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화 항쟁이 한국 사회와 미술에 남긴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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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1987>
2017년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이 개봉합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입니다. 1월 14일 고문을 받던 대학생의 죽음으로 영화는 시작되고 영화는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과정들이 전개됩니다. 영화 후반부에는 그 대학생이 고문치사로 사망했다는 진실이 밝혀진 후 반(反)정부 시위가 발생합니다. 시위 참가 학생으로 강동원 배우가 등장하는데 강동원 배우는 머리에 시위를 진압하는 군경이 쏜 최루탄 총을 맞습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린 또 다른 시위 참가자가 그를 껴안고 교내 안으로 피신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방탄 헬멧을 쓴 기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그려집니다.
영화 <1987>은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영화 초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하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은 박종철(1964-1987)님입니다. 강동원 배우가 연기한 인물은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1966-1987)님입니다. 그를 부축한 손수건 마스크를 두른 인물은 연세대학교 도서관학과의 이종창(1965-)님이고요. 이 둘을 찍은 사진작가는 당시 로이터(Reuter) 통신의 정태원(1939-) 기자입니다. 정태원 기자의 사진은 중앙일보와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등의 언론에 실렸습니다. 정태원 기자가 찍은 당시 보도 사진은 반정부 시위에 대한 당시 전두환(1931-2021) 정부의 폭력 진압 실태를 국내·외에 널리 알린 공로로 AP 통신에 의해 20세기 100대 보도 사진 중 하나에 선정되었습니다.
2. 고등학교 중태의 노동자 미술가, 최병수
20대 중반의 청년 최병수(1960-)는 신문에서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을 접합니다. 최병수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한광상업전수학교(현 예림디자인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한 후 생업에 뛰어듭니다. 신문팔이부터 중국집 배달원, 수리공, 용접공, 목공 일 등을 가리지 않던 소년 최병수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김환영 작가(1959-)를 통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 학생들을 알게 됩니다. 당시 홍대 미대생들은 전두환 정부를 비판하는 벽화나 포스터 작업들을 벌였는데 최병수는 그들이 벌인 “신촌 벽화사건”이나 “정릉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본의 아니게 경찰 조사를 받습니다. 이에 분노한 최병수는 미술을 통한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하고 동료들로부터 미술을 배우며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민족미술인협의회(현 민족미술인협회)”의 벽화 분과에 가입한 후 홍대 미대 출신의 류연복(1958-)과 함께 <연세대학교 100년사>를 작업합니다. 그러던 27살의 최병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에서 평범한 대학생이 피격을 당한 모습에 극심한 분노를 느껴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최병수는 대형 천막에 보도 사진의 배경만 생략하고 그대로 재현한 후 이러한 문구를 넣었습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최병수의 천막 그림은 후에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3. 민중미술과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애초부터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되어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게 아닙니다. 최병수의 그림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외벽에 걸려 교내 모든 사람들에게 평범한 학생이 당한 비극을 알릴 목적으로 그려진 이른 바 걸개그림입니다.
최병수가 가입한 “민족미술인협의회”, 일명 “민미협”은 1985년에 창립되었습니다. 민족미술인협의회의 강령은 “미술운동이 인간해방 운동으로서 민주화, 민족통일이라는 대과제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였습니다. 최병수가 가입한 벽화 분과를 비롯한 여러 분과들로 구성된 민미협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미술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 미술계의 주된 특징은 민중미술입니다. 박생광(1904-1985), 신학철(1943-), 오윤(1946-1986) 등의 미술가들은 한국의 토속적, 민족적인 소재들을 적극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열등한 미술 장르로 여겨졌던 판화나 야외 그림들 제작에 몰두하였습니다. 민족미술인협의회 역시 이러한 가치관을 계승하며 1980년대 민중미술의 발전에 공헌합니다. 민중미술은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하여 추상미술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고 직관적인 내용들의 구상미술을 지향하였습니다. 게다가 실용적인 매체나 도구들을 활용하거나 파급력이 큰 매체를 선호하였습니다. 오윤과 민중미술가들이 판화 작업에 몰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걸개그림은 민중미술가들에게 선호되었습니다. 걸개그림은 주로 야외 대형 공간에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볼 목적으로 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걸개그림은 거대한 크기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며, 그려지는 대상은 분명하고 선명하여야 하며, 중요 부분만을 간결하게 제시되는 편입니다. 탱화 역시 걸개그림의 일종으로서 걸개그림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부터 사회운동과 본격적으로 결합하여 1980년대에는 대학가와 노동 운동 현장에서 애용됩니다. 민화 동아리, 판화 동아리 등과 같은 미술 동아리에서는 판화, 벽화와 함께 걸개그림 제작 방법이 전수되었고 이렇게 완성된 걸개그림들은 실제 집회 현장에서 사용되며 실용적·대중적 미술의 아이콘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걸개그림은 집회나 시위에서 실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빠르게 완성되어야 했습니다. 1980년대는 여러 단체들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발생한 시기로서 걸개그림에 대한 수요가 대단히 높았습니다. 크기도 크며, 당일에 사용되지 못하면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에 반드시 기일 내에 완성되어야 했으므로 걸개그림은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작업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걸개그림은 미술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나 완결성뿐만 아니라 독창성이나 창조성 역시 부족합니다. 창작자의 단독 역량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핵심 창작자의 표현력은 각자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시기 다른 미술가가 주도한 걸개그림들이나 혹은 같은 작가의 후속 걸개그림들과 비교 작업을 통해 미술가 개개인의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핵심 창작자가 그림의 주제를 기획하기 때문에 주 창작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림의 의도가 전달되어 창작자의 제작 의도가 구현되었는지, 즉 그림의 후속 효과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림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4. Korean modern Pietà <한열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이러한 걸개그림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릅니다. 최병수 작가가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그리겠다는 취지를 처음 밝혔고 그를 도와 문영미와 문태영이 가로 750㎝, 세로 1,000㎝의 광목천에 빠른 시간 내에 완성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은 이한열 열사가 사망한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 내 분향소 맞은편의 학생회관 정면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최병수 작가는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을 걸개그림뿐만 아니라 고무판화로도 제작하였습니다. 가슴 부착을 목적으로 가로 10.5㎝, 세로 16.2㎝의 크기로 제작되어 대중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이 판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연세대 총학생회 측은 4,000여 장을 추가 제작하여 한 장당 200원에 판매 했는데 이 역시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고무판화 뿐만 아니라 목판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목판화는 고무판본보다 큰 가로 30㎝, 세로 46㎝로서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 그리고 이 사진이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제목의 걸개그림과 판화 미술로 재탄생하고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사람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과 최병수 작가의 걸개그림과 판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2025년의 현재를 사는 제 눈에는 이 이미지가 피에타(pietà)로 보입니다.
피에타 하면 대부분의 분들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Pietà>(1498-1499)를 떠올리실 겁니다. 피에타는 십자가 책형을 받아 죽음을 맞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성모 마리아가 잡고 있는 모습을 통칭하고 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체 접촉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보다 엄격한 규정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장 유명하지만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성모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 모습은 피에타 도상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보다 성모가 그리스도를 뒤에서 껴안는 모습이 일반적인 피에타 도상입니다.
피에타 도상에서는 그 메시지가 더 중요합니다. 로마 군대에 체포된 예수는 모진 고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합니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어머니인 마리아와 제자인 사도 요한(John the Evangelist)에게 인계된 상황입니다. 피에타는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했고, 성모 마리아가 왜 가톨릭 최고 성인으로 추앙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는 게 우선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류보편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유대교 기득권의 권위에 도전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혁신가였습니다. 권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 지도자들은 로마 군대의 힘을 빌려 그 혁명가에게 폭력을 자행했고 결국 그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하려던 선지적인 인물의 희생과 살아 있는 혹은 남겨진 사람들이 혁명가와 신체를 접촉한 채 그의 희생을 애도함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인류애를 일깨워줍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는 실존인물이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 역시 실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기존의 권력과 권위주의에 개혁을 요구한 개인에게 자행된 폭력의 역사이며, 피에타 도상은 그 혁명가에게 발생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중세 이래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시간 순서에 따라 세분화 되어 개별 도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남자를 보라”라는 뜻의 “에체 호모(Ecce Homo)”나 “비탄에 빠진 남자”라는 의미의 “Man of Sorrows” 등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의 폭력성과 광기를 증언하는 도상입니다. 반면에 피에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의 시신을 그의 친어머니가 마주하는 상황을 제시하여 폭력적 사건을 간접적으로 제시하여 사람들의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태원 기자의 사진과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전까지 과격하게 진행되는 반정부 시위에 동료 대학생들의 거부감이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한열 열사의 피격 직후 연세대 학생들이 최병수 작가의 판화 그림을 앞 다투어 사가고 반정부 시위에 적극 동참했다는 점에서 이한열 열사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보편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데 대단히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종교적인 의미는 전혀 없지만, 개혁을 요구하던 개인을 기득권이 공권력으로 폭력적으로 진압해 희생을 당한 사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남겨진 자가 희생된 혁명가와 신체적으로 연결되어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 그리고 이를 미술로 승화한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피에타의 본질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정태원 기자의 사진과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Korean modern Pietà”, “한국의 현대적 피에타”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5. 6월 민주화 항쟁, 그리고 새 시대의 시작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대회>에서 피격되었습니다. 6·10 대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 시위였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피격 보도로 국민들의 분노가 극심해졌고 예정대로 6월 10일 서울 및 전국 22개 도시에서 국민들은 호헌철폐와 전두환 정부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른 바 “6월 민주화 항쟁”이 본격 시작된 겁니다.
민주화 운동이 격화되자 6월 29일 전두환의 최측근이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1932-2021) 대표는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국민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여 자유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8대 사항과 더불어 개헌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 대회가 개최된 1987년 6월 10일에서 노태우 대표가 <6·29 선언>을 발표한 1987년 6월 29일을 일반적으로 6월 민주화 항쟁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한열 열사는 피격 25일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향년 20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지기로 결정됩니다. 장례식에 맞추어 최병수 작가는 <이한열 영정>을, 최민화(1954-) 작가는 이동식 걸개그림으로 <그대 뜬 눈으로>(1987)를 제작합니다. <그대 뜬 눈으로>는 이한열 열사의 초상과 정태원 기자의 보도 사진 및 6월 민주화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붉은색과 파란색을 강렬하게 대비시킨 작품입니다. <이한열 영정>과 <그대 뜬 눈으로>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당일 행렬에 앞장서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그의 공헌을 강렬하게 각인시켜주었습니다.
<6·29 선언>에 따라 「대한민국헌법」 전부개정안이 1987년 10월 29일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당시의 대통령 전두환은 기존 헌법의 제45조 규정대로 7년의 임기 종료 후 차기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 해 12월 16일에는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됩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국민들의 열망이 반영되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16년 만에 실시되는 직선제 투표입니다. 투표율은 총 89.15%였으며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전부개정된 헌법의 부칙 제1조의 내용대로,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헌법」 제10호가 정식 시행되고, 제13대 대통령이 공식 취임함으로서 그토록 바랐던 국민주권이 마침내 승리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은 1988년 2월 25일 출범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2025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중 제6공화국은 38년째 이어져 오며 대한민국 정부 역사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제6공화국은 오래 지속된 것뿐만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을 시작으로 21대 이재명(1963-)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 9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위헌적 행위로 재임 중 탄핵되어 보장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은 있었지만 헌법 제70조에 규정된 5년의 임기를 초과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제6공화국 체제에서는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체제가 완비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일정 연령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직접 국가 원수와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자체적으로 지역의 사무를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리, 지방의회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언론과 집회를 비롯하여 이동의 자유와 더불어, 성별, 장애 여부, 출신지, 출신국가, 성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심지어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 등의 2025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권리와 자유가 바로 이 제6공화국 시기에 정착되었습니다. 제6공화국, 혹은 87체제로도 불리는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 레짐(regime)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6월 민주화 항쟁 덕분입니다. 그리고 6월 민주화 항쟁이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이한열 열사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 1987, 그 30년 후
장준환 감독의 <1987>이 개봉된 시기는 우연이 아닙니다. 2017년은 6월 민주화 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각계 각 층에서 민주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와 활동들이 이어졌습니다. 4·19혁명에서 6월 민주화 항쟁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한 자료들과 관련 예술품까지 수집·보관하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총체적으로 기념하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소장 작품들을 중심으로 2017년 6월 민주화 항쟁 30주년 기념 기획전시를 개최하였습니다. 《민중미술 2017》은 이한열 열사 피습일인 6월 9일에 맞추어 부산가톨릭센터 대청갤러리와 부산민주공원에서 각각 진행되었습니다. 대청갤러리에서 진행된 <가야하네!>는 한국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주제로 한 전시로 사업회 소유 16점의 민중미술 작품들을 선보이며 7월 9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민주공원에서는 8월 27일까지 노동의 역사와 가치를 되새기는 취지의 <노동자는 노동자다> 전시가 선을 보였습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전시에 소개된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소유의 18점의 민중미술 작품 중에는 이윤주(1980-) 작가의 <Too Young>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림에는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린 사람들을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화면 뒤쪽에는 사람들이 막대기를 들고 서 있고 전면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연기가 나는 소주병을 앞으로 던지기 직전의 사람들이 위치합니다. 그들이 던지려는 소주병의 정체는 화염병입니다. 과거 화염병은 “꽃병”으로도 불렸다고 하네요. 이 그림은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기 직전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윤주 작가는 1980년 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014년에서 2015년 사이, 6월 민주화 항쟁 당시의 사진을 접하였고 당시의 기록 사진을 <Too Young>이라는 작품으로 재창조했다고 합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고 6월 민주화 항쟁 30주년 기념 기획전시인 <노동자는 노동자다>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윤주 작가의 <Too Young>은 6월 민주화 항쟁이 1987년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 한국의 동시대 미술가들에게도 여전히 영감을 주고 있음을 입증해줍니다.
6월 민주화 항쟁 30주년이 되던 2017년 강원택(1961-)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한 『6·29 선언과 한국 민주주의』가 발간되었습니다. 대부분 6월 민주화 항쟁에 대해 집중할 때 학계는 <6·29 선언>에 주목하여 <6·29 선언>의 성과와 한계 등을 폭넓게 고찰하였습니다. 대표저자인 강원택 교수는 군부 독재정권인 전두환 정부에서 완전한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 사이의 과도기 정부에 불과하다고 평가된 노태우 정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습니다. 비록 노태우 정부 출범은 당시 민주 진영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군인 출신인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제6공화국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지 않고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1962년부터 무려 26년 동안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제6공화국 출범으로 일순간 권력을 잃었다면 군부가 체제 전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지적한 겁니다.
바바라 F. 월터(Barbara F. Walter, 1964-) 교수는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How Civil Wars Start』(2022)에서 20세기 전 세계에서 발생한 내전 사례를 연구하여, 권력을 장악했던 기존 세력이 일순간 권력을 잃거나 소외될 경우 그에 반발하여 무력을 활용하여 권력을 재탈환하려는 과정에서 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실제로 군인 출신인 노태우는 전두환에 비해 훨씬 유연한 사고관을 지녔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후, 전두환의 측근들을 직접 숙청하고 제14대 대선 과정에서 군인 출신을 여당 대선 후보에서 배제하며 군인들의 정치 개입을 원천 차단하였습니다. 이렇게 제6공화국 출범 초기 군인 출신의 노태우가 차근차근 군부가 독점한 권력을 해체해 나감으로서 차기 김영삼(1929-2015) 정부 시기 하나회를 해체하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습니다. 강원택 교수와 『6·29 선언과 한국 민주주의』의 공동 집필진은 <6·29 선언>은 기존 독재 세력과 민주 진영의 타협의 결과이지만 오히려 극단적 대립을 피했기 때문에 제6공화국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으며 제6공화국 시기 동안 대한민국은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이양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7. 2024년, 2025년 현재
『6·29 선언과 한국 민주주의』에서 강원택 교수는 다음과 이야기합니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 우여 곡절을 겪어 왔지만,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컨대 군부의 쿠테타, 폭력을 수반한 대규모 폭동, 최고 권력자의 정권 연장 기도 등 1987년 형성된 한국 민주주의 기본 틀을 깰 수 있는 정치적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 비교적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진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2024년 12월 3일 1987년 형성된 한국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깨질 수 있는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군부를 이용해 정권 연장을 시도하려는 목적으로 불법 비상계엄을 발동한 겁니다. 12·3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45년만의 계엄이자 제6공화국 출범 후 처음입니다. 위헌적 계엄은 국회의 빠른 해제 결의안 가결로 발동 5시간 20분 만에 해지되었지만 본격적인 내란 극복은 이제부터입니다. 2025년 6월 5일 「내란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하며 제6공화국 출범으로 “비교적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진전되어 왔”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던 사태의 진상이 규명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
12·3 내란을 통해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건 너무나 어렵지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는 대단히 깨지기 쉽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 코 흘리게 꼬꼬마였던 저는 당시 사회가 얼마나 권위적인 사회였는지 여렴풋하게나마 아직도 기억합니다. 대통령은 최고 존엄으로서 그의 이름은 물론,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도 불경이었습니다. 대통령을 희화화하거나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표현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그 해 새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그 대통령은 수시로 “저 노태우, 물같은 사람입니다. 보통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코미디 프로에서는 개그맨이 그런 현직 대통령으로 분장해서 성대모사를 구사했고 대통령의 말은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고작 국민학생이었던 저는 잘 모르지만 그 때 같이 티비를 보던 부모님은 세상 참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그의 후임 대통령은 이니셜로 불렸고, 그가 주인공인 <YS는 못 말려>라는 만화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좌충우돌하는 현직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대통령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친숙한 옆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대통령의 이미지는 제15대 김대중(1924-2009) 대통령 시기에 더 커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후임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으로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그의 서민적인 행보는 전례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던 것도, 대통령의 부인을 영부인이라고 부르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21세기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비록 잠시 후퇴한 적은 있지만 전반적인 민주주의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그러다 2024년 12월 3일 발생한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사건”으로부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1987년 6월 우리 선배 세대들이 이룩한 유산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선배 세대들은 우리에게 지금의 민주주의를 선물해 주었고 저와 같은 후배 세대들은 그걸 편안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세대의 의무는 이 민주주의를 온전히 수호해 다음 세대에게 안전하게 물려주는 겁니다. 후배 세대들은 앞으로 더 민주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