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리크와 영원한 도시의 함락

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4)

by 자유학예가

인물로 살펴본 유럽의 탄생

— 지중해의 해체에서 대서양의 발견까지, 1,200년의 역사 —

CHAPTER 1. 고대 질서의 해체와 중세의 태동


엇갈린 두 군인


394년 9월, 알프스 동쪽 기슭의 프리기두스 강 유역에 두 개의 군대가 마주 섰다. 한쪽에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끄는 제국 원정군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장악한 서방의 참칭 황제 에우게니우스와 그의 실질적 배후인 프랑크족 출신 장군 아르보가스테스의 연합 병력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고트족 포에데라티 부대를 선봉에 세웠다.


전투 첫날은 참혹했다. 에우게니우스 측의 방어선은 견고했고, 선봉에 나선 고트족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전사자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전해진다. 이틀째, 알프스에서 보라(Bora)라고 불리는 강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은 에우게니우스 진영을 향해 정면으로 몰아쳤고, 화살과 투창이 방향을 잃었다. 테오도시우스의 군대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우게니우스는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아르보가스테스는 며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내전의 끝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처음으로 제국 전체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승전의 분위기 속에서 불편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로마 측 일부에서는 고트족이 크게 희생된 것은 로마에게 손해가 아니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일부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대 로마인들이 고트족 포에데라티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바로 그 전장에, 이후 20년 가까이 서로의 운명을 얽어맬 두 이민족 군인이 있었다.


한 명은 스틸리코였다. 반달족 기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테오도시우스의 신임을 얻었다. 테오도시우스는 그에게 황실의 조카딸 세레나를 배필로 주었다. 황제의 혈통과 맺은 이 결혼은 스틸리코를 제국 권력의 핵심부로 끌어올렸다.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그는 주요 지휘관 가운데 한 명으로 활약했고, 큰 명성을 얻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임종 직전 그를 어린 아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스틸리코는 제국 서방의 실질적 최고사령관이 될 터였다. 그의 아버지가 야만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당분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한 명은 알라리크였다. 도나우 강 하구의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그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의 유년은 382년 포에데라티 조약이 만들어낸 세계, 즉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 살지만 로마 시민이 아닌 고트족의 세계였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로마 군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가 원한 것은 명확했다. 고트족을 이끌 정당한 군사 직위,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즉 로마 군사령관의 자리였다. 프리기두스에서 그는 테오도시우스를 위해 싸웠고, 동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전투가 끝난 뒤 그가 기대한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고트족의 희생에 부합할 만한 직위를 부여해달라는 요청은 거부되었다.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가 메디올라눔에서 사망했다. 향년 마흔여덟이었다. 그는 죽기 전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었다. 동방은 열여덟 살 안팎의 아르카디우스에게, 서방은 열 살의 호노리우스에게 돌아갔다. 두 아들 모두 아직 통치자로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질적 권력은 서방에서는 스틸리코가, 동방에서는 루피누스가, 그리고 루피누스가 암살된 뒤에는 환관 출신의 고위 관료 에우트로피우스가 장악했다. 두 궁정은 곧 서로를 견제하며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경쟁에서 동서 궁정은 상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알라리크를 자신에게 유리한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 알라리크를 압박할 때는 적으로, 필요할 때는 동맹군으로 번갈아 대했다. 그러나 두 궁정 모두 알라리크와 고트족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 즉 제국 안에서의 정당한 지위와 안정적인 정착지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 모순 위에서,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의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포에데라티 체제의 모순


테오도시우스가 죽고 제국이 분열되자, 알라리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프리기두스의 경험은 그에게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로마는 고트족을 병력으로는 필요로 하면서도, 그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줄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트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이 시점에서 알라리크가 자신의 부족민들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전한다. "남의 밑에서 게으르게 복무하기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리의 왕국을 찾자." 이 발언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395년 무렵 그는 고트 전사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로마 군대와 결별했다. 이 사실은 프리기두스 이후 누적된 불만이 임계점을 넘었음을 보여준다.


알라리크가 원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했다. 마기스테르 밀리툼, 즉 로마의 공식 군사령관 직위와 고트족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땅이었다. 이 요구는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알라리크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고트족들이 로마를 위해 싸우고 죽은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었다. 이 인식의 간극이 이후 15년간 반복될 충돌의 근본 원인이었다.


395년 초, 알라리크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휩쓸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선봉을 맡아 막대한 희생을 치른 고트족에게 약속된 보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면서 제국은 동서로 갈라졌고, 두 어린 황제의 궁정에서는 루피누스와 스틸리코가 각자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의 방어 체계는 사실상 공백 상태였다. 동로마의 주력군은 소아시아에 머물고 있었고, 서방 병력은 이탈리아에 묶여 있었다. 알라리크의 군대는 전사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부족 공동체 전체가 함께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총인구가 10만에 가까웠다고 추정되는 이 집단을 유지하려면 식량과 급료와 정착지가 필요했다. 로마가 이를 제공하지 않는 이상, 약탈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스틸리코는 즉각 서방의 병력을 이끌고 발칸으로 진격했다. 그는 테살리아 어딘가에서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당대의 사료, 특히 스틸리코의 궁정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동방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궁정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당시 동방의 실권을 쥔 루피누스는 스틸리코의 발칸 진출을 서방이 동방의 영토에 개입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알라리크를 제거하는 것보다 스틸리코를 견제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급한 문제였다. 동방 궁정은 당시 스틸리코 휘하에 프리기두스 전투 당시 동방에서 파견된 원정군 일부가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워 병력 반환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고 동방 영토에서 군사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동서 제국 사이의 내전을 감수하는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결국 철수했고, 알라리크는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듬해 396년,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내려갔다. 테르모필레의 협로는 어렵지 않게 돌파되었다. 오래전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데스가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냈던 그 산길은 이번에는 수비대 하나 없이 열려 있었다. 알라리크의 군대가 남하하자 그리스의 도시들은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알라리크는 공성 준비 대신 소수의 수행원만 이끌고 성문 앞에 나타나 입성을 요청했다. 아테네 당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도시 안에서 목욕을 즐기고 시 지도자들이 차린 만찬에 참석했다. 며칠 뒤 알라리크는 아무런 약탈 없이 아테네를 떠났다. 이 장면을 전하는 사료는 단편적이고 일부는 후대의 윤색이 섞여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든 과장이든, 아테네 일화는 알라리크를 단순한 약탈자로 보는 시각에 균열을 낸다. 코린트와 아르고스, 스파르타는 그 관용을 누리지 못했다. 세 도시는 차례로 약탈당했다.


스틸리코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개입했고, 이번에도 알라리크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정적 타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방 궁정의 압력과 군수 문제가 겹쳤고, 알라리크는 다시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 패턴은 훗날 스틸리코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알라리크를 두 번이나 손아귀에 넣고도 놓아준 장군이라는 비판이었다.


동방 궁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97년, 루피누스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에우트로피우스는 알라리크에게 일리리쿰 지역의 로마 군사 지휘권을 부여했다. 금과 곡물의 공급도 보장되었다. 불과 2년 전까지 반란 지도자였던 알라리크가 로마의 공식 장군이 된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에우트로피우스가 '북방의 늑대들'을 제압한 공로로 개선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동방 궁정은 알라리크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 위협의 방향을 서방으로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라리크는 그 역할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협상 위치를 계속 다지고 있었다.


동방 궁정의 계산은 오래 가지 않았다. 399년 에우트로피우스가 실각하자 동방 궁정의 정책도 바뀌었다. 새로운 동방 실권자들은 알라리크의 직위를 폐지하고 일리리쿰의 관할권을 서방으로 이관함으로써 이 문제를 스틸리코에게 떠넘기는 동시에, 그가 동방 정치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했다. 알라리크는 다시 공식 지위를 잃었고, 보급 근거도 사라졌다. 두 궁정 사이에서 번갈아 활용되고 번갈아 버려지는 이 패턴은 이후에도 반복된다.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섬멸하지 않은 결정을 우유부단함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알라리크의 고트군을 동방과의 냉전에서 활용하거나, 갈리아의 찬탈자 콘스탄티누스 3세를 제압하기 위한 필수적인 군사 자산으로 보존하려 했다. 당시 서방 로마군은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이후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라다가이수스의 침공으로 이탈리아 본토까지 위협받는 등 가용 전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섬멸하여 전력을 소모하기보다, 그를 서방 야전군의 동맹으로 포섭하여 전략적 협공을 수행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산이 스틸리코에게 섬멸 대신 협상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다. 직위를 박탈당하고 서방으로 떠넘겨진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와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01년, 알라리크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밀라노가 위협받자 호노리우스는 황급히 라벤나로 피신했다. 당시 라인과 알프스 변경의 방어 문제를 처리하고 있던 스틸리코는 라에티아에서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부활절에 기습을 감행, 폴렌티아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하고 그의 가족과 축적한 재화를 빼앗았다. 이어진 베로나 전투에서도 스틸리코는 승리했다.


패배의 충격은 컸다. 폴렌티아에서 가족을 빼앗기고 재화를 잃은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고, 베로나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사료는 이 시점에서 알라리크가 그의 부하들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알라리크는 철수하지 않았다. 두 번의 패배 이후에도 그는 이탈리아에 머물며 협상 압박을 이어갔다. 스틸리코는 이번에도 섬멸 대신 철수 기회를 주었다. 알라리크가 버티는 한 그 병력은 여전히 활용 가능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알라리크는 판노니아로 물러났다.


알라리크가 판노니아로 물러난 뒤 잠시 소강 상태가 찾아왔다. 그러나 스틸리코에게 숨을 고를 시간은 많지 않았다. 405년,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대규모 게르만 연합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스틸리코는 가까스로 이들을 포위하여 굶주림 끝에 항복하게 만들었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한 뒤 살아남은 전사 1만 2천 명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했다. 위기는 막았지만, 이탈리아 방어에 전력을 집중하는 동안 라인 강 변경은 사실상 비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던 군대가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옹립하고 갈리아로 건너오면서 라인 강 방어를 담당하던 병력이 내부 권력 다툼에 흡수되어버렸고, 이 혼란이 변경 방어 체계 전체를 무너뜨렸다. 406년 12월 31일, 반달족과 알란족, 수에비족의 연합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넜다. 라인강 방어선이 꿇린 것이다. 스틸리코의 정치적 입지는 이 재앙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라인 강 붕괴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알라리크가 다시 움직였다. 407년, 그는 판노니아에서 이탈리아 국경 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며 금 4천 파운드를 요구했다. 스틸리코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이를 지불했다. 바로 그해, 호노리우스는 로마에서 마지막 개선식을 거행했다. 고트족의 위협을 돈으로 사들인 직후에 승리의 월계관을 쓴 셈이었다. 원로원 의원 람파디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굴종의 협약이다(Non est ista pax, sed pactio servitutis)." 그 분노는 알라리크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이나 알라리크를 놓아준 스틸리코, 그리고 이제 돈으로 위협을 사들이는 스틸리코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포에데라티 체제의 모순은 이제 더 이상 감추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민족 병력에 의존하면서도 그들에게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지 못하고, 위협이 되면 돈으로 달래고 기회가 생기면 동맹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누적시키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여전히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위를 원했고, 고트족은 여전히 정착지를 원했다. 그리고 로마는 여전히 그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로마의 자해


408년 봄, 스틸리코의 정치적 입지는 이미 위태로운 상태였다. 라인 강 붕괴의 책임론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동방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계자는 일곱 살의 테오도시우스 2세였다. 스틸리코는 어린 동방 황제의 후견 문제에 개입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알라리크에게 공식 직위를 부여하여 군사적으로 활용하려는 구상도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그의 적들에게 먼저 포착되었다.


호노리우스의 궁정에는 스틸리코를 오래전부터 경계해온 세력이 있었다. 그 중심에 올림피우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스틸리코가 동방 황제의 후견 문제에 개입하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의혹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스틸리코가 반달족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혈통이 이 공세의 핵심 재료였다. 야만족의 피를 가진 자가 제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며, 그 야만족 혈통이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의혹이었다.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두 번이나 놓아주고 돈으로 달랬다는 사실이 이 서사에 설득력을 더했다.


408년 8월 13일, 티키눔(오늘날의 파비아)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다. 올림피우스의 추종자들이 주도한 이 쿠데타에서 스틸리코의 측근 고위 장교 여러 명이 살해되었다. 스틸리코는 당시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티키눔 밖에 있었다. 폭동의 소식을 들은 그는 볼로냐로 물러나 그를 따르던 장수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부하들의 주장은 단호했다. 아직 충성스러운 병력이 남아 있고 반격할 시간도 있으니, 올림피우스의 쿠데타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이를 거부했다. 사료는 그 이유를 단일하게 전하지 않는다. 당시 그는 여러 제약 속에 놓여 있었다. 호노리우스가 올림피우스 세력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고, 반달족 출신이라는 혈통 문제로 정치적 정당성도 취약했다. 병력 면에서도 열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에 나선다면 황제의 묵인 없이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만드는 셈이 될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반격을 포기했고, 대신 라벤나로 가서 호노리우스를 직접 알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결국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 스틸리코의 오랜 부하 장수 사루스가 스틸리코 진영을 공격했다. 그가 왜 이 시점에 이런 선택을 했는지 사료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오랜 개인적 원한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있고, 올림피우스 측과 미리 내통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느 쪽이든 이미 불안정했던 스틸리코의 군사적 기반은 이 사건으로 사실상 붕괴했다.


스틸리코는 교회로 피신했다. 올림피우스의 사자들이 찾아와 황제의 이름으로 신변 안전을 약속했다. 스틸리코는 교회 밖으로 나왔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408년 8월 22일,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아들 에우케리우스도 곧 뒤를 따랐다. 수십 년간 제국 서방의 군사력을 지탱해온 인물의 최후는 그렇게 허무했다. 기번은 스틸리코야말로 당대 로마가 보유한 가장 유능한 군사령관이었으며, 그를 제거한 것은 사실상 서방 제국의 방어 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평가했다.


스틸리코의 처형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이 더 치명적이었다. 올림피우스의 숙청이 진행되는 동안, 이탈리아 각지에 주둔하던 로마 병사들이 고트족 포에데라티의 가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학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명령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사료마다 다르게 전한다. 분명한 것은 그 결과였다.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고트족 전사들이 가족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분노한 그들은 알라리크에게 합류했다.


당대의 기록은 이때 알라리크에게 합류한 고트 전사의 수를 약 3만 명으로 전한다. 이들은 단순한 이탈 병력이 아니었다. 스틸리코 아래에서 훈련받고 이탈리아 지형을 손바닥처럼 아는 전사들이었다. 로마가 수십 년에 걸쳐 포에데라티 체제로 키워온 군사력이, 로마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적의 전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스틸리코를 제거한 올림피우스의 새 정권에는 이 병력을 대체할 어떤 군사적 준비도 없었다. 사료는 당시 궁정이 스틸리코의 지지자를 색출하는 데만 몰두했을 뿐, 이탈리아 방어를 위한 어떤 실질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일련의 사건이 함축하는 바는 명확하다. 410년 로마 함락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조건은 알라리크의 군사력이 아니라 로마 내부의 선택들이었다. 스틸리코를 제거한 것, 고트 용병 가족을 학살한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 외부의 적이 성문을 두드리기 전에, 로마는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단을 해체하고 있었다.


800년 만의 로마 함락


스틸리코가 처형되고 고트 용병 가족 학살이 벌어진 그해 가을,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그러나 알프스를 넘기 전에, 로마에서는 성벽 밖에서 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또다른 자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스틸리코를 무너뜨린 논리, 즉 내부의 배신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공포와 분노가 이제 그의 가족에게로 향했다. 스틸리코의 아내 세레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조카딸로, 로마 최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스틸리코가 처형된 직후, 원로원은 세레나가 알라리크와 내통하여 로마를 넘겨주려 한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근거는 없었다. 당시 로마에 머물고 있던 호노리우스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조차 처형에 동의했다. 원로원의 결의는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세레나는 교살되었다.


알라리크의 수중에는 이제 3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다. 그는 라벤나를 우회했다. 습지로 둘러싸이고 항구를 가진 라벤나는 공성으로 함락시키기 어려운 요새 도시였다. 호노리우스는 그 안에서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알라리크의 목표는 라벤나가 아니었다. 408년 9월, 그의 군대는 로마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라리크는 성벽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티베르 강을 봉쇄했다. 강을 통해 들어오는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도시는 빠르게 기근에 빠져들었다. 원로원이 협상 대표를 보냈다. 사절단은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협박에 가까운 말을 꺼냈다. 도시 안의 시민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라는 암시였다. 알라리크는 웃으며 답했다. "건초가 많을수록 베기 쉽지." 사절단의 얼굴이 굳었다. 한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겠소?" 알라리크의 대답은 짧았다. "목숨." 그 한 마디가 사실상 협상을 결정지었다. 원로원은 도시를 지키는 대가로 막대한 금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금 5천 파운드, 은 3만 파운드, 비단 4천 벌, 붉게 염색한 가죽 3천 장, 후추 3천 파운드였다고 전해진다. 알라리크는 또한 로마 안에 억류되어 있던 고트족 노예 수만 명을 해방시켰다. 첫 번째 포위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협상의 핵심은 금품이 아니었다. 알라리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전히 같았다.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위와 고트족의 정착지였다. 체제의 파괴가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의 공식적 인정이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 황제와 라벤나 조정은 야만인 수장에게 제국의 최고 군사권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을 '체제에 대한 위협'이자 '로마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로 간주하며 이를 번번이 거부했다.


409년, 알라리크는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두 번째로 로마를 포위한 그는 원로원 의원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대항 황제로 옹립했다. 아탈루스에게서 자신이 원하던 군사령관 임명장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아누스는 라벤나의 호노리우스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프리카는 로마의 곡물 공급을 책임지는 핵심 지역이었다. 그리고 총독은 대항 황제를 위해 곡물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곡물 없이는 로마도, 알라리크의 군대도 버틸 수 없었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아프리카 원정을 제안하며 고트족 병력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탈루스는 이를 거절했다. 야만족 병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면 황제로서의 권위가 손상된다는 이유였다. 그는 로마계 장군 콘스탄티우스에게 소규모 병력만을 주어 아프리카로 보냈다. 원정군은 상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격퇴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로마로 향하는 곡물선이 끊기자 도시는 다시 기근에 빠져들었다. 알라리크는 자신이 세운 황제를 스스로 폐위했다. 호노리우스와의 재협상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재협상은 시작될 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뜻밖의 방해가 끼어들었다. 사루스라는 고트족 출신 로마 장군이 알라리크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사루스는 스틸리코 아래에서 복무했던 인물로, 알라리크의 가문과 오랜 원한 관계에 있었다. 알라리크는 이 공격을 호노리우스가 지시한 것으로 해석했다. 협상의 여지는 그것으로 닫혔다. 알라리크는 세 번째로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410년 8월 24일 새벽, 포르타 살라리아가 열렸다. 누가 문을 열었는지에 대해 사료는 엇갈린다. 도시 안에 있던 고트족 노예들이 내부에서 개문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알라리크의 군대가 로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800년 만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외적이 로마를 함락시킨 것은 기원전 387년 갈리아족이었다.


약탈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수많은 금음보화들이 수탈되었고, 황제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를 포함한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피해는 상당했다. 훗날 6세기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알라리크의 군대가 지나간 남이탈리아의 도시들이 그의 시대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로마 시의 식량 배급 명단에 오른 인구가 408년 약 80만 명에서 419년 약 50만 명으로 줄었다는 수치는, 이 시기 로마가 입은 타격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알라리크의 행동에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 성소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은 피난처로 지정되었고, 그곳으로 도망친 시민들은 해를 입지 않았다. 어느 성당에서는 성물을 발견한 고트 병사와 수녀 사이에 짧은 대치가 벌어졌다. 수녀는 이것들은 베드로 사도의 성물이며 그분이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했다. 병사는 주저하다가 이를 알라리크에게 보고했다. 알라리크는 즉각 성물 전체를 성당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무장한 고트 병사들이 성물을 들고 로마의 거리를 행진하자, 놀랍게도 숨어 있던 로마 시민들이 하나둘 골목에서 나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주의 기독교인이었던 알라리크가 니케아 정통 교회의 성소를 보호했다는 사실은 당대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라벤나의 호노리우스에게 로마 함락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장면을 두고, 6세기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런 일화를 전한다. 호노리우스는 ‘로마’라는 이름의 애완 닭을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전령이 무릎을 꿇고 로마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오늘 아침에도 직접 먹이를 주었는데.” 그는 자신이 기르던 닭 로마가 죽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생물의 죽음과 도시나 국가의 멸망을 같은 동사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령의 내용이 도시 로마의 함락임을 알고 나서도 그저 황제는 닭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윤색과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일화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수년간 성벽 안에서 협상을 거부하고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한 황제의 본질을, 어떤 진지한 역사적 서술보다 더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함락이 당대에 가한 충격은 군사적, 정치적 차원을 넘어섰다. 베들레헴에서 성서 번역 작업에 몰두하던 히에로니무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썼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도시가 집어삼켜졌다고.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와 문명의 동의어였다. 그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세계의 근본적인 무언가가 무너졌다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로마는 함락되었지만, 호노리우스는 여전히 라벤나에 있었다. 알라리크는 여전히 제국 안에서 갈 곳이 없었다.


로마 함락 이후


약탈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남쪽이었다. 목적지는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는 로마 세계의 곡물 창고였다. 그 곳을 장악하면 고트족이 필요로 하는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호노리우스를 압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지렛대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출발 단계에서 무너졌다. 시칠리아 해협을 건너기 위해 준비한 함대가 폭풍을 만나 파괴되었다. 아프리카 원정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알라리크는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410년 말, 행군 도중 남이탈리아의 콘센티아에서 그가 쓰러졌다. 현대 연구에서는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800년 만에 로마를 함락시킨 고트족의 왕은, 정작 자신이 이루려 했던 것을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 남단의 낯선 땅에서 생을 마쳤다.


장례는 전설로 남았다. 고트족은 콘센티아 근처를 흐르는 부센토 강의 물길을 일시적으로 돌렸다. 드러난 강바닥을 파서 알라리크와 그의 가장 귀한 전리품들을 함께 묻었다. 물길이 원래대로 돌아온 뒤,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전원 처형되었다. 무덤의 위치를 아는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알라리크의 무덤은 그들이 바란 것처럼 지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후계는 알라리크의 처남 아타울프가 맡았다. 아타울프는 훗날 나르본에서 한 로마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을 파울루스 오로시우스가 기록으로 남겼다. 그에 따르면 아타울프는 한때 로마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고트족의 세상을 세우는 꿈을 품었으나 경험을 통해 고트족이 법률 없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로마를 대체하는 대신 로마를 되살리는 길을 택했으며, 고트족의 힘으로 로마의 이름을 회복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아타울프의 이후 행적은 그 말과 방향이 일치했다. 그는 알라리크가 로마에서 데려온 포로 중 가장 중요한 인물, 호노리우스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와 414년에 결혼했다. 서고트족의 지도자가 서방 황실의 혈통과 혼인한 이 사건은, 고트족이 로마 제국의 외부에 있는 정복자가 아니라 그 내부의 일부가 되고자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타울프는 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418년, 로마는 라인 방어선 붕괴와 찬탈자 전쟁으로 크게 흔들린 갈리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아키텐 지방을 고트족의 정착지로 공식 허가했다. 고트족을 동맹군으로 삼아 지역 방어를 맡기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서고트 왕국의 탄생이었다.


서고트 왕국이 최초의 게르만 왕국은 아니었다. 이미 히스파니아 북서부에는 수에비족이 세운 왕국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텐의 서고트 왕국은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제국의 약화 속에서 형성된 지역 세력이 아니라, 로마 정부가 공식적인 조약을 통해 제국 영토 안에 정착을 인정한 게르만 왕국이었다. 즉 로마 질서 바깥에서 형성된 왕국이 아니라, 로마 세계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 형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반달족이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로, 부르군트족이 갈리아 남동부로, 프랑크족이 라인 강 이북과 갈리아 북부로 차례로 자리를 잡아갔다.


로마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서방 제국은 476년까지 명목상 존속했고, 동방 제국은 1453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410년의 로마 함락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로마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던 불가침의 권위와 영속성의 신화가 그날 무너졌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질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르만 왕들은 로마의 법통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며 중세 유럽의 정치 질서를 만들어갔다.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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