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시대를 살아가는 CD 시대의 남자의 독백 2

대중음악 비평가의 죽음

by 수다인

pt1.

거실에 방치되어 있던 CD 플레이어와 음악 CD들을 침실로 옮겨온 후 자기 전 1, 2시간은 그 동안 방치되어 왔던 CD 플레이어에 CD를 통해서 음악을 듣고 있다. 지금처럼 조금만 찾아보면 왠만한 음악은 죄다 인터넷에서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환경에 CD로 음악을 재생하는 건 솔직히 꽤 귀찮은, 좋게 표현하자면 아날로그 적인 방식이다. 그렇지만 편리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상실한 21세기 현재에서 다소 불편한 방식인 CD로 음악을 듣는 건 그 자체로서 꽤 흥미롭고 매력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2020년대가 되면서 K-Pop이 전 세계에서, 심지어 Pop의 본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현지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어서 한국인들은 미국 Pop음악에 대한 수요가 현저히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음악을 듣는 방식이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으로 바뀌었고 뮤지션들도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앨범을 발매하기 보다는 싱글 위주로 발매하고 활동하는, 다시 말하자면 CD로 대표되던 음악 산업의 구조가 완전히 바뀐 원인까지 겹치면서 한국에서 Pop음악 CD 유통 규모는 현저히 줄어 들었다. 과거에는 왠만한 음반들은, 대단히 마이너한 음악이나 혹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국내 음반사를 통해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계약해 발매되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왠만한 사람들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Pop 뮤지션들의 음반도 국내 정식 라이센스 버전이 아닌 외국에서의 수입판이 유통될 뿐이다. 그 많던 국내 음반사들은 그 사이에 다 쫄딱 망한 걸까?


656652638790229.jpg Beyonce <Renaissance> (2022)


일 예로 2022년도에 비욘세(Beyonce)는 <Renaissance> 앨범을 발매했다. 비욘세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팝 뮤지션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인물이지만 이 앨범은 국내 유통사가 없어서 그런지 외국에서 수입되어서 국내 시장에 유통되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부터 팝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2025년도의 정규 앨범 <Here for it all> 뿐만 아니라, 그 전에 발표된 2018년도의 <Caution> 앨범 역시 한국에서는 음반사를 통해서 발매된 게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해 와서 유통되었다.


R-12966795-1704366316-8132.jpg Mariah Carey <Caution> (2018)


지속적으로 강조했듯 음악을 듣는 생태계가 CD가 아닌 디지털 형식의, 그것도 mp3 파일로 다운로드를 해서 특정 플레이어를 통해 재생하는 것도 아닌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는 세상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거기다가 미국 Pop 음악이 한국인들의 정서와는 완전히 동떨어지면서 Pop 음악이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음악 콘텐츠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Pop 음반에 라이센스를 취득해 그걸 CD로 제작해 유통하는 건 음반사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혹은 이윤 추구 가능성이 높은 상품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음반 제작사 자체가 사양 사업인 건 아닐까? 현실을 감안하면 이제 Pop 뮤지션들의 음반을 수입 버전으로 접하는 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에서 인지도가 꽤 높은 네임드 Pop 뮤지션들의 음반을 수입판으로 듣게 되니 CD 시대의 마지막 유산(legacy)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얼마 전에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집에 그저 고이 모셔두었던 해외 Pop 뮤지션들의 음반들에서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재생하며 오랜만에 부클릿을 훑어 보았다. 부클릿 사이에서 별도의 한 두 쪽 짜리 종이가 떨어진다. 그렇다. 과거에는 해외 뮤지션들의 국내 라이센스 버전에는 그렇게 거의 예외없이 이런 한 두 쪽 짜리 종이가 첨부되었다. 이는 현지 판에는 없는 국내 라이센스 판에만 있는 국내 음반 유통사가 국내 팬들을 위해 준비하는 소소한 선물(?)이기도 하다. 이건 음악평론가를 비롯한 음악 관계자가 해당 뮤지션을 소개하고 해당 앨범에 관한 감상을 작은 리뷰 글이다. CD 플레이어에서 CD를 재생하면서 귀로는 뮤지션의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평론가의 리뷰 글을 보면서 음미하는 게 해외 팝 뮤지션들의 국내 정식판을 구매하는 쏠쏠함 재미 중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그게 특별한 재미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이게 너무나 당연했다. 오히려 평론가의 앨범에 대한 소개 및 리뷰 글이 부클릿 사이에 끼어져 있는 게 국내 음반사가 성의 없이 국내에 음반을 유통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왠만한 유명 팝 뮤지션들의 음반도 소량으로 수입해서 한국에서 유통하니 국내 평론가의 리뷰 글을 부클릿 사이에서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미국 뮤지션인 머라이커 캐리의 새 앨범을 영국의 음반사가 유통시키는 데 제작사가 상정한 타켓 구매층은 자국민이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 평론가가 한국어로 쓴 리뷰 글을 포함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CD로 음악을 듣는 시대는 실시가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아날로그식 방식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음악 산업에서 적은 비율로마나 시장에서의 일정 부분을 점유하고는 있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로 된 소개 및 리뷰 글을 눈으로 즐기는 방식은 이제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구시대적인 행위가 되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mp3라는 매체가 등장해 CD에 치명타를 가했고 스마트폰의 등장과 그에 이어 저렴한 데이터 유급제의 보급으로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으로 CD의 숨통을 거의 완전히 끊어 놓았지만 CD는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CD와 짝을 이루던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인 음악전문가가 선사하는 리뷰 글을 통해 눈으로 음악을 즐기는 행위는 완전히 숨통이 끊어져 CD가 꿈의 매체라고 칭송받으며 음반 산업을 완전히 장악하던, 이른바 CD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의 objet들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재확인할 수 있는 지경이 된 거다.


pt2.

팝 뮤지션의 앨범에 국내 음악전문가의 소개 리뷰 글이 없는 게 그토록 안타까울 일일까? 그까짓 것 없는 게, 음악을 듣는데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걸 가지고 여기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있나 싶을 거다. 그렇다. 그건 별 거 아닌거다. 하지만 별 게 아닌 게 아닐 걸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소개 리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군의 인물들이었지만 거의 대부분 음악평론가 혹은 대중음악계에 여러 방식으로 종사하는 음악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이 쓰는 글이 더 이상 국내 음반 제작사의 음반을 통해 소개되지 않는다는 건, 음악평론가의 일자리가 혹은 소득 창출의 통로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이 그 당시에 그 글을 쓰고서 음반사로부터 얼마의 비용을 지급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소개 리뷰 글을 쓰는 건 많든 적든 그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제공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나? 거기다가 음악평론가에게 그런 글을 쓰는 거, 더 나아가 reviewing 그 자체가 그들의 일인데. 그들이 글 하나를 쓰는데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을 수 있지만 하루에도 전 세계에서, 아니 미국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뮤지션들이 새 앨범을 발매하고 이를 하나라도 더 국내에 유통시키려던 CD의 황금시대에 음악평론가들이 소득을 창출할 기회는, 달리 말하면 음악평론가에 대한 수요는 꽤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CD라는 음악 소비 방식이 퇴조함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해외로부터 라이센스를 취득해 정식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국내 음반사가 사라지기 때문에 음악평론가들이 일할 기회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고용주가 개같이 멸망한 것이다. 음악 산업계를 구성하는 집단인 평론가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음반사라는 고용주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그들을 통해 소득일 창출하던 평론가 역시 활동할 수 있을까? 간단히 생각해도 이는 어렵다. 그래, 부족한 생계을 위해 파트 타임을 뛰거나 투잡, 쓰리잡을 하며 음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전업 평론가의 활동을 포기했을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지 않나? 게다가 혼자라면 모르겠는데 결혼해서 배우자가 있고 심지어 자녀들까지 있다면 그에게는 배우자로서 혹은 부모로서의 의무가 뒤따르는데 과연 평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아마 무리라고 본다. CD의 몰락은 그렇게 음악평론가라는 직업이 사라지게 아니 거의 사라지게 만드는 나비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아마도.


s-l1200.jpg Celine Dion <Falling Into You> (1996)


현대 사회에는 그 많은 직업이 있는데 고작 음악평론가라는 직업 하나가 사라지거나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게 뭐가 그렇게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음악, 미술, 문학은 인간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재화는 아니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혹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재화로서 소비재와 구분되어 특별히 가치재(merit goods)로 분류된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이 없어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이 없는 인류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나라는 개인은 예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인류는 예술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즉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 인간(homo ludens)은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켰고, 사회의 기준과 표준을 발전시켰고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인류의 진보는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더 즐겁고 재밌게 살기 위한 결과였다.


pt3.

평론가는 예술의 발전을 독려하는 집단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은 무언가가 정체되어 있으면 싫증을 내고 이내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무언가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예술에서 돋보인다. 어느 시점에 유행하던 음악, 미술, 책, 패션은 그 때가 지나면 어느 순간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 되어 버리고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요구를 낳는다. 그렇게 새로 등장한 음악, 미술, 책, 패션 등이 기존의 것들을 대체한다. 새로운 음악, 미술, 책, 패션 등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것에서 조금 변형된 것들이 쌓이고 쌓여 기존의 것을 대체한다. 거대한 폭풍이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수증기를 꾸준히 응축해 거대한 폭풍으로 진화해 있듯이. 변형 혹은 변화는 그 자체로서는 중립적이고 좋을 수도 혹은 나쁠 수도 있다. 아티스트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예술 작업이 직업이고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창작 작업을 지속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미 이룩한 성과를 그대로 답습하며 정체되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최종 결과물의 퀄러티가 떨어지며 퇴조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어떤 아티스트가 자신이 과거만 못한 결과물을 내놓고 싶어할까? 새로운 작업을 할 때 모든 예술가들은 새로운 작품이 과거의 작품보다는 뛰어나거나 아니면 기존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이 이러한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자 한다. 그걸 세상에 공개한다는 건 그 결과물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꽤 만족스로운 결과물이고 남들에게 공개할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기량이 떨어지고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인간은 귀신같이 그걸 알아차리고 그 아티스트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거두고 새로운 아티스트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그렇게 쥬니어가 시니어를 밀어내고 그렇게 예술은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아티스트들은 뒷방 늙은이니까 창작 작업을 하지 말라는 거냐? 아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혹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창작 작업을 해야 한다. 예술가에게는 정년이라는 게 없다. 정년이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의 고용 노동이 탄생하면서 생겨난 개념이기 때문에. 어쨌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절정기가 있고 절정기를 지나 쇠퇴기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른다. 예술가로서의 기량 역시 절정이었던 시기가 있고 그 기량이 혹은 예술적 능력이 퇴보하는 시기가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을 감안하더도 예술가가 절정기를 지났을 때에도 여전히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기를 기대하는 게 그 예술가를 사랑한 팬들의 마음이다. 그저 그가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게 아니라 그가 여전히 건재하는 걸 팬들은 보고 싶은 것이다. 일반인들을 대신해 예술가의 결과물을 말이나 글로서 평가하고 예술가가 절정기였을 때의 결과물에는 미치치 못하더라도 그가 여전히 훌륭한 예술가라는 건재함을 증명해낼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도록 독려하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다.


도서관에서 텀블러에 커피 마시면서 맥북으로 작업하는 안경 쓴 30대 한국인 남자.jpeg


평론가는 아티스트가 잘한 부분이 있다면 칭찬하고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질타해 예술가가 다음에는 더 좋은 후속작을 내놓도록 유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아직은 대중에게 제대로 그 진가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를 발굴하여 메인스트림에 소개해 해당 예술 장르가 지속적으로 변화/발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주도하는 예술의 변화는 올바르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예술 더 나아가 사회 자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길을 제시하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다. 물론 평론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이란 객관적이지 않고 개인적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일반인들의 요구와 다를 수도 있다. 그 중심을 잡아 모두가 납득할만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다. 그 결과 예술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다. 음악이, 미술이, 문학이 특권층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던 전 근대 사회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특권층의 지원을 받는 대신 다른 재화들처럼 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그 비용으로 생계를 충당하게 된 근대 이후부터 비평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돈을 대주는 특권층의 취향을 맞추면 되는 거고 후원자는 예술가의 작업 방향성을 어느 정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미 가이드라인이나 지침이랄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 예술가들에게 가이드라인이나 지침을 줄 사람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비평가가 메꾸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예술가의 결과물을 소비해줄 잠재저인 구매자인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하면서도 예술 작품으로서의 작품성을 예술가에게 요구하였다. 비평가는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소비자의 취향을 만드는 위치에까지 오를 정도로 한 때 비평가는 예술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적어도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평론가의 설 자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L_p1001828918.jpg.jpg 安室 奈美恵 <Love Enhanced> (2002)


비평가는 예술가의 결과물을 판단해서 예술가에게 시민들을 대신해 예술가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을 제시해주는데 그런 비평가를 고용해 온 음반 제작사가 사라져 버렸다. 과연 현 시점에 대중음악의 상황은 어떨까? 비록 미국 일변도거나 전 세계 넘버 투였던 일본의 J-Pop이 아시아에서 사랑받던 과거의 양상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대중음악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 대중음악을 만난 게 언제인가? 소장하고 싶은 음악,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대중음악을 접한 건 언제가 마지막인가? 그저 한 시절 유행하는 유행가가 아니라 작품이라고 생각한 음악을 만난 게 언제인가? 음악가들이 마치 하나의 잘 짜여진 작품집으로서 앨범을 내는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 싱글로 그 때 그 때 한 두 곡을 온라인으로 발표하는 시대가 되어 버리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영원히 기억하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timeless한 작품으로서의 대중음악을 만나는 건 더욱 어려워진 것 같다. CD로 음악을 소비하던 시대가 끝나고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대중음악은 그저 사람들이 잠깐 소비하고 버리는 상품이 되었다. 패스트패션처럼 그저 한 번 잘 사용하고 버릴 것들이기 때문에 공을 들일 이유가 뭐가 있을까? 패스트패션처럼 그 때 그 때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면 시장에 출시하면 되는데 일정한 시간을 들여서 축적한 결과물을 하나의 유기적인 결과물로 통합해 발표하는 결과물인 앨범을 낼 필요가 뭐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미 그런 시장에 길들여져 버렸기에 앨범이라는 결과물을 진득하게 들어줄 참을성도 사라진 마당에. 대중음악은 그저 한 때 소비하고 버릴 것들이기에 여기에 작품성이니 예술성이니라는 되도 않는 가치를 적용하는 게 뭐가 의미가 있을까? 그저 이 음악 상품이 시장에서 얼마나 팔릴지, 히트할지 그게 중요하지. 사람들도 음악은 그저 한 때 즐기고 좋으면 됐지 그 이상 뭘바라? 라고 생각하면서 음악을 가치재가 아니라 소비재로 생각하는데 뭘. 이런 세상에 대중음악의 가치를 논하는 비평가, 평론가가 설 자리가 있을까?


p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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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새로 산 해외 뮤지션의 CD를 펼쳤을 때 귀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음반에 대한 소개 리뷰 글을 읽으면서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데에 일등 공신이었던 우리의 취향을 이끌어 주었던 음악평론가 분들은 2026년 현재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실까? 그리고 분면 이 지구상에는 그런 음악평론가에 매료되어 나도 그들을 따라 비평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비평가 kids들은 그들을 위한 자리가 사라져 버린 지금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마 일부는 블로그나 소셜미디어(SNS)에 자신의 리뷰 욕구를 발산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자신의 표현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고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로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음악과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무관한 일을 하면서 한 때 내 꿈은 음악평론가였지를 추억하면서 음악평론가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의 자신이 듯던 음악들을 안주삼아 고단한 일상을 버텨내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무슨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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