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2세의 초상화>와 <레오10세와 두 추기경들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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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 라파엘로의 두 교황 이야기: https://youtu.be/FMk4dBTIU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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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명의 교황들을 목격하다!
2025년 4월 21일 제266대 교황인 프란시스코 교황(Franciscus PP, 1936-2025)이 선종에 들었고 5월 8일 교황 선출 투표를 거쳐 미국의 로버트 프란시스 프레보스트(Robert Francis Prevost, 1955) 추기경이 제267대 교황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로서 저는 현재까지 총 네 사람의 교황들과 동시대를 살게 됩니다. 첫 번째 교황은 요한 바오로2세(Papa Giovanni Paolo II, 1920-2005)입니다. 1978년 교황에 선출되어 2005년까지 재임한 20세기를 상징하는 제264대 교황이죠.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16세(Papa Benedetto XVI, 1927-2022)는 950년 만에 탄생한 독일 출신 교황입니다. 교황의 자리는 종신직이지만 건강상의 이유와 가톨릭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기에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생전에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아름답게 퇴장하는 사례를 남긴 교황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교황들이 프란시스코 교황과 제267대 레오14세(Leo XIV)입니다. 레오14세가 얼마나 재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네 명의 인물과 같은 시대를 공유하게 되겠죠. 저처럼, 37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 동안 여러 명의 교황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입니다.
2. 가톨릭 대분열과 르네상스 교황
392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언한 테오도시우스1세(Theodosius I, 347-395) 황제는 395년 붕어하기 전, 제국을 로마(Roma)를 중심으로 한 서쪽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둘로 나누어 상속하며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둘로 나뉩니다. 그부터 80년이 지난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집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서유럽은 장기간 정치적 진공 상태에 빠집니다. 그 공백을 종교 지도자인 교황이 서서히 채우더니 1000년경에 교황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1007년 발생한 “카노사의 굴욕(l'umiliazione di Canossa)”은 신권(神權)이 황권(皇權)을 완전히 제압하며 교황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임을 입증한 사건입니다. 이후 교황의 권위는 차차 약화되었지만 라파엘로가 생존했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에도 교황은 여전히 유럽에서 대단히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라파엘로가 1483년 이탈리아 중부 우르비노(Urbino)에서 태어날 당시의 교황은 식스투스4세(Sixtus IV, 1414-1484)였습니다. 1484년 제213대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센티우스8세(Innocentius VIII, 1432-1492)는 1492년까지 재위하고 제214대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6세(Alexander VI, 1431-1503)는 1503년 8월 18일까지 통치합니다. 알렉산데르6세의 후임으로 비오3세(Pius III, 1439-1503)가 즉위하지만 불과 26일 만에 사망합니다. 비오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율리우스2세(Julius II, 1443-1513)가 1503년 10월 31일 제216대 교황의 자리에 오릅니다. 10년 간 교황청을 이끈 율리우스2세의 선종 후 1513년 3월 9일 레오10세(Leo X, 1475-1521)가 제217대 교황이 됩니다. 라파엘로는 레오10세 치하인 1520년 자신의 생일인 4월 6일 사망하며 총 6명의 교황의 시대를 삽니다.
라파엘로 생전의 교황들을 르네상스 교황들이라고 합니다. 이때 교황들은 중세의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권력욕을 지녔습니다. 또한 교황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호전적인 성향의 교황들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교황들은 중세 말기 동안 약화된 교황의 권위 회복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영토 확장이라는 물리적 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자신과 교황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르네상스 교황들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대단한 야심가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 교황들이 이처럼 탐욕적인 권력욕을 보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세 말기 교황과 교황청의 권위는 상당히 하락했습니다.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는 그 시발점입니다. 제195대 교황인 클레멘스5세(Clemens V, 1264-1314)는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받기 위해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합니다. 교황청이 프랑스 본토로 옮겨감으로서 의도했던 대로 교황청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클레멘스5세 이후 차기 교황의 자리는 프랑스 왕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인들이 차지하였습니다. 아비뇽 유수 이전까지 교황의 자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 혹은 신성로마제국 출신의 인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제196대 요한22세(Ioannes XXII, 1245-1334)에서 제201대 그레고리우스11세(Gregorius XI, 1329-1378)에 이르는 여섯 명의 교황은 모두 프랑스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그레고리우스11세는 1377년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이전합니다. 1378년 그레고리우스11세가 선종한 후, 제202대 교황은 프랑스인에서 다시 이탈리아인인 우르바노6세(Urbanus VI, 1318-1389)에게 돌아갑니다. 교황의 자리를 뺏겼다고 느낀 프랑스는 우르바노6세의 정통성에 문제를 삼으며 별도로 교황을 선출합니다. 그가 바로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antiPope Clemens VII, 1342-1394)”입니다. 이 시기는 두 명 혹은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했던 대립교황들의 시기로, 역사적으로는 “서방교회의 대혼란(Great Schism)” 시기로 불립니다. 가톨릭교회의 대분열 시기는 1378년부터 1417년까지라고 하지만 대립교황은 그 이후 1449년 펠릭스5세(Foelix V, 1383-1451)가 제208대 교황에 선출된 니콜라우스5세(Nicolaus V, 1397-1455)의 정통성을 인정할 때까지 계속 등장합니다. 가톨릭 위계질서의 정점인 교황의 자리를 두고 내부 총질이 이루어지니 교황과 교황청의 권위가 실추되는 건 당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95개조 반박문 95 Thesen>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공개 저격하기 전인 14세기에도 교회의 타락과 속물화가 지속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1455년을 끝으로 대립교황은 더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1460년대에 즉위한 교황들은 이제 후속문제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교회와 교황 그리고 교황청의 실추된 권위를 하루빨리 복원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전략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교황의 본거지이자 교황청의 핵심인 로마를 다른 어떤 권력자들의 도시보다도 화려하게 장엄하는 겁니다. 이 과업에는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 등 르네상스 초기(Early Renaissance)를 대표하는 여러 미술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한참 후배인 라파엘로는 교황과 교황청에 봉사하기 위해 1509년 로마에 입성합니다.
3. 라파엘로, from 피렌체 to 로마
라파엘로는 자신의 career를 고향인 우르비노와 그 남쪽에 위치한 페루자(Perugia) 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1504년 경 북쪽에 위치한 당시 미술의 중심지이자 금융 선진 지역인 피렌체(Firenze)로 건너갑니다. 피렌체 시기는 라파엘로 전체 career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삼미신 The Three Graces>(1504-1505)과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교도 문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비롯하여, <정원의 성모 La Belle Jardinière>(1507) 혹은 <황금방울새의 성모 Madonna del Cardellino>(1507)와 같은 성모자상들을 줄줄이 완성시키며 전성기 르네상스 미학이 추구하는 우아미(grace)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피렌체 시기 라파엘로는 이미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칭송받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완성한 미학을 완벽하게 체화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피렌체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조각과 회화 작품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술사학자 Rona Goffen(1944-2004)의 연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다빈치가 추구한 주제, 인물들 간의 정서적 관계, 구도 등 거의 전반적으로 다빈치의 영향을 수용하며 자기화 하였던 반면,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라파엘로는 다빈치를 존경의 대상으로 본 반면, 미켈란젤로는 라이벌로 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라파엘로와 다빈치의 나이 차이는 31살로서 거의 아버지뻘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와는 8살 차이죠.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처음 왔을 때 미켈란젤로는 <바쿠스 Bacchus>(1497)를 완성하며 천재성을 인정받았지만 겨우 신인에서 벗어났을 뿐입니다. 라파엘로는 자신이나 미켈란젤로나 둘 다 비슷한 입장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스승으로 생각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라이벌로 인식했을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미켈란젤로의 장점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며 미켈란젤로에 대항하기로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렌체 시기에 완성한 여러 걸작 성모자상은 다빈치로부터의 영향을 확인시켜주는 반면, <그리스도의 매장 The Entombment>(1507)에서는 미켈란젤로로부터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불과 4년 동안 피렌체에서 활동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장점까지 수용하면서 대단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피렌체에서 명성을 쌓은 라파엘로는 건축가인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의 추천을 받아 바티칸 궁내에 교황청의 법정이 될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Stanza della Segnatura), 즉 “서명의 방”을 장식하는 벽화 작업을 수주 받게 됩니다. 작업을 위해 1509년 로마로 떠난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 Scuola di Atene>(1509)을 완성합니다. 현대인의 눈에도 그저 감탄이 터져 나오는 인류 최고의 걸작이죠.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직접 사용할 장본인인 율리우스2세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단언컨대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후 교황청의 여러 미술 작업에 라파엘로를 기용했다는 게 율리우스2세가 라파엘로의 결과물에 대단히 만족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율리우스2세는 70세의 나이로 선종합니다. 율리우스2세의 죽음에도 라파엘로의 career는 위협받지 않았습니다. 후임자인 레오10세 역시 계속해서 라파엘로에게 작업을 지시했기 때문이죠. 라파엘로는 1520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레오10세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율리우스2세와 레오10세가 라파엘로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는 두 교황이 라파엘로에게 초상화 주문을 명령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됩니다.
4.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
라파엘로의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 Portrait of Julius II>는 현재 영국 런던(London)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와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Galleria degli Uffizi)의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합니다. 얼핏 보면 이 둘은 거의 똑같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두 버전 중 하나가 먼저 제작되고 나머지가 시간이 지나 제작된 게 아니라, 내셔널 갤러리 버전이 약간 먼저 시작되었을 뿐 거의 동시에 시작되어 둘 다 151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크기는 둘 다 가로 80㎝, 세로 108㎝ 정도로 우피치 버전이 아주 미세하게 더 큽니다. 두 버전의 명백한 차이는 배경에 대한 처리 방식인데요, 내셔널 갤러리 버전이 교황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의 열쇠가 새겨져 있는 초록색 벨벳 벽을 배경으로 인물을 배치한다면, 우피치 갤러리 버전은 배경을 단순히 검게 처리하며 인물에 집중합니다. 그 외에는 거의 완전히 똑같습니다. 1511년에서 1512년은 율리우스2세가 68세에서 69세 정도로 선종하기 1-2년 전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선으로 배치된 의자에 앉은 교황은 관람자의 시선을 회피하듯, 아래쪽을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은 아래 방향이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는데 이 노쇠한 교황은 과연 무얼 생각하는 걸까요?
율리우스2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교황입니다. 율리우스2세는 역대 그 어떤 교황보다도 교황의 세속권 확장에 욕심을 부렸습니다. 굉장히 과격한 성격이며 자신과 교황청의 권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충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율리우스2세는 “전사 교황”으로도 불립니다. 그는 교황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최대 고전으로 평가받는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 Il Principe』(1532)에 등장하는 군주의 초상 그 자체였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자신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냉철해야 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사망 후에 공식 출간되지만 이미 1513년경부터 널리 읽힌 것으로 파악됩니다. 율리우스2세는 『군주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군주론』에서 새 시대의 교황에 관한 전형적인 인물로서 마키아벨리는 율리우스2세를 제시하기 때문이죠. 율리우스2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맹자를 수시로 갈아 치우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악명을 지닌 율리우스2세이지만 라파엘로의 초상화만 보았을 때 율리우스2세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율리우스2세의 공식 초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이나 황제와 같은 군주의 공식 초상화는 권력자의 권위를 전달하기 위하여 근엄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묘사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지만 라파엘로는 교황을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후회와 연민에 빠진 인물로 묘사합니다. 절대적 권력을 지녔으며 역대 교황들 중 가장 호전적인 성격의 교황인 율리우스2세는 그저 힘없고 무기력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라파엘로가 실제 율리우스2세와 전혀 닮지 않게 교황을 그린 건 아닙니다. 교황의 선종 후 이 초상화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의 제단 위에 걸렸습니다.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를 직접 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것처럼 두려움의 감정을 유발할 정도로 진실에 가깝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바사리가 느낀 두려움은 과격한 성격의 절대 권력자인 교황 율리우스2세의 개인적 카리스마로부터 느낀 감정이 아닙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 역시 거대한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나약함, 인생의 덧없음, 죽음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약간 구부러진 등뿐만 아니라 수심에 가득 찬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생의 종착역에 거의 다다른 교황이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여실히 깨달은 듯 한 모습입니다.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는 인물을 다룬 초상화이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주는 일종의 “Vanitas”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vanitas 회화들이 정물화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라파엘로는 실존 인물에 관한 초상화를 통해 이를 상기시킨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12년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교황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율리우스2세는 1513년 2월 21일 매독으로 추정되는 고열로 사망합니다. 율리우스2세의 서거 약 20일 후, 피렌체를 통치하는 메디치(Medici) 가문의 지오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ni di Lorenzo di Medici) 추기경이 3월 9일 후임 교황에 즉위합니다. 그가 제217대 교황 레오10세입니다.
5. 레오10세의 초상화
우피치 갤러리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레오10세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가로 119㎝, 세로 154㎝로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보다 큽니다. 이 그림은 전임 교황의 초상화와 달리 총 세 명이 등장합니다.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명의 남성이 서 있습니다. 진한 붉은색 의복과 교황의 모자를 쓴 인물이 그림의 주인공인 레오10세입니다. 이 그림은 레오10세가 즉위한지 5년이 지난 1518년부터 제작되어 1519년 완성된 집단 초상화입니다. 그럼에도 레오10세는 전임인 식스투스4세, 알렉산데르6세, 율리우스2세 등과 비교하면 상당히 젊어 보입니다. 실제로 레오10세는 교황의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즉위한 교황 중 한 명입니다.
지오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Medici)가 교황의 자리를 승계했을 때 그는 38살이었습니다. 교황은 추기경 가운데서 선출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반 사제에서 시작해 주교와 대주교 등을 거치고 그 중 일부가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추기경은 교황에 선출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가톨릭 사회에서 교황은 너무 젊어서도 너무 나이가 많아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너무 젊으면 추기경들 사이에서 권위가 부족할 수 있으며, 너무 나이가 많으면 교황의 직무를 오랫동안 수행하기 어렵고 교황을 자주 선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너무 젊지도 너무 나이가 많지도 않은 중간 연령의 추기경이 맡는 게 가장 적당합니다. 그런데 제217대 교황이 된 메디치 가문의 지오반니 디 로렌초는 너무 젊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헌신한 누구나 추기경이 될 수 있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추기경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방계 왕자나 대귀족의 자제들이 독점하였습니다. 적장자인 왕족과 귀족이 세속권을 유지한다면, 방계인 왕족과 귀족들은 신권(神權)을 장악하며 유럽 전체를 지배해 온 겁니다.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 이르면 피렌체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돈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유력 가문이 된 메디치 가문은 종교권마저 욕심을 내었습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 즉 “위대한 로렌초”로 잘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1492)는 피렌체에 대한 통치권은 장남인 피에로 디 로렌초(Piero di Lorenzo de’Medici, 1472-1503)에게 상속하는 한편, 차남인 지오반니를 위해 자금력과 정치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추기경의 자리를 확보하였습니다. 위대한 로렌초의 계획대로 차남 지오반니는 14살의 나이로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지오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3년 율리우스2세가 서거하자 불과 38살의 나이에 교황의 자리에 오릅니다. 레오10세는 그렇게 메디치 가문 최초로 추기경과 교황이 되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에서 교황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루이지 데 로시(Luigi de’Rossi, 1474-1519) 추기경입니다.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젊은 남성은 쥴리오 데 메디치(Guilio de’Medici, 1478-1534) 추기경입니다. 이 그림은 한 명의 교황과 두 명의 추기경을 그린 집단초상화입니다. 그림이 완성될 시기 레오10세는 44세, 루이지 데 로시 추기경은 45세, 쥴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41살로서 모두 40대 초/중반입니다. 이들은 서로 사촌 지간입니다. 레오10세에게 루이지 데 로시는 다소 먼 사촌인 반면, 작은 아버지인 쥴리아노 데 메디치(Guiliano de’Medici, 1453-1478)의 사생아인 쥴리오 데 메디치는 레오10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사촌입니다. 이 초상화는 레오10세를 중심으로 교황의 가문을 그린 집단초상화입니다.
이 그림은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은 주인공의 상체만 묘사한 반신 초상화입니다. 루이지 데 로시 추기경은 비록 관람자 쪽을 바라보지만 쥴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사선으로 선 채 화면 오른쪽을 바라봅니다. 그 사이에 교황이 앉아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 세 명은 역삼각형 형태로 배치되어 안정적인 구도를 형성합니다. 라파엘로는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에도 적용한 앉아 있는 콘트라포스토(seated contrapposto) 포즈를 레오10세에게 적용합니다. 몸통으로부터 두 팔을 길게 뻗은 채 상체는 크게 삼각형 형태를 이루며 보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전달합니다. 권좌에 앉아 있는 교황의 이러한 상체 구도는 <율리우스2세의 초상화>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렇지만 율리우스2세의 왼팔이 보다 상체에 가까운 반면, 레오10세는 책상 위에 팔을 올리며 보다 직선 형태로 상체로부터 더욱 멀어져 있습니다. 율리우스2세는 노쇠해 팔걸이에 팔을 무기력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레오10세는 단호한 의지로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린 듯 보입니다. 레오10세의 표정도 율리우스2세와 완전히 다릅니다. 굳게 다문 입과 화면 밖 무언가에 정확하게 시선을 고정하는 레오10세는 레오10세가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 중 한 명이라는 걸 충분히 느끼게 해줍니다.
<레오10세와 루이지 데 로시와 쥴리오 데 메디치의 초상 Portrati of Leo X, Luigi de’Rossi and Guiliano de’Medici>(1518-1519)은 워낙 유명하여 이미 19세기 말부터 미술사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 왔습니다.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이 그림을 공식 초상화(state portrait)로 보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입니다. 레오10세에 관한 공식 초상화라는 입장은 비교적 전통적인 해석으로서 근엄하게 묘사된 레오10세의 모습으로부터 그 근거를 찾습니다. 반면 점차 후대로 오면서 이 그림을 개인적인 초상화로 해석하는 견해가 더욱 우세해졌습니다. 비록 추기경은 교황을 보좌하는 역할이지만 공식 초상화에까지 이들이 등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 두 명이 교황과 인척 관계라는 데 주목하여 교황청의 요직을 차지한 세 명을 동시에 그려 가문의 영광을 기념하려는 가족 초상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술사학자 Nelson H. Minich(1942-)는 두 가지 견해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합니다. 레오10세는 율리우스2세 못지않게 대단히 호전적이며 게다가 메디치 가문의 후손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대단히 중시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돈과 여자를 사랑한 속물적인 교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inich는 레오10세의 감춰진 면모를 강조합니다. 레오10세는 이미 7살 때 탁발계를 받으며 종교인의 삶을 시작합니다. 신앙심은 그의 정체성의 일부였습니다. 레오10세는 실제로 신앙심이 높았고 교황의 직무를 역대 어떤 교황들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며 교황의 의무에 충실했으며 교회의 오랜 문제를 개선하는 데 상당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레오10세의 성향을 근거로 레오10세는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통하여 신실하고 근엄하며, 개혁적인 교황으로 보이고 싶어했다는 게 Minich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 그림이 가문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사적 목적도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통치했지만 그들은 왕족은커녕 유서 깊은 정통 귀족 가문도 아닙니다. 레오10세가 교황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메디치 가문은 여전히 상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해 운 좋게 권력을 잡은 어떻게 보면 졸부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메디치 가문은 레오10세 사후 1532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Karl V, 1500-1558)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Medici, 1510-1537)를 공작으로 봉하면서 귀족의 반열에 오릅니다. 레오10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작은할아버지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명문 귀족 가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레오10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인척들을 추기경에 임명하는 등 교회의 요직을 차지하며 교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척들을 추기경에 임명했다는 건 가문의 일원이 교황의 자리를 승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로베레(Rovere) 가문의 식스투스4세는 조카인 쥴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를 추기경에 임명합니다. 비록 식스투스4세 직후 교황은 다른 가문 출신의 인노센티우스8세가 승계했지만 돌고 돌아 쥴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제216대 교황에 선출되어 율리우스2세가 됩니다. 레오10세의 뒤는 네덜란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6세(Hadrianus VI, 1459-1523)가 계승하지만 그는 재위 21개월 만에 사망하고 1523년 11월 26일 제219대 교황으로 클레멘스7세(Clemens VII, 1478-1523)가 즉위합니다. 그가 바로 라파엘로의 집단초상화에서 레오10세의 오른쪽에 있는 쥴리오 데 메디치입니다. 레오10세의 사촌인 쥴리오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사상 두 번째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의 자리에 오릅니다.
Minich는 라파엘로의 집단초상화가 레오10세의 뒤를 이어 자기 가문이 차기 교황의 자리를 이어나갈 것임을 선언하는 예언적 의미를 가졌다고 해석합니다. 루이지 데 로시는 그림이 완성된 1519년 사망하지만 쥴리오 데 메디치는 마침내 교황이 됩니다. 45세에 교황이 된 클레멘스7세는 12년 동안 재위하고 56세인 1534년 9월 25일 선종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라파엘로는 제216대 율리우스2세, 제217대 레오10세 그리고 제219대 클레멘스7세의 세 교황의 초상화를 그린 겁니다.
6. 르네상스 교황들의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Make Rome Great Again)”
1309년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클레멘스5세가 자신의 거처를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긴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중세 시대 동안 로마 자체가 교황청이었습니다. 교황을 비롯하여 교황청을 구성하는 여러 추기경들과 그들의 가족, 하위직 사제들뿐만 아니라 각국 대사들, 교황청 시설을 운영·관리하는 일반 평신도들과 평민들, 상인계층 등 중세 시대 로마의 거주자들은 모두 교황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들 로마 사람들 모두 교황을 따라 이동해야 했습니다. 생계가 걸려 있었거든요. 그렇게 로마는 하루아침에 버려졌습니다. 도시의 시설을 유지할 인력도 남아 있지 않고 별도로 도시를 유지·관리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아비뇽 시대는 불과 70여년에 불과하지만, 1377년 그레고리우스11세가 되돌아왔을 때 로마의 상태는 참담했습니다. 로마는 야생동물들이 활보하고 잡초만 무성한 폐허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장 교황이 거처해야 하는 교황의 궁은 폐가나 다름없었습니다. 관리자 없이 70년 동안 버려져 있었으니 이는 당연합니다. 그레고리우스11세와 후임 교황들은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건축 프로젝트나 미술 작업을 의뢰합니다. 그렇지만 로마로의 재천도 이후 서방교회의 대분열이 발생함에 따라 로마 재건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은 대립교황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되돌아 온 후의 교황들이 도시재생 및 미화 사업을 추진해도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건 교황청 내부가 혼돈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결국 펠릭스5세를 마지막으로 대립교황의 시대가 끝나면서 1460년대가 되어서야 교황청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기 만들 위한 로마 재건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제208대 교황인 니콜라우스5세는 도로와 광장 및 성벽을 보수, 정비하였습니다. 게다가 라테란(Lateran)에서 지금의 바티칸(Vatican) 자리로의 교황궁 이전을 결정합니다.
라파엘로가 태어났을 당시의 교황이었던 식스투스4세는 로마 재건과 관련 미술 사업을 본격 추진합니다. 교황은 고대의 미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벨베데레 궁전(Palazzo del Belvedere) 조성을 비롯한 여러 건축 작업과 개인 예배당의 장식 사업을 지시하였습니다. 건축 및 장식 등의 미술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식스투스4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술가들을 불러 모읍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에는 미술가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식스투스4세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3),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inico Ghirlandaio, 1448-1494) 등의 미술가들을 로마로 소환합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성공이었습니다. 전임 교황들이 부른 미술가들이 주어진 작업을 마치면 로마를 떠났듯, 식스투스4세 역시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로마에 붙잡아 놓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당대의 로마는 로마 제국 시기에 조성된 장엄한 건축물, 아름다운 조각상, 흥미로운 동전이나 유물들이 넘쳐나는 도시지만 이는 오히려 권력과 세월의 무상함을 돋보이게 할 뿐 로마는 쇠락한 도시로 보였습니다. 미술가들은 고대의 유물을 수집하고 유적과 조각상을 면밀히 연구하였지만 그들의 관심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전임 교황들과 식스투스4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여전히 전혀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술가들이 로마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고 로마는 고유한 미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216대 교황이 된 쥴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삼촌인 식스투스4세를 자신의 롤모델로 설정합니다. 율리우스2세는 식스투스4세처럼 로마 재건을 위한 다채로운 토목 및 건축과 미술 사업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로마의 지속가능한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계속 머물게 만드는 게 관건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단히 호전적인 성격의 율리우스2세는 엄청난 카리스마로 미술가들의 로마 체류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설득과 회유를 더욱 선호했습니다. 그는 미술가들에게 로마 재건과 해당 미술 작업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미술가들의 작업을 독려하였습니다. 자신과 미술가들의 파트너 관계를 부각한 거죠.
무엇보다 율리우스2세는 지속적으로 미술 사업들을 발주함으로서 미술가들을 다른 궁정 사회에 뺏기지 않고자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은 일반적으로 일감과 더 나은 보수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활동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리랜서인 거죠. 율리우스2세는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여러 값비싼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발주하였습니다. 율리우스2세는 그렇게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는 각각 뛰어난 건축가, 조각가, 화가를 확보하고 이들에게 계속 일감을 맡기며 로마에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합니다.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는 율리우스2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및 라파엘로를 로마에 상주시킴으로서 비로소 로마는 로마만의 미술문화를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미술사학자 Evelyn Welch(1959-) 역시 율리우스2세 덕분에 미술가들은 로마를 머물고 싶은 도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율리우스2세는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으로 과업을 지시하며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대대적인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로 로마를 쾌적한 도시로 단장하고, 로마 제국의 유물과 유적을 복원하여 미술가들이 고대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미 16세기부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여러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도 후배 미술가들이 로마에 머물고 싶은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로마는 미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율리우스2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레오10세는 전임자의 유지를 대부분 계승합니다. 레오10세는 연회를 즐기고 사치스러웠는데 이러한 그의 성향은 오히려 이 시기 미술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추기경이었을 때 자신의 사저를 준공시키고 실내 장식을 주문하여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 1472-1517)가 조각과 벽화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레오10세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과 미술 후원에 익숙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 후원자 집안입니다. 특히 레오10세의 아버지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미술 후원자로 평가받습니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자신을 위한 사적인 목적에서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피렌체 시를 위한 상당수의 미술들을 주문하였습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10대의 미켈란젤로를 발굴하고 그가 피렌체에서 조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레오10세이므로 교황이 된 이후 레오10세는 로마를 재건하기 위하여 여러 미술 작업들을 지시합니다. 그는 율리우스2세가 중용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지속적으로 기용합니다. 율리우스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틴 채플의 벽화 제작을 의뢰하여 미켈란젤로의 화가로서의 역량을 개발했던 것처럼, 레오10세는 라파엘로의 건축가로서의 활동을 보장해줍니다. 1514년 브라만테 사망 후 레오10세는 라파엘로를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Architetto della Fabbrica)에 임명하며 성 피에트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 건축을 책임 감독하도록 지시합니다. 레오10세는 라파엘로에게 로마의 유적 조사와 복원 책임의 자리까지 임용합니다. 레오10세의 라파엘로에 대한 신뢰는 율리우스2세 못지않으며 라파엘로가 교황청 미술 사업 전체에 관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오10세는 부친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전임 교황 율리우스2세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미켈란젤로 역시 신뢰하며 이 둘을 모두 적절히 기용하였습니다.
라파엘로가 사망할 즈음 로마는 유럽의 미술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 명성은 약 300년 간 유지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미술가들에게 로마는 종교뿐만 아니라 미술의 차원에서도 불멸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미술가들은 로마를 죽기 전에 반드시 순례해야 하는 도시로 추앙하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위상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비록 로마는 현대미술의 중심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서 현대인들이 꼭 방문하고 싶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 로마를 영원의 도시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율리우스2세와 레오10세와 같은 르네상스 교황들입니다.
7. 미술 후원자로서의 교황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된다!
교황이 국가 수장인 바티칸 시국은 여의도의 약 10분의 1 크기인 총 면적 0.44㎢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입니다. 하지만 바티칸은 상당한 존재감을 지닌 나라입니다. 단지 교황의 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산 피에트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에서 손꼽히는 역사적인 건축물이 바티칸 시국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는 대형 박물관이 존재합니다. 식스투스4세의 명에 따라 조성된 벨베데레 궁은 현재는 바티칸박물관(Musei Vaticani)으로 개조되어 운영 중입니다. 박물관은 <라오콘 Laocoön>과 <아폴로 벨베데레 Apollo Belvedere>와 같은 고대 조각상을 비롯하여 라파엘로의 <폴리뇨 마돈나 Madonna di Foligno>(1511-1512)나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의 <그리스도의 매장 The Entombment>(1603-1604) 등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바티칸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방문자 수가 가장 많은 박물관 중 하나입니다. 2024년 한 해에만 680만 명 이상이 방문하였고, 연간 약 1억 달러($), 한화 약 1,200억 원의 수익을 거둬들이는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고자 바티칸을 방문하지만, 박물관의 미술품 관람 역시 바티칸을 방문하는 주요 이유입니다. 그 정도로 바티칸박물관과 바티칸이 소유한 양질의 소장품은 바티칸 시국을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어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2024년 기준, 바티칸박물관에는 총 780명이 근무하며 협력업체 직원을 더하면 약 1,000명이 근무 중입니다. 박물관/미술관은 외지(外地)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서 지역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게다가 박물관/미술관은 기관 운영을 위한 인력이 필요해 상당한 고용 창출 효과를 지녔고요. 여의도 면적의 고작 10분의 1에 불과한 나라의 박물관에만 이 정도의 인력이 근무한다는 건 고용 창출 능력이 상당히 높다는 걸 뜻합니다. 박물관/미술관은 폭넓은 일반 대중이 미술품과 유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미술품을 개인이 소장한다면 미술품 향유는 개인이 독점합니다. 하지만 박물관/미술관을 운영하는 건 특정 개인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그 혜택을 제공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현대의 바티칸 시국이 르네상스 교황들의 시대와 달리 동시대 미술가들에게 미술품 제작 주문에 소극적이더라도, 박물관/미술관을 운영하여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미술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해 나가는 겁니다. 다만 창작자가 아닌 복원가, 학예사와 같은 이차적인 전문가들과 일반 대중이 수혜자라는 게 차이일 뿐이죠.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의 교황들은 르네상스 교황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