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어느 종군화가가 기록한 한국전쟁

단광 우신출의 6·25전쟁 참전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

by 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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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에 참가한 거장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 https://youtu.be/g1pjkUgsC9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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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당장 전쟁이 발생한다면?

2025년 6월 현재, 대한민국에 전쟁이 발생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노약자와 여성 등 대부분의 민간인은 피난을 떠날테고, 만18세에서 만30세의 청년 남성들은 징집 대상이어서 입대할 겁니다. 징집 대상이 아닌 대한민국의 남성분들이라면 유사 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의무 징집 대상이 아니니 나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지만 군대에 자원입대한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우리 선배 세대들은 둘 중에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으로 국제법을 위반하며 한국전쟁, 이른 바, 6·25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발생 초기, 만18세에서 만30세의 남성은 징집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인 남성들이 북한의 적화 통일을 막기 위해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많은 지식인, 예술가들과 미술가들도 동참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뿐만 아니라 장발(1901-2001), 이마동(1906-1981), 박득순(1910-1990), 박영선(1910-1994), 남관(1911-1990), 장우성(1912-2005), 손응성(1916-1979),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과 장욱진(1918-1990) 등 수많은 미술가들이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40살의 우신출(1911-1991)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신출, <자화상> (1934)


2. 교육자이자 미술가 우신출

1911년 부산 수정동에서 태어난 우신출은 화가의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반대했다고 합니다. 소년 시절, 그는 돌연 부산 금정의 범어사로 출가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진로에 대한 부모님과 자신의 의견 차이로 방황하여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신출, <20대 후반의 자화상> (1933)


그는 환속 한 후, 부모님의 바람대로 1934년,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수정사립보통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1938년에는 부산 초량의 초량상업실수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장학사까지 진출합니다. 1954년 7월 22일에는 기장군 최초의 중학교인 기장중학교가 개교하는데, 우신출은 10월 5일 초대 교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렇게 우신출은 52년 동안 교직생활에 몸담으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사로 활동하였지만 우신출은 화가로서의 꿈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소학교 졸업 후부터,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고 교사로 재직한 후에도 그림 공부를 병행하였습니다.


우신출, <영가대> (1929)


우신출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틈틈이 그림에 대한 기량을 갈고 닦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17, 18살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미술가로 활동한 그의 미술 인생은 63년으로 교직 생활보다 더 깁니다. 그는 1938년 초량상업학교에서는 도화(圖畫), 그러니까 미술 선생으로 재직했으니 자신의 꿈과 부모님의 바람 사이의 절충점을 찾았기 때문에 화가와 교사를 평생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신출, <부산 사상에서> (1935)


실제 미술가로서의 커리어 역시 교직 생활보다 앞섭니다. 우신출은 1928년부터 1942년까지 총 12회 개최된 부산미술전람회에서 1931년 제4회를 시작으로 제5회, 제6회, 제7회, 제9회, 제10회, 제11회의 총 일곱 차례 출품하였습니다. 부산미술전람회는 제1회에는 (서)양화 부문만 개설되었으며 일본인에게만 출품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이후 1929년 제2회 전부터 일본화 부문 신설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출품도 허용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인에게는 총 11번 참여 기회가 주어졌다는 건데, 우신출은 한국인 가운데 가장 많이 참가하며 부산미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후,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 동안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참가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 일명 선전은 1922년부터 시작된 일제 강점기 한반도 최고 권위의 공모전이었습니다.


3. 종군화가 우신출

예고없이 발생한 전쟁으로 6월 28일 서울이 함락 당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8월 18일 부산까지 내려왔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절재절명의 위기에서 온 국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우신출은 1950년 동료들과 함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구국대”를 조직해 입대했고 육군 3사단 22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의 우신출과 동료 예술가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의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며 남한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우리군은 그 여새를 이어나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완전히 축출하고자 북진합니다. 부산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 강원도 고성 등의 동해안선을 따라 종군하는 이른 바, 동부전선(혹은 동해전선)이 이루어지고 우신출은 동료들과 함께 종군화가로서 북진합니다. 우신출은 동부전선 동안 국군과 함께 북진하며 전쟁으로 파괴된 시가지, 공병들의 활동, 피난민들의 일상, 탈환에 성공한 지역에서 국군들을 환영하는 민간인들의 모습 등 전쟁에 관한 기록을 비롯해 탈환지역의 풍광 역시 그렸습니다.


우신출, <폐허가 된 동네(서울에서)> (1950)


그는 동부전선 기간 동안 총 89점의 스케치 및 수채화와 6장의 일기를 남기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원산탈환 직전까지 국군과 함께 한 우신출은 1951년 2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구국대와 함께 부산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순회전인 <이동미술전>에 참여합니다.


우신출, <환도(양양에서> (1950)



4.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 우신출

1953년 7월 27일 남한과 북한은 공식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한국은 일상 재건에 돌입합니다. 우신출은 교단으로 돌아갔고 1954년 10월 5일 기장중학교의 교장직을 맡습니다. 미술 작업을 병행한 그는 1975년부터 시작된 초대 부산미술대전에 출품하여 후배 화가들의 참여를 독려하였습니다. 이후 부산미술대전의 심사위원장에 위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부산일요화가회에서 24년 동안 지도하며 후배 미술가 양성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 우신출 화백은 1991년 10월 23일, 부산 기장의 해동용궁사에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심장마비로 향년 81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우신출, <을숙도 설경> (1986)


우신출 화백은 평생 묵묵하게 부산 미술계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부산 지역의 아이들 교육 환경 개선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총 1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그 때마다 발생한 수익금의 대부분은 교장으로 재직했던 학교들에 기부했습니다. 그 결과, 1955년 기장중학교 교실 8개 신축, 1961년 4월 동래중학교 도서관 확충, 1965년 10월 및 1968년 5월에는 남(南)여자중학교(현 부산영선중학교) 시청각 기재와 도서 구입, 1973년 12월에는 중앙여자중학교 복지시설 마련을 이루어내었습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한 열정과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을 결합하여 종군화가로 자원입대해 헌신했듯, 휴전 이후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그로 인한 수익금을 아이들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평생에 걸쳐 미술가이자 교육자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실천하였습니다.


우신출, <풍경> (1967)


5. 아버지의 정신을 계승한 우신출 화백의 유가족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런 정신을 본받았습니다. 우신출 화백 사후인 1992년 9월,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가족들은 여러 그림들 가운데에서 동부전선 시기의 스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우신출, <위문문(고성에서> (1950)


유가족들은 2011년 우신출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관련 자료 전체를 전쟁기념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하고 『6·25전쟁 동해전선 從軍스케치 모음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유가족들은 조국 사랑을 몸소 실천한 부친의 열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증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기증품은 이듬해인 2012년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특별기획전: 전선야곡>을 통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지금은 전쟁기념관 3층 기증실에 비록 디지털 자료 형태로지만 기념관 방문자들에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우신출, <공병의 5분 간 휴식> (1950)


우신출 화백의 둘째 아들인 우성하 선생(전 S&T중공업 상임고문)은 2012년 3월 24일 경주시청에 아버지의 유작 두 점을 기증하였습니다. 우성하 선생은 기증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버지의 유작을 경주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림을 통해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당시 우성하 선생이 기증한 작품은 신라시대 경주를 소재로 한 1941년 완성된 <첨성대를 바라보며>와 1955년의 <다보탑>입니다.


우신출, <첨성대를 바라보며> (1941)


이에 최양식(1952-) 당시 경주시장은 우신출 화백의 유가족의 기증에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습니다.


우신출 화백의 이번 기증으로 우리 사회의 문화나눔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며 (중략) 우신출 화백의 작품을 경주시민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첨성대를 바라보며>는 경주시청 로비에, <다보탑>은 불국사에 전시되었습니다.


우신출, <다보탑> (1955)


6. 2025년 현재, 한국전쟁의 의미

2025년은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전쟁은 1948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각기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자신들이 정통이며, 상대는 괴뢰 정부라고 주장하던 중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전쟁은 “외전(外戰)”이자 “내전(civil war)”이기도 한 전쟁입니다. 아울러, 단일 민족 사이에서 벌어진 유일한 현대전입니다.



해마다 6월 25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목숨을 바쳐 싸운 호국영령들을 기리며, 참전 용사분들의 애국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아직 휴전 상태인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과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전쟁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가치관, 생각이 상대에 대한 혐오감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심각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는 2010년대 이후부터 양극화와 소위 갈리치기로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와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과 무력을 이용해서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게 표현되곤 합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에 2025년 현재 우리에게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이유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지나기 전, 한국전쟁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여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신출 화백의 발자취를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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