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술] 벨리니의 피에타 이야기

벨리니의 <브레라 피에타>와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

by 수다인

본 내용은 유튜브 "한양수다인: 그림에 관한 모든 수다" 채널에서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금쪽이 때문에 억장이 무너진 엄마! 성모와 예수의 죽음: https://youtu.be/Td7Ak23hH9U

2. 한양수다인 공식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hysudain




1. 페르골레지(Pergolesi)와 "Stabat Mater"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1932-2018) 감독의 <아마데우스 Amadeus>(1984)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미스테리한 죽음을 다룹니다. <아마데우스>는 지휘자 네빌 마리너(Neville Marriner, 1924-2016)가 음악 감독을 맡은 <아마데우스>는 2시간 40분의 런닝타임 동안 거의 전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들이 흘러나오지만 이례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음악이 등장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어린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가 자신을 괴롭히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음악이 등장합니다.


페르골레지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사망 직전, <Stabat Mater>를 완성합니다. Stabat Mater는 중세 말기에 등장하여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1725)와 같은 초기 바로크 시대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 페르골레지와 같은 중기 바로크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각광을 받았으며,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나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과 같은 19세기 작곡가들도 훌륭한 작품을 남길 정도로 오랜 세기에 걸쳐 사랑 받아온 기독교 음악입니다. 의뢰용 종교음악인 Stabat Mater는 첫 번째 곡인 “Stabat Mater Dolorosa”를 시작으로 12곡에서 20곡 정도의 곡들로 구성된 모음곡입니다. 첫 곡이자 모음곡 자체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한 “Stabat Mater Dolorosa”는 “슬픔에 찬 성모가 서 계시고”라는 뜻으로 「요한복음」 19장 25절을 근거로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은 로마 군대에게 체포된 예수 그리스도가 채찍질과 고문을 받고, 총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에 의해 사람들 앞에 내보인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Calvary) 언덕으로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직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곁을 성모 마리아가 지키는 상황을 첫 번째 곡으로 하는 Stabat Mater는 “Theotokos”, 즉 “신의 어머니”인 성모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성모가 느끼는 비통한 감정을 전달하여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고취시키며 성모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목적입니다. Stabat Mater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요,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의 전체 역사 중,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장 절정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성모의 입장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성모가 중심에 놓이는 음악 형식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떠한 기독교 음악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의 관계가 돋보입니다.


2.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

027pieta.jpg Bellini, <Dead Christ Supported by the Madonna and St John: Brera Pietà> (1460), Tempera on panel.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고 이에 대해 성모가 비탄에 빠진 장면을 묘사한 미술작품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의 브레라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 소장되어 있는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 Dead Jesus Christ Supported by the Virgin Mary and St. John>(1460)입니다. 가로 107㎝, 세로 86㎝의 캔버스에 템페라(tempera)로 그린 그림의 가운데에는 창백한 피부에 눈을 감고 축 늘어진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위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듯 붉은색 의복에 머리에는 검은색 베일을 두른 그녀는 죽은 아들의 시신에 뺨을 맞대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한 슬픔에 가득 찬 얼굴입니다. 예수의 왼편에는 젊은 남성이 예수를 붙잡고 있습니다. 반쯤 입을 벌리고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이 남성의 표정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입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머리 뒤에 광배(halo)가 있는 것처럼, 이 젊은 남성의 머리에 후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 남성 역시 신성한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여기서 등장하는 제자는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으로서, 요한복음의 저자인 성 요한(St. John)입니다. 예수의 제자 성 요한은 그리스도가 체포되었을 때부터 아들의 행적을 따라갔던 성모 마리아의 곁을 지킨 인물입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는 세상에 홀로 남겨질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 대신 돌봐 줄 대상으로 성 요한을 지목했기에 그리스도의 시신이 성모에게 인계되었을 때 그녀의 옆에서 예수를 부축하는 인물로 성 요한이 등장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벨리니는 「요한복음」 의 내용에 비교적 충실하게 그리스도의 시신이 성모에게 인계된 상황을 묘사하였습니다.


3. One & Only 지오반니 벨리니

Giovanni_Bellini_FeltételezettÖnarcképeKJ.jpg Giovanni Bellini, <Self-Portrait> (1500), Oil on Canvas


지오반니 벨리니는 1430년 베네치아(Venezia)에서 출생하여 1516년 베네치아에서 사망한 미술가입니다. 그는 자코포 벨레니(Jacopo Bellini, 1400-1470)의 둘째 아들입니다. 자코포 벨리니는 북유럽의 후기 고딕 양식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르네상스 양식을 결합하며 베네치아의 초기 르네상스 회화 양식을 개척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지오반니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 역시 화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습니다. 고명딸인 니콜로시아(Nicolosia Bellini, ?-?)는 미술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에게 출가시켜 자코포 벨리니는 미술가 일가를 이루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형인 젠틸레 벨리니와 처남인 만테냐가 베네치아를 벗어나 만토바(Mantova), 로마(Roma)와 같이 이탈리아의 중/북부 내륙 지역이나 오스만 투르크로 진출했던 것과 달리, 지오반니 벨리니는 평생을 베네치아 내에서만 활동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형 젠틸레 벨리니나 처남인 만테냐의 명성이 지오반니 벨리니보다 더 높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 중 지오반니 벨리니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벨리니 가문의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수했는데 그 중 지오반니 벨리니는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는 단지 오래 산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잠깐 반짝하고 점차 기량이 떨어지거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자신에게 명성을 안긴 방식을 기계적으로 답습하지만 지오반니 벨리니는 놀랄 정도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줍니다. 지오반니 벨리니가 70대가 되었던 1500년경에 지오르지오네(Giogione, 1477?-1510)라는 젊은 미술가가 당시 베네치아 미술계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부드럽고 감각적인 표현 방식에 인물과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표현, 종교화에서 풍경에 대한 묘사를 더욱 강조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풍경화라는 장르의 탄생을 예고하거나 이상적인 자연환경에서 휴식을 즐기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담은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새로운 회화 유형을 제시하면서 지오르지오네는 베네치아 미술계에 충격을 선사하였습니다. 지오르지오네는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였습니다. 지오반니 벨리니가 높은 평가를 받는 건 그가 지오르지오네의 스승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문하에 있었던 제자 지오르지오네의 혁신을 스승인 지오반니 벨리니 역시 과감하게 수용하여 자신만의 노련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였다는 겁니다. 제자의 장점을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적극 수용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207feas.jpg Giovanni Bellini, <The Feast of Gods> (1514), Oil on canvas


페르골레지가 음악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2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오르지오네는 1510년 30살 정도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지오르지오네가 사망할 당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는 커리어를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 시기 티치아노는 독자적으로 작업을 맡기도 했지만 스승이었던 지오르지오네와 함께 공동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오르지오네의 말기 작품들과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오르지오네나 티치아노가 작업했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1510년 지오르지오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겨진 작업들은 지오르지오네를 대신해서 스승인 지오반니 벨리니가 티치아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참여하였습니다. 지오반니 벨리니는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을 절정에 올려놓는 두 천재인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 모두를 키워낸 인물이자 제자들의 혁신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그 스스로도 베네치아 전성기 미술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대단한 미술가입니다.


4. 아름다움 그 자체인 벨리니의 그림

027pietb.jpg Bellini, <Breda Pietà> (detail)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1460년 완성된 지오반니 벨리니의 초기 걸작입니다. 1460년은 아직 벨리니가 30살 정도밖에 안 된 상황으로서 완숙기에 접어들기 전입니다. 하물며 이 때는 초기 르네상스(Early Renaissance) 시대로서 아직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고전적 미학이 완성되기도 전이죠. 벨리니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중세 미술의 전통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수용하면서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에 상당히 근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 요한의 자연스러운 신체 비례, 세 인물들의 뒤로 보이는 풍경은 비록 완벽한 원근법 처리는 아니지만 같은 시기의 작품들보다 세련되게 구현되어 그림에서 깊이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성모 마리아의 슬픔에 대한 표현은 이 그림의 백미입니다. 성모의 얼굴에서도 충분히 슬픔의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은 16세기의 후기 르네상스(Late Renaissance) 혹은 매너리즘(Mannerism)이나 17세기 초기의 바로크(Baroque) 미술에서의 폭발적인 감정과는 확연히 다르게 고요함에 가까운 절제된 슬픔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자 신의 어머니(Thotokos)로서의 성모 마리아의 인생에서도 가장 슬픈 사건입니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그림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을 정도에서 그녀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적정성, 즉 decorum이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로나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가 활동하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하기 4-50년 전에 이미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구현된 겁니다. 이 작품이 지오반니 벨리니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 전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5.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지오반니 벨리니의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긴 제목보다는 일반적으로 작품이 위치한 미술관의 명칭을 따 <브레라 피에타 Brera Pietà>로 불립니다. 이탈리아 로마, 그 중에서도 바티칸(Vatican)의 성 피에트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을 방문해본 분이시라면 아마 피에타(pietà)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두꺼운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으며 위치해 있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거대한 조각상을 보셨을 거에요. 바로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그 조각상의 제목이 <피에타 Pietà>(1498-1499)입니다.

1pieta0.jpg Michelangelo, <Pietà> (1499), marble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그 조각상의 제목이지만 기독교 미술에서의 특정 도상을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피에타는 십자가 책형을 받아 죽음을 맞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성모 마리아가 잡고 있는 도상을 통칭합니다. 피에타 도상은 중세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주로 알프스 북쪽의 독일이나 플랑드르(Flandres)나 네덜란드와 같은 저지대 국가들에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던 게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으로도 전파되면서 가톨릭 세계 전체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피에타 제작을 의뢰받은 미켈란젤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걸작을 완성하며 피에타라는 기독교의 특정 도상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죠.


pieta-avignon-reproduction-painting-villeneuve-les-author-probably-enguerrand-quarton-century-louvre-paris-49432009.jpg Pietà of Avignon (15th C.)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피에타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피에타이지만,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모 마리아가 무릎 위에 올려놓는 미켈란젤로가 선택한 방식은 피에타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사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붙잡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신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는 모두 피에타 도상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아무리 시신이라도 30살 정도의 장성한 아들을 50세 정도의 중년 여성이 혼자의 힘으로 무릎 위에 올려놓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중세 시대 피에타에서는 조각상을 중심으로 보다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구도가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도 이러한 구도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다만,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를 연약한 50세 정도의 중년여성이 아닌 20대 초반의 젊고 아름다운 신체적으로 건강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당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사건 발생 시점과 맞지 않게 성모가 지나치게 젊게 표현된 걸 지적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는 성처녀(the Virgin)로서 영원히 순결한 존재로서 늙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도 있겠지만 성모가 젊고 건강한 여성이어야 장성한 아들의 시신을 홀로 감당하는 게 납득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는 431년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에서 성모 마리아를 일찌감치 신의 어머니, 즉 Theotokos로 인정하며 성모 마리아를 가장 중요한 성인(聖人)으로 선포합니다. 그 여파로 초기 중세 때부터 아기 예수와 성모가 동시에 등장하는 종교미술이 조성됩니다. 초기에는 그저 성모가 한 손에는 아기 예수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를 가리키며 아기 예수가 구원자임을 보여주는,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호데게트리아에서는 주로 반신상 형태로 성모와 아기 예수가 같이 등장하지만 예수가 반드시 성모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던 중 중세 후반 13세기에 유럽에서는 성모 신앙이 부흥합니다. 성모가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 된 건 그녀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그녀의 몸을 통해 탄생했으며 둘은 육체를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자 단지 성모가 아기 예수를 가리키는 “호데게트리아”에서 나아가 예수가 성모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게 묘사하여 이 둘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도상 방식이 유행함에 따라,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를 성모가 무릎에 올려놓는 방식도 이 둘 간의 정서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피에타에도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피에타의 여러 가능성 중, 미켈란젤로는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성모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 구성을 채택하면서 온전히 성모 혼자 그리스도의 시신을 감당할 수 있게끔 그녀를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시기의 20대 초반의 신체 건강한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2020-hode-8.jpg Hodegetria Icon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성모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순간에서도 고요하고 평온한 표정입니다. 피에타는 사건의 비극성으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성모는 적극적으로 슬픔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성모는 슬퍼하거나 비통해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끔찍한 고통을 받았다고 서술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에서는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인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라는 걸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 오른손에 못 자국만을 표시할 뿐 그리스도의 시신은 거의 상처 하나 없을 정도로 매끈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만 보더라도 끔찍한 고통에 대한 흔적을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모가 슬픔에 가득 찰 이유도 마땅히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현세에서의 소명을 다하여 원래 자신이 있었던 성부(聖父)의 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며 성모도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이 감동적인 의식을 주관하는 주체는 성모 마리아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서 피에타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고 동시에 르네상스 특유의 고요함의 미학에도 도달하였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에서 “적정성”, 즉 “decorum”과 함께 “우아미(grace)”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아미는 격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순간에서도 인물들은 기품을 잃지 않으며 평온하고 고요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완성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비극적 순간에서도 인물이 슬픔이나 비통함 등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우아미를 해치며 미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됐습니다. 슬픔에 빠져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 인물의 얼굴에서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고취시킬 수 없다고 본거죠. 이는 십자가 책형으로 목숨을 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넘겨받은 성모 마리아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넘치거나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를 보이는 건 고요함의 미학으로 점철되는 우아미를 해치는 표현으로 여겨졌습니다. 슬픔에 빠진 성모, Mater Dolorosa는 슬퍼하지만 감정적으로 절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여성, 귀부인들 중 최고의 “귀부인(Our Lady)”이기 때문입니다.


6. 벨리니의 초기 걸작 <브레라 피에타>


벨리니의 <브레라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는 매우 다릅니다. 성모 마리아는 중년의 여성으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자신의 무릎 위에 죽은 아들을 올려놓지도 않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최고의 귀부인으로서의 기품을 잃지도 않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을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속 성모보다는 슬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만, 16세기 후기 르네상스 미학이 절정에 도달한 1560년대에 완성된 루이스 데 모랄레스(Luis de Morales, 1520-1586)의 <피에타 Pietà>(1560s)처럼 눈물을 왈칵 쏟으며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성모의 슬픔에 감정이입을 과하게 부추기는 정도는 아닙니다.


pieta.jpg Morales, <Pietà> (1560s), Oil on panel


<브레라 피에타>를 그리기 전인 1455년에도 벨리니는 피에타를 그렸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의 아카데미아 카라라(Academia Carrara)에 있는 <피에타>는 <브레라 피에타>와 구도적으로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가운데 죽은 그리스도가 등장하며 오른쪽에는 성모, 왼쪽에는 성 요한이 등장합니다.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의 위치, 두 손의 못이 박혔던 흔적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에 대한 묘사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붉은색 베일을 두른 성모는 보다 젊어 보이며 예수를 부축하지만 신체적으로 완전히 밀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더욱 비통해하는 건 오히려 성 요한이고요. 베르가모의 <피에타>는 배경이 묘사되지 않았으며 성모의 표정은 비교적 생기가 있지만 중세 시대의 기독교 이콘(ikon)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예수, 성모, 성 요한의 머리 위에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명문(inscription)이 적혀 있어 중세 시대 이콘화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5년 후에 완성된 <브레라 피에타>에서는 기본적인 구도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배경을 원근법을 따른 세밀하게 묘사된 풍경으로 채움으로서 중세 시대의 종교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회화 문법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게다가 성 요한의 얼굴을 예수와 반대편으로 돌리도록 바꾸고, 성모를 30살 정도의 아들을 둔 중년여성의 모습에 걸맞도록 묘사하였습니다. 성 요한이 예수와 신체적으로 멀어진 대신, 성모는 더욱 가깝게 수정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모가 예수 그리스도와 뺨과 뺨을 맞대는 모습을 선택하였고요.


중세 후기 정교회(Orthodox)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뺨을 맞대는 종교화(ikon)인 “엘레우사(Eleousa)”가 등장하여 정교회 지역 전체로 퍼졌습니다. 엘레우사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와의 정서적 유대감과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강조하면서 신(神)인 예수와 인간을 대표하는 성모와의 신과 인간과의 사랑을 표현하는 도상입니다. 처음에는 정교회에서 유행하던 엘레우사는 중세 말기, 르네상스 초기에는 동방 교회를 넘어 서방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인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및 서유럽의 다른 어떠한 지역보다도 동방 교회 권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게다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어 천년 왕국인 비잔티움(Byzantium)이 멸망하며 기독교도 난민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의 철학 및 문학과 더불어 정교회의 문화도 유입되었죠. 예수와 성모가 뺨을 맞대는 엘레우사 도상 역시 15세기 중반 서유럽 사회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나고 자란 이제 갓 30살이 된 지오반니 벨리니는 1460년 다시 한 번 성모와 성 요한이 동시에 등장하는 피에타에서 1455년의 피에타와 달리 정교회의 엘레우사 도상처럼 성모와 예수가 뺨과 뺨을 맞대는 모습을 도입하여 자연스럽게 융합시켰습니다. 벨리니의 선택은 대단히 성공하였고 피에타가 지닌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서 성모와 예수와의 관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성모의 슬픔을 절제해서 표현하지만 성모가 느끼는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 성모가 지닌 중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MCB-mosaicob.jpg Eleousa Icon

<브레라 피에타>를 통하여 벨리니는 그저 피에타라는 특정 기독교 도상 내에서만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였고, 전통을 존중하면서 새 시대가 요구하는 미감의 적절한 절충점이 무엇인지를 입증한 벨리니는 교회나 귀족들로부터 여러 종교적 주제의 작품들을 의뢰받으면서 종교화가로서의 역량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초상화와 같은 세속적인 그림들까지도 주문받으면서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었고 베네치아 미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자리를 잡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1516년 죽기 직전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지속해 나갑니다. 거의 60년 동안 이어지는 지오반니 벨리니라는 미술가의 전설이 시작된 건 바로 이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부축을 받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 일명 <브레라 피에타>입니다.


7. 페르골레지의 Stabat Mater와 벨리니의 , 따로 또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전체 역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한나절의 사건을 성모를 중심으로 노래하는 음악 장르를 Stabat Mater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성모가 잡고서 신체적으로 예수와 성모가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성모 마리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도상을 특별히 Pietà라고 합니다. Stabat Mater가 서양의 종교음악 전통에서 매우 중요하며, 뛰어난 작곡가들이 걸작을 남겼듯, 시각미술에서는 대단한 거장들이 뛰어난 작품들을 남김으로서 Pietà를 불멸의 기독교 미술 장르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Stabat Mater의 전체 역사에서 페르골레지의 작품이 매우 중요하듯, 지오반니 벨리니의 <브레라 피에타>는 Pietà의 전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페르골레지의 <Stabat Mater>에 대하여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델”이라며 극찬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 1870-1970)는 <브레라 피에타>에 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벨리니는 고통을 비명으로 외치지 않고 침묵으로 그려낸다. <브레라 피에타>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조용한 진흥곡(requiem)이다.”


페르골레지의 <Stabat Mater>와 벨리니의 <Brera Pietà>는 음악과 미술이라는 각자의 장르에서 탄생하였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고 숨이 끊어진 아들의 시신을 인계받은 어머니로서의 애끓는 슬픔을 다룬 거룩한 예술로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의 사랑과 기독교에서의 성모가 차지하는 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공통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종교적인 의미를 제거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매우 아름다운 음악, 미술 걸작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