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3)
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 지중해의 해체에서 대서양의 발견까지, 1,200년의 역사 —
CHAPTER 1. 고대 질서의 해체와 중세의 태동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7년 사망하자, 그가 재통합한 제국은 세 아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내전과 암살 끝에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361년 율리아누스 황제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그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가 불과 8개월 만에 사망하자, 364년 판노니아 출신의 군인 발렌티니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동생 발렌스를 동방 황제로 임명했다. 형 발렌티니아누스는 메디올라눔을 거점으로 서방을, 동생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방을 맡았다. 제국을 두 황제가 분담하여 통치하는 이 방식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 이래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형제의 공동 통치는 이역만리의 유라시아 초원에서 몰려오는 치명적인 위험을 앞두고 있었다.
370년대 초반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흑해 북안의 초원 지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일대에 머물던 동고트족(그레우퉁기족)을 공격하였다. 말 위에서 높은 기동력을 활용하며 기마 궁술로 끊임없이 공격하는 유목 기병 전술 앞에서 동고트족은 빠르게 와해되었고, 많은 무리들이 훈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 다음은 도나우 강 이북에 자리 잡고 있던 서고트족(테르빙기족)의 차례였다. 훈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결국 도나우 강을 넘어 로마 제국 영토로 피난을 희망하게 된다.
376년, 서고트족의 족장 프리티게른과 알라비부스는 동방 황제 발렌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충성을 맹세하고 외적의 침입 시 동맹군으로 싸우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기록들은 강기슭에 몰려든 고트족의 규모가 수십만에 달했다고 전하지만, 이 수치는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이 담긴 것으로 현대 역사학은 실제 이주민 규모를 수만 명 수준으로 추산한다. 발렌스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판단의 배경은 실용적이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긴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제국은 늘 병력이 부족했다. 고트족은 오랜 세월 제국의 군사적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막대한 병력 자원이기도 했다. 훈족을 피해 제국에 귀순하는 그들을 포에데라티(foederati), 즉 동맹군으로 편입하면 동방 전선의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이시아와 트라키아 속주를 관할하던 총독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이주해 온 고트족을 지원의 대상이 아닌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황제가 보낸 지원 물자는 착복되었고, 고트족의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로마 관리들이 식량 공급을 빌미로 고트족을 착취했으며, 심지어 개고기를 주면서 아이들을 노예로 넘기게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총독들의 탐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동방 제국의 지방 행정 기강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분노한 족장들이 항의를 위해 모이자, 루피키누스는 연회를 빙자해 이들을 몰살하려 했다. 음모는 실패했고 프리티게른은 동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에 나선 루피키누스의 군대는 첫 교전에서 격파되었다. 이후 약 2년간 고트족은 트라키아를 종횡으로 유린했고,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78년, 동방 전선에 머물고 있던 발렌스는 고트족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선 사산 왕조와의 평화 조약을 통해 동방 전선을 안정시킨 뒤 동방 야전군(comitatus Orientis)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로, 375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제위를 이은 인물—는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선발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내려간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이 고트족 소부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정찰대는 고트 주력의 규모를 약 1만 명으로 보고했다. 마침 그라티아누스가 서방에서 알레마니족을 격파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렌스는 지원군을 기다리기보다 단독으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8월 9일 아침,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 수를 1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8마일을 행군한 끝에 하드리아노폴리스 북쪽 평원에서 로마군은 고트족의 진영과 마주쳤다. 고트족은 짐마차를 원형으로 둘러 방어선을 형성하고, 가족과 재산을 그 안에 숨겨두었다. 프리티게른은 협상을 제안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유가 있었다. 고트족의 기병 주력이 먹이를 구하러 멀리 나가 있었다. 들판에는 불이 질러졌다.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도 식량도 없이 몇 시간을 기다린 로마 병사들이 지쳐가는 동안 협상은 계속 지연되었다. 그 사이 로마군 일부가 명령 없이 돌격을 시작했다. 그 순간, 멀리 나갔던 고트족 기병대가 전장으로 귀환했다.
수천 기의 기병이 대형이 흐트러진 로마군의 측면과 배후를 강타했다. 고트족 기병이 좌익을 덮치며 로마 보병 대열을 안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중장보병의 전투력은 대형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대형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함께 무너졌다. 황제의 근위대, 경보병, 기병, 보조군이 한데 뒤엉키며 점점 좁아지는 공간 속에 압착되었다. 병사들은 서로에게 짓눌려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로마 기병은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전장을 이탈했다. 홀로 남겨진 보병들은 도망칠 수도, 대형을 갖출 수도 없는 채 그 자리에서 도륙당했다. 전투는 학살로 끝났다.
발렌스 황제는 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대대장(tribunus militum) 35명을 포함해 로마군의 3분의 2가 그날 그 들판에서 사라졌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 전투를 기원전 3세기 칸나이 이후 로마 최악의 패배로 기록했다. 그 충격은 병력 손실의 규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 야전군의 핵심이 하루 만에 궤멸되면서 발칸 반도의 방어선이 사실상 무너졌다. 그리고 그 상대는 외부의 강적이 아니라 로마 자신이 국경 안으로 받아들인 이주민 집단이었다.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총독들의 착취가 반란을 불렀고, 황제의 공명심이 전투를 서두르게 했으며, 전장에서는 군기가 무너졌다. 단 하나의 실수가 아니라, 여러 실패가 겹쳐 빚어진 재앙이었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이후 로마는 이민족들에 대한 군사적 우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제국과 이민족 사이의 역학 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승리한 고트족은 곧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격했다. 트라키아 일대를 유린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까지 밀려든 그들은 마침내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공격은 시작되지 못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성벽과 그 안에 담긴 도시의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 결국 고트족은 공성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약 40년 만에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심지어 훗날 난공불락의 명성을 얻게 되는 그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2세 성벽이 건설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안심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발스 황제의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이후 동방 군대의 지휘 체계가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다뉴브 전선 경험을 가진 장군 가운데 선택 가능한 인물이 많지 않았다. 이때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히스파니아에 은거 중이던 장군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였다. 그의 아버지 대(大) 테오도시우스는 당대 손꼽히는 야전 지휘관이었다. 브리타니아 원정과 북아프리카의 반란 진압에서 잇달아 공을 세웠고, 아들 테오도시우스는 그 원정에 동행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아프리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직후인 376년 전후, 대 테오도시우스는 카르타고에서 처형되었다. 공식적인 죄목은 없었다. 새 황제를 둘러싼 궁정 권력 다툼 속에서 군사적 명성이 지나치게 높은 장군이 위험 인물로 지목된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아들 테오도시우스는 그 직후 히스파니아로 물러났다. 결국 그라티아누스는 그를 다시 불렀다. 379년 1월, 그는 동방 황제로 선포되었다.
테오도시우스가 물려받은 것은 황제의 자리만이 아니었다. 궤멸된 야전군, 무너진 발칸 방어선, 그리고 트라키아를 여전히 유린하고 있는 고트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느 것도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군대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징병에 나섰다. 조치는 광범위하고 강제적이었다. 전통적 병역 대상인 자유 시민은 물론이고 농민, 광부, 심지어 소작농까지 징집 대상으로 삼았다. 탈영병을 숨겨준 자를 처벌하는 칙령이 잇달아 내려졌다. 그러나 이 무리한 징병에도 불구하고 군대 재건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문제는 병사의 수가 아니라 질이었다. 급조된 병사들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격파한 고트족 전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도박은 통하지 않았다. 380년 야전에 나섰으나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테살로니카로 물러나야 했다.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의 승리가 요행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결과였다.
테살로니카에 머무르는 동안, 테오도시우스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전쟁으로 고트족을 단기간에 제압하는 것은 당시의 로마 군사력으로는 어려웠다. 해법은 협상이었지만, 그에 앞서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 대규모 야전을 피하고 소규모 약탈대를 각개 격파하는 한편, 고트족 주력이 집결해 있을 때는 보급을 차단하여 소모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소모전 속에서 고트족 내부에서도 점차 협상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382년 가을,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이전의 어떤 선례와도 달랐다. 고트족은 도나우 강 이남의 트라키아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았다. 대신 그들은 포에데라티(foederati), 즉 동맹군으로서 로마 군대에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로마가 이민족 집단과 맺어온 군사 동맹의 연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전의 포에데라티 협정에서 이민족 병사들은 대체로 로마 군대에 편입되어 로마 지휘 체계 아래 복무했다. 그러나 382년 조약은 성격이 달랐다. 고트족은 자신들의 족장을 유지한 채 부족 단위로 복무했으며, 전투에서는 로마 장군의 전략 지휘 아래 있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병력을 이끌었다. 정착지 내부에서는 전통적 관습이 상당 부분 유지되었고 로마 행정의 통제도 비교적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제국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일정한 자율성을 지닌 군사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의 군대에는 약 4만 명에 이르는 고트 병력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토지와 보급을 포함한 유리한 조건 아래 복무하며 제국 야전군의 중요한 전력이 되었다.
황제의 정책을 지지했던 연설가 테미스티오스는 이 조약을 야만인을 농부이자 병사로 바꾸어 제국 사회 안으로 편입시킨 성과로 칭송했다. 반면 훗날 5~6세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역사가 조시무스는 훨씬 냉담하게 이를 평가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가 고트족을 제국의 군사 구조 속에 완전히 통합하기보다는 그들의 집단적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제국의 통치 원칙을 스스로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물론 조시무스는 이 조약 이후 전개된 역사적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 로마 군대에 복무하기 시작한 고트족 전사 집단 가운데에는 훗날 서고트 왕이 되는 알라리크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395년 이후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마침내 410년 로마를 약탈했다.
이 조약은 선택이라기보다 현실이 강요한 타협에 가까웠다. 382년 당시의 로마는 군사력으로 고트족을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의 불가피함은 결과를 합리화해주지는 않는다. 제국 영토 안에 집단적 자율성을 지닌 무장 공동체를 정착시키는 방식은 이후 5세기 동안 점차 확대되었다.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이 차례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국 영토 안에 자리 잡았고, 포에데라티 체제의 확대는 로마 시민 중심의 전통적인 군단 체제를 서서히 변화시켰다. 4세기 말에 이르면 야전군의 상당수 병력은 이미 로마 시민병이 아니라 게르만 출신 전사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장군들이 서방 제국의 군사 권력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였다.
이처럼 군사력의 중심이 점차 황제의 직접 통제에서 강력한 이민족 군사 지휘관들에게로 이동해 가는 과정은 5세기 서로마 제국 정치 구조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382년의 고트족 정착 협정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새로운 고트 지도자 아타나리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사건이다. 카르파티아 지방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 남하한 그는 황제의 초청을 받아 수도에 입성했다. 고트 역사가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타나리크는 도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거대한 성벽,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파, 도열한 정예 병사들, 항구를 가득 채운 곡물 수송선들. 그는 감탄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과연 황제는 지상의 신이다. 그에게 손을 드는 자는 스스로 피로 그 죄를 치를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를 정중히 예우했고, 아타나리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황제는 그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 장면은 382년 체제가 한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조건을 잘 보여준다. 고트족이 로마의 위세에 압도되고, 로마에 대한 경외감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이 불안정한 균형은 그럭저럭 잘 작동했다.
테오도시우스가 즉위한 379년, 제국의 종교 지형은 복잡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보호 아래 두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를 확정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 정통성은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고,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심지어 전통 로마 신앙의 복원을 시도했다. 발렌스는 다시 아리우스주의로 기울었다. 반세기 동안 황제가 바뀔 때마다 제국의 공식 종교 노선도 흔들렸다. 테오도시우스가 즉위했을 때 많은 교구들이 여전히 아리우스주의 주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도시우스의 개인적 신앙 배경은 중요한 변수였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서방 출신이었다. 히스파니아에서 태어나 자랐고, 서방 교회의 니케아 교리 전통 안에서 성장했다. 380년 초, 그가 테살로니카에 머물며 중병을 앓는 동안 테살로니카 주교 아스콜리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는 관행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도 그랬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회복 후 곧바로 종교 정책에 강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받은 세례가 그를 바꾸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품고 있던 신앙적 확신이 회복과 함께 행동으로 터져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후의 행보는 일관되고 단호했다.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는 공동 황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함께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포했다. 칙령의 핵심은 명확했다.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신앙만이 제국의 유일한 정통 신앙이며 이를 따르는 자만이 참된 기독교인으로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이 칙령은 콘스탄티누스 이래 황제들이 기독교를 우대해온 흐름의 연장이었지만, 성격은 달랐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보호하고 장려했다면,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리를 정통으로 확인하고 그 외의 신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 칙령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그 즉각적 효력보다 법적 선례에 있었다. 이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를 제국의 정통 신앙으로 법률로 선언한 첫 사례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결정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테살로니카 칙령은 황제가 특정 신앙을 제국의 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 선례는 이후 수세기에 걸쳐 이단 탄압과 이교 제한 입법의 중요한 법적 근거로 반복적으로 원용되었다.
381년,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동방 각지의 주교 150여 명을 소집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반세기 넘게 지속되자, 이를 최종적으로 종결하기 위한 공의회였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이 신뢰하던 신학자이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였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공의회를 주도했다. 아리우스파는 재차 단죄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이단 교리들이 공식적으로 배척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동방정교회, 대다수 개신교가 공유하는 신앙 고백의 토대가 이 공의회에서 확정된 것이다.
공의회는 교리 문제뿐 아니라 교회 내부의 위계 질서도 다루었다. 특히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 지위를 둘러싼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공의회는 황제가 거주하는 수도라는 이유를 들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로마 다음의 명예로운 지위를 부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높은 권위를 유지해온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위상을 넘어서는 조치였다. 로마 교회는 이 결정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동서 교회 관계에서 중요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법령과 현실의 간극은 제국 내부에서도 드러났다. 테오도시우스가 382년 조약으로 제국 안에 정착시킨 바로 그 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를 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중반 아리우스주의 선교사 울필라스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고트족은 이단으로 규정된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신앙을 가진 자치적 무장 집단이 제국 영토 안에 공존하는 이 모순은, 테오도시우스가 만들어낸 두 가지 정책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아리우스주의 신앙은 제국 영토 안에서도 수십 년을 더 버텼고, 이교의 쇠퇴 역시 테오도시우스의 법령이 단번에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4세기 전반에 걸쳐 진행된 점진적 과정의 일부였다.
이교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면서 고대 세계의 상징적 기관들도 하나씩 문을 닫았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세계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도 테오도시우스 시대를 전후해 사실상 기능을 멈추었다. 델포이 신전은 그 이전부터 계속 쇠락해 오고 있었으며, 362년 황제 율리아누스의 사절이 신탁을 요청하자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으로 전해진다.
왕에게 전하라, 정교히 세워졌던 궁전이 이제 땅에 무너졌다고.
포이보스(아폴론)는 더 이상 거처를 갖지 못하고, 예언의 월계수도 사라졌다.
말하던 샘도 이제 없으며, 신탁을 전하던 물 또한 이미 침묵했느니라.
393년에는 올림피아 경기가 중단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1,200년 가까이 이어져온 이 축제는 제우스에게 바치는 종교 행사이기도 했다. 이교 의식을 금지하는 칙령 아래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가장 오래된 살아 있는 전통도 이렇게 이 시기에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보호 아래 두었다면,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 기독교를 제국의 유일한 정통으로 법제화했다. 이 두 단계를 거쳐 로마 제국은 비로소 법적 의미에서 기독교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법적 틀의 확립이 곧 황제의 도덕적 무결함을 보증하지는 않았다. 제국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통합하려 한 황제는 머지않아 충격적인 학살 사건의 주모자로 기록되게 된다.
그 사건은 390년 봄에 찾아왔다. 테살로니카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도시에 주둔하던 고트족 출신 군사령관 보테리크가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정확한 경위는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폭동의 배경에 보테리크가 체포한 전차 경주 선수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다. 당시 전차 경주는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 비견될 만큼 대중적 열기가 뜨거웠고, 인기 선수는 일종의 민중 영웅이었다. 그 영웅을 이민족 출신 군사령관이 가두었다는 소식이 도시를 들끓게 만들었다. 어떤 경위였든 결과는 같았다. 황제 직속의 군사령관이 속주 민중의 손에 죽었다.
테오도시우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가혹했다. 황제는 테살로니카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보복을 명령했다. 도시의 경기장으로 시민들이 소집되었고, 그곳에서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당대 사료들이 전하는 희생자 수는 7,000명에서 많게는 1만 5,000명에 달했다고 기록한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테오도시우스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단호했다. 황제는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인 참회를 수행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당대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교였다. 그러한 암브로시우스가 황제에게 도덕적 책임을 공개적으로 물은 것이다. 마침 테오도시우스는 찬탈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보호하기 위해 밀라노에 머물며 직접 통치를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수용하지 않았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일개 주교의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황제의 자줏빛 예복을 벗고 참회자의 옷을 입었다. 수 개월에 걸친 공개 참회를 수행한 끝에 390년 말 성찬에 복귀했다. 이 소식은 제국 전역에 퍼졌다.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극적인 장면 때문만이 아니다. 사건의 구조가 전례를 만들었다. 황제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교회가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황제가 그 판단에 복종한 것이다. 황제의 세속 권력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참회를 마친 뒤에도 여전히 제국을 통치했고, 이후 두 차례의 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황제라는 존재가 교회의 도덕적 권위 앞에서 한 명의 신자로서 책임을 지는 구조가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암브로시우스 자신도 이 사건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 설교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존재이지, 교회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 명제는 이후 서방 교회가 세속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동방에서 황제와 교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황제교황주의의 구조가 발전한 것과 달리, 서방에서는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갈림길에 테살로니카 학살과 암브로시우스의 요구가 있었다.
390년의 이 사건은 당시에는 황제와 주교 사이의 개인적 충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 사이의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약 700년 뒤인 1077년, 교황에게 파문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덮인 카노사 성 앞에서 사흘 동안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면을 기다렸다. 그 장면의 가장 오랜 역사적 선례가 바로 이 테오도시우스의 참회였다.
테오도시우스의 치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전의 연속이었다. 그가 동방 황제로 즉위한 379년부터 사망하는 395년까지, 제국의 서방에서는 찬탈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매번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이들을 진압해야 했다. 앞서 살펴본 고트족 협상과 종교 입법을 병행하면서도, 그는 제국의 정치적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투쟁을 쉬지 않았다.
첫 번째 위기는 383년에 찾아왔다. 브리타니아 주둔군이 스페인 출신 장군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막시무스는 갈리아로 진격하여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를 격파하고 살해했다. 테오도시우스에게 그라티아누스는 단순한 공동 황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고트족과의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동방의 군사력이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막시무스를 사실상 서방의 공동 통치자로 인정하는 현실적 타협을 선택했다.
전면 충돌은 388년에야 이루어졌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어린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몰아내자, 테오도시우스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동방의 병력을 이끌고 서방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다. 테오도시우스의 군대는 판노니아에서 막시무스의 주력을 격파했고,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5년 만에 서방이 회복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후 수년간 메디올라눔에 머물며 서방 정치를 직접 관장했다. 앞서 살펴본 테살로니카 학살과 암브로시우스와의 충돌도 바로 이 체류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392년, 갈리아에서도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명목상의 군주였다. 실질적인 군사 권력은 프랑크족 출신 장군 아르보가스테스의 손에 있었고, 황제는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르보가스테스에게 해임장을 보냈다. 아르보가스테스는 그 자리에서 서한을 찢어버렸다. 자신의 권한은 황제가 아닌 테오도시우스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므로, 황제 혼자서는 이를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격분한 발렌티니아누스는 칼을 뽑아 아르보가스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가까스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황제와 장군 사이의 갈등은 그렇게 봉합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공식 발표는 자살이었지만, 아르보가스테스가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즉각 퍼졌다.
아르보가스테스는 곧 로마 수사학자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에우게니우스 본인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아르보가스테스와 그 주변의 일부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전통 로마 신앙에 우호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영향 아래 로마의 이교 귀족 세력은 다시 정치적 공간을 확보했고, 한동안 전통 제의와 신전 활동이 보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협상 시도를 거쳐 394년 봄 동방 전군을 이끌고 서방 원정에 나섰다. 결전은 9월 5일과 6일, 오늘날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국경 지대를 흐르는 프리기두스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후대에 오랫동안 기독교와 이교 세력의 최후 결전으로 묘사되어왔다. 에우게니우스 진영이 로마 원로원의 이교도 귀족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전투 후 테오도시우스의 승리를 기적으로 선포하면서 이 구도가 굳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에우게니우스는 이교도가 아닌 기독교인이었고, 테오도시우스의 군대에도 이교를 믿는 게르만 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의 본질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제국 통치권을 둘러싼 정치적 내전이었다.
전투 첫날은 테오도시우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선봉을 맡은 고트족 포에데라티 부대가 에우게니우스 측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고트족 부대를 이끌던 인물이 훗날 로마를 약탈하게 되는 알라리크였다. 첫날의 패배로 진영 안에 동요가 일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밤새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둘째 날, 상황이 반전되었다. 알프스에서 불어온 강풍—보라(Bora)—이 에우게니우스 측을 향해 불어닥쳤다. 화살과 투창이 방향을 잃었고, 대열이 흐트러졌다. 테오도시우스의 군대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우게니우스의 진영은 무너졌고, 에우게니우스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아르보가스테스는 도주했다가 며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리기두스 강 전투의 승리로 테오도시우스는 394년 로마 제국 전체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60년 만에 제국이 다시 한 인물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1을 넘기지 못했다.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는 메디올라눔에서 사망했다. 향년 마흔여덟이었다. 사인은 수종(水腫),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심부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죽기 전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었다. 동방은 열여덟 살 안팎의 아르카디우스에게, 서방은 열 살의 호노리우스에게 돌아갔다. 두 아들 모두 통치 능력을 갖추기에는 너무 어렸다. 실질적 권력은 동방에서는 관료 집단이, 서방에서는 반달족 출신 장군 스틸리코가 장악했다.
이 분할이 영구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의 분담 통치는 이미 한 세기 넘게 반복되어온 관행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도,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형제 분할도 제국의 단일성을 전제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395년의 분할도 표면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테오도시우스 이후 로마의 동방과 서방은 다시는 단일한 황제 아래 온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서방은 이후 80년을 버티다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마지막 황제를 폐위당하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방은 천 년을 더 이어갔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두 제국이 전혀 다른 운명을 걷게 된 분기점이 바로 395년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은 몇 안 되는 로마 황제 중 하나다.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재앙을 수습하고, 제국을 두 차례 재통합하고, 기독교를 제국의 법적 토대로 확립한 그의 업적은 분명 그 칭호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룬 것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향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고트족과의 화해는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로 이어졌고, 기독교 제국의 확립은 이단으로 규정된 믿음을 가진 게르만족이 제국 영토 안에 자리 잡는 모순과 한 동안 공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룬 제국의 통합은 그가 눈을 감는 순간 영구적 분열로 굳어졌다. 그는 제국을 다시 한 번 하나로 묶었지만,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마찬가지로 그 통합을 지속시킬 구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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