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2)
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 지중해의 해체에서 대서양의 발견까지, 1,200년의 역사 —
CHAPTER 1. 고대 질서의 해체와 중세의 태동
콘스탄티누스는 272년경 상 모이시아 속주의 나이수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군인 출신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었고, 어머니 헬레나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후대에 반대파는 헬레나의 신분을 비하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출신에 흠집을 내려 했고, 즉위 후 지지자들은 헬레나를 귀족 출신으로 미화하는 선전을 퍼뜨렸다. 두 주장 모두 정치적 의도가 짙다. 콘스탄티누스의 출생이 이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즉위가 처음부터 정통성 시비에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293년 사두정이 공식적으로 성립되면서 콘스탄티우스는 서방 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를 얻는 조건으로 그는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딸 테오도라와 정략결혼을 올려야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볼모에 가까운 처지로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불리한 환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역에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며 승진을 거듭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위 후 부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궁정 내 존재감을 키웠다.
305년 5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니코메디아에서 퇴위를 선언하던 순간, 군중은 콘스탄티누스나 막센티우스가 후계자로 지명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새 부제로 호명된 이름은 갈레리우스의 부하 장교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외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두 부제 자리를 모두 자기 사람으로 채운 갈레리우스는 동방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장악한 인물로 부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한 사두정의 핵심 원칙, 즉 혈통이 아닌 능력과 지명에 의한 계승은 바로 그 퇴위의 순간에 처음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이제 갈레리우스 아래에서 복무해야 하는 불편한 처지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곁에 붙잡아두려 했다는 것은 당시 궁정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목상 선임 정제(senior augustus)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을 아버지 곁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요청을 언제까지나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가 술에 취한 기회를 노려 간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마지못해 허락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가 다음 날 아침 마음을 바꿀 것을 직감했다. 그는 그날 밤 즉시 출발했다. 역마다 말을 갈아타며 전속력으로 달렸고, 추격을 차단하기 위해 지나온 역의 말들을 모두 불구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의 세부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콘스탄티누스의 후대 선전이 이 탈출 장면을 즐겨 활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스스로 이 순간을 자신의 서사에서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서방에 도착한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와 합류하여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픽트족의 약탈을 응징하기 위한 칼레도니아 원정이었다. 그러나 306년 여름, 원정길에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오늘날의 영국 요크인 에보라쿰(Eboracum)에서 사망했다. 사두정의 원칙대로라면 부제가 정제 자리를 승계해야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이 원칙을 무시했다.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알라만니족 출신의 수장 크로쿠스가 선두에서 환호를 이끌었다. 이방인 용병 지도자가 로마 황제 즉위의 촉매가 된 이 장면은, 후기 로마 군사 구조의 이미 변화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사두정이 제도로서 설계한 지명과 서열의 원칙은 군사적 충성과 혈통의 논리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갈레리우스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초상화와 사신을 불태울 기세로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측근들이 만류했다. 공개적 거부는 곧 내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부제(Caesar)의 지위만을 공식 인정했고, 정제(Augustus) 자리는 세베루스에게 돌아갔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황제의 자줏빛 예복 차림으로 초상화를 보냈음에도, 공식 서열에서 한 단계 낮은 칭호를 기꺼이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 승인과 실질적 행동은 달랐다. 다른 황제들이 자신을 부제로 표기하는 화폐를 주조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화폐에 자신을 정제(Augustus)로 새겼다. 겉으로는 사두정치의 질서를 존중하는 척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부친의 뒤를 이은 정당한 정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즉위 직후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라인 강 방위선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갈리아는 본래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속주였으나, 3세기의 혼란을 거치며 인구가 줄고 도시가 황폐해진 상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트리어를 거점으로 삼아 변경을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았다. 부족의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신속하고 단호하게 진압했으며, 사로잡힌 이방 왕들을 트리어 원형경기장의 맹수에게 던지는 방식으로 지배의 언어를 각인시켰다. 가혹했지만 효과가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라인 강 전선은 상대적인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제국의 나머지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사두정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권력을 선언했다. 그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은퇴를 번복하고 아들 편에 섰다. 이를 진압하러 나선 서방 정제 세베루스는 막시미아누스의 군대에 격파되어 포로로 잡힌 뒤 자살을 강요받았다. 뒤이어 갈레리우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사두정의 원칙이 현실 앞에서 하나씩 무너지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 콘스탄티누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에게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퇴임 황제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혈통적 정통성을 보강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는 믿을 수 있는 동반자가 아니었다.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라인 강 원정에 나간 사이 그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예상보다 일찍 귀환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막시미아누스는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단순한 반란 진압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축한 요비우스-헤르쿨리우스 체계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가 그 신화적 틀로부터 공개적으로 결별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반란 직후 트리어에서 행해진 공개 연설에서 황실 웅변가는 콘스탄티누스가 3세기의 명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후손임을 선포했다.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계보였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명확했다.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의 대리자라는 정통성 대신, 위대한 선황의 혈통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권위를 재구성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같은 시기 그의 화폐에서 군신 마르스가 사라지고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가 등장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초월적 권위의 원천을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은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황제 권위의 신성화를 후계 정통성의 안정적 계승 구조로 연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전통 신앙의 호소력이 이미 약화된 제국에서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의 이름은 충분한 결속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공백을 직관적으로 감지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는 사두정의 언어와 신학 모두를 해체하고 있었다.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에 있어 로마의 황제부터 국경의 이민족들에게까지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진정한 초월적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하면서.
312년 가을, 콘스탄티누스는 결단을 내렸다. 그의 참모들들은 막센티우스와의 정면 대결을 만류했다. 점술사들은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내장을 살피는 점(Extispicy)을 쳤으나, 그 모양이나 상태가 군사적 행동을 하기에 매우 부적절하고 위험하다는 결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이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알프스를 넘었다. 이 무모해 보이는 진격이 훗날 '신의 인도'라는 서사로 포장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승리한 자만이 기적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치상으로는 막센티우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는 이탈리아 본토의 정예병과 아프리카에서 징집한 병력을 합쳐 약 7~10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은 그 절반 정도인 4~5만 수준이었다. 게다가 라인 강 방어선을 완전히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병력은 아예 원정에 동원되지 못했다. 그러나 병력의 수가 전부는 아니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로마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던 반면, 콘스탄티누스의 군단은 라인 강 변경에서 게르만족과 맞서며 단련된 정예병이었다.
알프스를 넘은 콘스탄티누스는 거침없이 남하했다. 수사(Susa)를 전격 돌파하고, 토리노 평원에서 막센티우스의 중기병대를 격파했으며, 밀라노를 무혈 입성한 뒤 베로나에서 치열한 공성전을 벌였다. 베로나의 수비 장군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포위망을 뚫고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역포위를 시도했다. 밤새 백병전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선두에서 직접 싸웠고, 그의 돌격대가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며 폼페이아누스를 전사시켰다. 베로나는 그날 밤 항복했다. 로마로 가는 길이 열렸다.
전투 전야에 관한 기록은 두 가지 판본으로 전해진다.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꿈속에서 방패에 그리스도의 표식을 새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썼다. 에우세비우스는 더 극적인 버전을 남겼다. 행군 중 대낮의 하늘에서 빛의 십자가와 함께 "이 표식으로 승리하라(In Hoc Signo Vinces)"는 문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기록 모두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정리된 것이며, 이 일화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방패에 전례 없는 표식을 새기고 전장에 나섰다는 사실이며, 그 선택이 이후 역사를 바꾸는 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10월 28일은 막센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지 꼭 6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시빌라의 예언서를 펼쳤다. 거기에는 "로마의 적이 오늘 죽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그 적이 콘스탄티누스라고 확신했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에 머물렀다면 장기전을 버틸 수 있었다. 군수 물자는 충분했고, 성벽은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반면 보급이 부족했던 콘스탄티누스야말로 시간에 쫓기는 처지였다. 그러나 신탁은 막센티우스를 성벽 밖으로 불러냈다. 그는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 인근의 삭사루브라 평원에 전열을 펼쳤다. 등 뒤에는 티베르 강이 흘렀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전장에 나타났을 때, 병사들의 방패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두 글자를 결합한 키-로(☧)가 새겨져 있었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경기병이 막센티우스의 중기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면서 판도가 기울었다. 양 측면의 기병이 붕괴되자 보병 전열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친위대만이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퇴로를 찾아 강 쪽으로 몰린 병사들이 밀비우스 다리 위로 쏟아졌다. 막센티우스도 그 혼란 속에 휩쓸렸다. 다리는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그는 티베르 강으로 떨어졌고, 무거운 갑옷에 짓눌려 끝내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신탁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로마의 적이 누구인지를 잘못 읽었을 뿐이었다. 막센티우스의 시신은 강에서 건져져 참수되었으며, 잘린 머리는 로마 시내를 행진한 뒤 카르타고까지 보내졌다. 밀비우스 다리의 승리는 콘스탄티누스를 서방의 단독 지배자로 만들었다.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전통적인 승전 의례를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개선 장군들이 올랐던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방문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는 원로원을 방문하고 정치적 화해를 약속했고, 이에 원로원은 그의 승리를 기념해 개선문을 세웠는데, 그 건축물이 오늘날까지 로마에 남아 있다.
313년에 그가 리키니우스와 함께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제국 내 모든 종교에 관용을 선언했지만, 그 실질적 효과는 기독교에 집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몰수된 교회 재산이 반환되었고, 성직자들은 공적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기독교는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제국의 공식적 보호 아래 놓인 종교로 전환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결정을 두고 후대의 해석은 갈린다. 오랫동안 진실한 개종자였는가, 냉정한 계산가였는가라는 이분법이 논쟁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주류적 시각은 이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는다.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적 전환은 어느 한 순간의 극적인 회심이 아니라, 312년 밀비우스 다리에서 324년 제국 통일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정치적 고려와 종교적 신념이 상호작용하며 진행된 점진적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는 동일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며 박해에 나선 지 불과 10년 만에, 그의 후계자는 동일한 종교를 제국 통합의 도덕적, 행정적 인프라로 선택했다.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의 신화적 권위는 황제 권위의 중심적 상징에서 점차 후퇴했다. 보편적 유일신의 가호를 받는 황제라는 새로운 정통성이 세워졌다. 황제의 명령은 이제 신성한 질서와 결합된 통치 행위로 재해석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결합은 훗날 당시로서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로 이어진다. 황제가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임하는 순간, 교회는 제국 권력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제국 권력에 기댄 교회는, 언젠가 그 권력과 독자성을 다툴 수 있는 위치에도 서게 되었다. 밀비우스 다리의 승리가 열어놓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아니었다. 세속 권력과 종교 권위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는, 유럽 중세 천 년의 구조적 긴장이 그날 강변에서 시작되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동서 제국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사두정 붕괴의 내전이 마침내 종결된 것이다. 그러나 안온한 제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동방을 장악하자마자 그는 제국 전역을 뒤흔드는 신학 논쟁과 마주해야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도나투스파가 정통 교회와 갈라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부활절 날짜를 언제로 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도 지역마다 다른 관행을 고착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제기한 문제,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와 동일 본질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교회를 극심한 분열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이 논쟁은 신학적 문제이기 이전에 정치적 위기였다. 그가 방금 통일한 제국이, 교회의 분열을 따라 다시 균열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서한을 통해 양측의 화해를 종용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결정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나 자신도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다리는 몸이다. 이 무슨 오만한 광기인가."
훗날 전해지는 이 발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콘스탄티누스가 신학 논쟁의 중재자 자리를 처음부터 탐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이 제국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소아시아의 니케아에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소집한 것이다. 참석한 주교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략 300명 내외로 추산되며, 여행 경비는 제국이 부담했다. 물론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회를 선언한 것은 황제였지만, 신학적 논쟁의 방향을 이끌고 결론을 도출한 것은 주교단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과정을 인내심 있게 지켜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합의를 압박했다.
공의회의 결과는 니케아 신조로 귀결되었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라는 선언이었다.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는 단죄되었고, 일부 지도자들은 추방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이후 천 년 넘게 기독교 세계의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그리고 대다수 개신교가 공유하는 교리적 토대로 남아 있다. 공의회는 또한 부활절을 전 교회가 동일한 기준 아래 지키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신학사의 분기점인 동시에 정치사의 분기점이기도 했다. 세속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결론의 집행을 보증한 선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교리 문제를 둘러싼 교회 논쟁에 황제 권력이 개입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구조는 훗날 황제가 교회 질서의 보증자로 개입하는 동방적 통치 모델의 선례로 기능했다.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와 교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 모델을 천 년 넘게 유지했다. 황제는 정통 교리의 수호자였고, 교회는 제국 통합의 정신적 기반이었다. 동방에서 황제와 교회의 관계가 협력과 종속의 긴장 속에서 유지된 반면, 서방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조건이 동시에 형성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부여한 제도적 특권들이 그 씨앗이었다. 성직자에게는 세금 면제와 사법적 특권이 주어졌다. 주교가 세속 법정 대신 교회 법정에서 분쟁을 심리할 수 있는 '에피스코팔리스 아우디엔티아(Episcopalis Audientia)' 제도가 도입되었다. 교회는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유증받을 수 있는 법적 주체로 인정되었다. 이 특권들은 교회를 제국 행정 구조 안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제도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제국에 묶으려 했지만, 그가 부여한 특권은 역설적으로 교회가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니케아 신조의 확정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졌다. 니케아 신조가 보편적 진리로 합의됨에 따라, 기독교는 제국을 민족적·지역적 차이를 넘어서는 신앙의 공동체로 묶어냈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과 라틴어를 쓰는 서방,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한 제국 각지의 신자들이 동일한 신조 아래 묶였다. 제국의 행정적 통일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해도, 신앙의 공동체는 그 경계를 넘어 지속될 수 있었다. 훗날 '기독교 세계(Christendom)'라 불리게 될 초민족적 기독교 공동체 질서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니케아의 해결은 완전하지 않았다. 아리우스주의는 단죄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말년에 아리우스주의 주교들이 복권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했다.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확정한 정통 교리가, 황제의 교체와 함께 다시 흔들렸다. 세속 권력이 교회 교리의 보증자가 되는 순간, 교리는 황제의 신학적 선택에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이 구조적 취약성은 니케아 이후에도 오랫동안 동방 교회를 흔들었고, 결국 서방 교회가 황제로부터 독립적인 교황권을 발전시키는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한 제국 행정의 골격을 이어받아 완성했으며, 동시에 선임자가 실패한 영역에서 독자적인 해법을 찾았다. 그 결과물들은 종교적 업적 못지않게 오랜 수명을 가졌다. 솔리두스 금화는 천 년 넘게 지중해 무역의 기축통화로 기능했고, 군사 구조의 재편은 후기 로마 제국 방어 체제의 표준이 되었으며, 소작농 결박의 법제화는 중세 농노제의 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경제적 유산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화폐 개혁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1년 최고가격령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은화 중심의 화폐 체계도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접근을 택했다. 은화 복원을 포기하고 금화에 집중한 것이다. 309–310년경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솔리두스(Solidus)는 금 1파운드(로마 리브라, 약 327.45g)로 72개를 주조하는 순금화였다. 이 화폐는 국가가 일관된 품질을 보증했고, 그 신뢰는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되었다. 솔리두스는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베잔트(Bezant)로 이어져, 11세기까지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서 국제 결제의 기준 화폐로 기능했다. 단일 화폐가 이토록 긴 신뢰를 유지한 사례는 전근대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솔리두스의 안정은 모든 계층에게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금화의 구매력이 유지되는 동안,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청동 소화폐는 지속적으로 가치가 하락했다. 금화는 부유층의 자산을 보호했지만, 빈민층은 악화되는 소화폐로 거래해야 했다. 당대의 한 저술가는 이 통화 체계가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다. 화폐 개혁의 성공은 그 혜택의 분배라는 측면에서 불균등한 것이었다.
방대한 관료제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토지세와 상인세를 포함한 각종 세금이 강화되면서 지방 경제와 자영농이 압박을 받았다. 개혁이 제국의 행정적 안정을 높이는 동안, 그 비용은 사회 하층으로 전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 구조의 재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방어 체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 출발점은 막센티우스 격파 직후의 상징적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정치의 고질적 병폐였던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를 영구 해산했다. 수백 년간 황제를 암살하고 제위를 좌지우지하며 제국의 혼란을 부추겼던 이 집단의 해체는, 황제 권력의 군사적 기반을 수도 로마에서 분리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어 콘스탄티누스는 군대를 두 층위로 명확히 분리했다. 기동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는 황제 주변에 집결하여 내부 반란이나 외적의 대규모 침입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핵심 전력이었다. 국경 수비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는 변경에 배치되어 소규모 침입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이 이중 구조는 제국 전역에 병력을 고르게 분산시키는 대신, 기동성 있는 중앙 예비대를 유지함으로써 위기에 유연하게 대응하려는 발상이었다.
이 개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기동 야전군의 창설이 방어 효율을 높였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국경 수비대의 전력 약화가 장기적으로 변경 방어를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4세기 후반과 5세기에 이르러 리미타네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 전투 병력보다 국경 지대의 정착 농민에 가까운 존재로 변해갔다. 어느 쪽이든, 이 군사 구조는 고전적 로마 군단 체제에서 후기 고대의 방어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행정 개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독자적인 방향을 추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사 계급에 행정 요직을 집중시킨 것과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326년 다수의 행정직을 원로원 직급으로 격상시키고 기존 기사 계급 관직 보유자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편입했다. 원로원의 실질적 권한은 여전히 제한적이었으나, 구귀족 계층을 제국 행정의 틀 안에 재통합함으로써 기독교화되는 황제 권력에 대한 전통 귀족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기독교적 가치를 법제화한 조치들도 이 시기에 집중되었다. 검투사 경기가 억제되고, 십자가형이 폐지되었으며, 일요일이 예배와 휴식의 날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 조치들은 단순한 종교적 시혜를 넘어, 제국의 공적 질서를 기독교 윤리와 정렬시키려는 방향성을 담고 있었다.
이 시기 가장 장기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은 것은 소작농 결박 정책이었다. 332년 칙령을 비롯한 일련의 법령은 소작농(Coloni)을 경작하는 토지에 법적으로 결속시켰다. 표면적 이유는 조세 기반의 안정이었다. 인구 이동이 잦아지면 세금 징수가 불안정해지므로,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는 것이 행정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단순한 세정 편의를 넘어, 토지와 인적 자원을 고정화하려는 국가 통치 논리의 강화를 의미했다. 콜로니 제도가 중세 농노제의 직접적 기원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다만 자유 농민이 토지에 결박되고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는 과정이 이 시기에 법적으로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은, 고전적 도시 제국에서 토지 기반 행정 국가로의 이행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한층 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끝, 길고 초승달 모양의 내만이 육지 안으로 파고드는 지점에 그리스 식민 도시 비잔티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훗날 금각만(Golden Horn)이라 불리게 될 이 곳은 거친 해협의 급류를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정박지였다. 기원전 7세기, 메가라의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닻을 내렸다. 당시 델포이의 신탁은 그들에게 "눈먼 자들의 도시 맞은편에 터를 잡으라"고 했다. 먼저 건너편 아시아 쪽 해안에 자리잡은 칼케돈의 사람들이 이 탁월한 입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신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잔티움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의 목줄을 쥔 도시로 빠르게 번성했다. 흑해를 오가는 모든 선박은 비잔티움의 성벽 아래를 지나야 했고, 이 도시는 그 통행에서 막대한 부를 거두어들였다.
군사적으로도 이 도시는 매우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고 육지 쪽 접근로도 좁았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비잔티움은 여러 차례 포위를 견뎌냈다. 기원전 340년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이 도시를 오랫동안 포위했을 때도 끝내 성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비잔티움 사람들은 밤에 나타난 밝은 빛이 적의 야간 기습을 드러냈다고 믿었고, 그 기적을 기념해 초승달 상징을 도시의 표지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제국의 평화 속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3세기의 혼란이 닥치면서 이 도시도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전과 약탈이 반복되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는 도시가 철저히 유린되어 메가라 출신의 원래 정착민 혈통이 사실상 끊겼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입지가 가진 힘은 폐허조차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다. 도시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불과 60마일 떨어진 니코메디아에 황제 거처를 정하면서 다시 제국의 핵심 전략 거점으로 부상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이 도시를 포위했다. 그는 성벽을 정면으로 공략하는 대신 성벽을 내려다보는 토루를 높이 쌓아 수비대를 압박했다. 끝내 도시는 항복했고, 콘스탄티누스는 20년에 걸친 내전의 종지부를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찍었다. 승리의 자리에 선 그는 단순히 적의 요새를 접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입지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수도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당초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는 여럿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고향인 나이수스(오늘날의 니시)는 감정적 애착이 있었으나 변경에 너무 가깝고 바다에서 너무 멀었다. 트로이의 옛터인 일리움은 로마가 트로이의 후예라는 신화적 전통에 기댈 수 있었으나, 마땅한 항구가 없었고 흑해 출구를 제어하기에는 위치가 애매했다. 세르디카(오늘날의 소피아)와 시르미움, 테살로니카도 검토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거점이었던 니코메디아는 전략적으로는 충분히 유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이 선택지를 스스로 걷어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시에 자신의 수도를 세우는 것은 선황의 그늘 아래 자신을 두는 일이었다. 게다가 니코메디아는 기독교인들에게 박해의 기억이 깃든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가까이 끌어안으려 한 기독교인들에게 그 도시는 여전히 상처의 이름이었다.
최종 선택은 역시 지정학적으로 탁월한 입지에 위치한 비잔티움이었다. 수개월간 성벽 아래 진을 쳤던 콘스탄티누스는 이 도시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특유의 단호함으로 움직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제는 직접 창 끝으로 땅을 짚으며 새 성벽의 경계를 걸어서 그었다. 수행원들이 그 방대한 규모에 놀라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안내자가 멈출 때까지, 나는 걷겠다." 일화의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콘스탄티누스가 새 도시를 처음부터 압도적인 규모로 기획했다는 사실은, 이 장면이 꾸며진 것이든 아니든 그 본질을 정확히 담고 있다.
324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공식 봉헌되었다. 도시의 설계는 처음부터 '새로운 로마'를 지향했다. 로마를 본떠 7개 구역과 14개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고, 원로원이 별도로 설립되었으며, 시민들에게는 로마 시민과 동일하게 무상 곡물이 배급되었다. 그리스 각지의 조각과 기념물이 새 도시로 옮겨졌다. 히포드롬에는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델포이에 봉헌했던 청동 뱀 기둥이 세워졌고, 훗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도 그곳에 세워졌다. 이교 신들의 조각상들은 신전에서 꺼내어 목욕탕과 원로원 건물을 장식하는 예술품으로 재배치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신상의 머리를 황제의 얼굴로 교체하여 세워두기도 했다. 신성한 의미는 박탈되었지만 장식으로나마 형상은 남았다.
새 도시의 종교적 성격은 분명했다. 전통 신들의 신전 대신 기독교 성당이 도시의 중심을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전신이 되는 교회를 세웠고, 황제의 묘소는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 안에 마련했다. 그러나 새 도시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것이었다. 총대주교의 궁전은 황제의 궁전 바로 옆에 배치되었다. 어쩌면 황제와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황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권위를 발전시키기 어려운 조건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황제가 떠난 로마에서는 정반대의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로마 주교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명했다. 황제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로마 주교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도시의 실질적 구심점으로 부상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갔다. 훗날 교황권이 로마를 거점으로 서방 세계에 독자적 권위를 행사하게 되는 구조적 조건이 여기서 형성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 천 년 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기능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함락될 때까지, 이 도시는 로마의 법통과 기독교의 신앙을 동시에 계승하는 제국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만들어낸 가장 심층적인 변화는 지리적인 것이었다. 제국의 무게중심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했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과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 사이의 문화적, 언어적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 결정은 훗날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고, 서방에서 게르만 왕국들이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며, 동방에서 비잔티움이 독자적인 문명으로 발전하는 경로를 예비한 것이었다.
로마는 더 이상 황제가 사는 도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라는 이름이 가진 권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그리고 훗날 게르만 왕국들의 왕들이 자처한 '로마의 계승자'라는 칭호로, 중세 내내 유럽 정치의 언어 속에 살아남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옮기려 했지만,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로마는 장소에서 이념으로 전환되어 살아남았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 인근의 별장에서 오랫동안 미뤄 온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사도 교회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준비해둔 자리였다. 열두 사도의 기념비 사이에 자신의 석관을 배치한 이 선택은, 그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규정했는지를 마지막으로 말해주었다. 동방 교회는 훗날 그에게 '사도와 대등한 자(Isapostolos, ισαπόστολος)'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는 순탄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에게 제국을 분할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이 붕괴된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게, 혈통의 논리가 다시 한번 제도적 설계를 압도했다. 권력 이양 직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추종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조카들을 포함한 방계 친족 대부분을 학살했다. 콘스탄티누스가 혈통 계승의 원칙을 복원했지만, 그 혈통 안에서의 권력 투쟁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가 그토록 공들여 통일한 제국은 사후 23년 만인 360년대에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정치적 유산은 이처럼 단기적으로는 불안정했다. 그러나 제도적 유산은 달랐다.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하고 정비한 행정 골격, 즉 속주 체계, 민군 분리, 관료제의 위계 구조는 비잔티움 제국이 천 년을 지속하는 행정적 토대가 되었다. 솔리두스는 그가 죽은 뒤에도 수백 년간 지중해 무역을 지탱했다.
종교적 유산의 파급력은 더욱 광범위했다. 니케아 신조는 오늘날까지 기독교 세계의 신앙 고백으로 살아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구축한 황제와 교회의 결합 구조는 두 방향으로 분기했다. 동방에서는 황제교황주의의 모델로 정착했다. 비잔티움 황제는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서 교회와 유기적으로 결합했고, 이 구조는 1453년 제국의 멸망까지 유지되었다.
서방에서는 전혀 다른 경로가 펼쳐졌다. 황제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로마 주교는 점차 서방 기독교 세계의 독자적 권위로 부상했고, 세속 권력과 종교 권위의 긴장은 중세 내내 서임권 분쟁과 같은 형태로 폭발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설계한 단일한 결합 구조가, 동서 분리 이후 전혀 다른 두 문명의 원리로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다. 기독교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물음이 교회 내부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물음에 응답한 이들이 세속을 떠나 광야와 수도원으로 향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제국의 품 안에 끌어들인 바로 그 순간,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도원 운동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훗날 세속 권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학문과 신앙을 지켜내며 중세 유럽 문명의 또 다른 뿌리가 되었다.
서방 문명사의 관점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유산을 바라볼 때, 역설이 하나 있다. 그는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겼지만, 그 결정이 서방에서 새로운 역사를 가능하게 했다. 황제 없는 로마에서 교황권이 성장했고, 교황권은 게르만 왕국들에 기독교를 이식하는 매개가 되었다. 게르만 왕들은 로마의 법통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며 중세 유럽의 정치 질서를 만들어갔다. 샤를마뉴가 800년 교황으로부터 황제 관을 받던 순간, 그는 콘스탄티누스가 열어놓은 경로의 서방적 귀결점에 서 있었다. 기독교 황제라는 통치 이념의 원형은 콘스탄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유럽의 왕들이 통치 권위를 정당화하는 언어로 살아남았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동방을 선택했지만, 그의 선택이 만들어낸 공백이 서유럽의 독자적 정체성을 싹 틔웠고, 이후 유럽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마다 달랐다. 동방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중세 서방은 그를 이상적 군주의 전범으로 삼았다. 르네상스 이후 비판적 사료들이 재발견되면서 그는 냉혹한 권력자의 얼굴로 다시 조명되었다. 장남 크리스푸스를 처형하고 황후 파우스타를 욕실에서 질식사시킨 326년의 사건은, 어떤 서사로도 미화하기 어려운 그늘로 남아 있다. 크리스푸스는 첫 번째 부인 미네르비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밀비우스 다리 전투와 리키니우스와의 내전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은 황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자연스럽게 예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26년 콘스탄티누스는 아무런 공개적 설명 없이 아들을 처형했다. 몇 달 뒤 황후 파우스타도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대에 퍼진 소문은 파우스타가 의붓아들 크리스푸스를 모함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들의 계승권을 위협하는 크리스푸스를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불륜을 뒤집어씌웠다는 이야기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진실을 폭로하자, 이번에는 파우스타가 처형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고대의 필자들은 이 사건을 그리스 비극의 틀로 읽었다. 의붓어머니의 모함으로 파멸한 크리스푸스를 히폴리투스에, 파우스타를 파이드라에 빗댄 것이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마디의 공식 해명도 남기지 않았고, 크리스푸스의 이름은 제국의 기록에서 지워졌다. 기독교 신앙을 제국의 토대로 삼으려 했던 황제가, 아들을 죽이고 아내를 처형한 같은 해에 로마를 떠나 예루살렘을 순례했다는 사실은 이 인물의 내면을 더욱 헤아리기 어렵게 만든다.
현대 역사학은 이 극단적인 평가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다. 진실한 신앙인이었는가 냉정한 계산가였는가라는 질문보다, 그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구조가 이후 역사를 어떻게 규정했는가라는 질문이 더 생산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붕괴하는 제국에 행정적 골격을 부여한 설계자였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그 골격 위에 새로운 문명의 언어를 새겨 넣은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것은 단순한 새 수도가 아니었다. 로마의 법과 제도, 기독교의 신앙과 보편주의,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모순적이기까지 했으나 이는 비잔티움 천 년의 토대가 되었고, 그 모순으로부터 중세 서유럽 정체성이 싹 터올랐다.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것은 돌과 벽돌로 쌓은 도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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