 망토를 벗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로마 제정사에서 황제가 계획된 절차에 따라 공식적으로 퇴위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같은 날 밀라노에서는 막시미아누스가 동일한 의식을 치렀다.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고,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새로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제외된 이 인선은 사두정치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고향 달마티아로 물러나 살로나 인근 스팔라툼(현재의 스플리트)에 자신이 295년부터 미리 건설해 둔 궁전에서 여생을 보냈다. 군사 요새와 호화 별장의 특성을 결합한 이 거대한 복합 건축물은, 퇴위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한 그의 실용주의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곳에서 그는 직접 채소밭을 가꾸었다. 308년 카르눈툼 회의에서 막시미아누스가 사두정치의 균열로 일어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함께 복위하자고 요청했을 때, 그는 거절하며 자신이 직접 심은 채소들을 보았다면 막시미아누스 또한 황위를 다시 탐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인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기억하고자 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311년 스팔라툼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퇴위한 이후 사두정치는 빠르게 붕괴했다. 305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자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포했고, 로마에서는 막센티우스가 스스로 제위를 선언했다. 306년부터 324년 사이 여섯 명에 달하는 아우구스투스 참칭자들이 난립하는 내전 속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도화하려 했던 공적 승계 원칙은 동력을 잃었다. 콘스탄티누스가 324년 최종 승자로 부상하여 단독 통치를 확립함으로써, 사두정이 억제하려 했던 혈통 세습의 원리는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그럼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구조적 유산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속주 분할과 관구 체계, 민정과 군정의 분리, 이우가티오-카피타티오 과세 체계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도 7세기 초까지 본질적인 부분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황제를 신성 질서의 지상 대리자로 규정하는 도미나투스의 이념은 기독교 황제론과 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나아가 중세 유럽의 통치 구조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인용구 출처

Gibbon, E. (2008). 로마제국 쇠망사 1 (윤수인 & 김희용, Trans.). 민음사. (Original work published 1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