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한국 미술계와 이쾌대의 <군사-1> 혹은 <해방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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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직후 우리 미술계가 광복을 기뻐하지 못한 이유: https://youtu.be/6z2vegv3T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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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0년 전, 8월 15일 광복,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昭和, 1901-1989)은 낮12시 뉴스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개최된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에서 일본이 타이완 섬을 비롯한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내용이 제기되었고 무조건적인 항복은 포츠담 회담의 내용에 따라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킨다는 뜻입니다. 이로서 한반도는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이후 34년 11개월 동안의 일본의 잔악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광복 다음날인 8월 16일 우리 민족에 의한 국가 재건을 목표로 여운형(1886-1947)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됩니다.
우리 민족의 염원과는 달리, 광복 직후 한반도는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8월 24일 소련 군정이, 9월 9일에는 남쪽에 미군정이 수립되었습니다. 광복으로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자체 군병력이 없었던 한반도의 질서와 치안 유지가 목적이지만 실상은 자유주의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이 자신들의 진영을 확대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1945년 12월 6일 개최된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좌우 대립이 더욱 격화되는 데 기름을 붓는 사건입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를 미국·영국·소련·중화민국이 최고 5년 동안 신탁통치하는 방안이 제기됩니다. 군정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기준을 각 지역을 분리 관할하는 반면, 신탁통치는 네 개의 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국제기구 형태로 공동통치하는 방식입니다. 신탁통치안이 알려지자마자 우리 민족은 신탁통치를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1946년 1월 소련이 공식적으로 신탁통치를 찬성하자 여운형, 박헌영(1900-1956), 김일성(1912-1994) 등의 좌파 인사들 역시 입장을 바꾸며,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김구(1876-1949), 이승만(1875-1965)과 같은 자유주의 우파와 더욱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맛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2. 광복 이후 혼란스러운 한국 미술계
광복 다음 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듯, 문화계 역시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합니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와 더불어 조선미술건설본부의 네 개의 산하 단체로 구성되었습니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문화 해방과 우리 민족의 단합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전국 단위에서 이데올로기 구분 없이 모든 미술가들의 참여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이내 이데올로기에 따라 분열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 9월 15일 좌파 미술가들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탈퇴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을 조직하였기 때문이죠. 좌파 세력이 빠져 나가니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우파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미군정이 장악한 서울에서 결성되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우파 지향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우파적 성향은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났습니다. 97명의 미술가들이 총 132점의 작품을 출품해 1945년 10월 10일에서 10월 20일까지 덕수궁 석조전에서 진행된 <해방기념미술전람회>는 광복과 미국 군대의 한반도 주둔을 기념할 목적이었기 때문이죠. <해방기념미술전람회>는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1월 20일 조선문학건설본부가 좌파 조직인 프로문학동맹과의 통합 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이에 반발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탈퇴와 자진 해산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조선미술건설본부의 미술가 일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을 주축으로 다시 조선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이 조선미술협회는 오늘날의 한국미술협회의 전신입니다. 조선미술협회에 합류하지 않은 미술가들은 1946년 1월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실상은 중도 우파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독립미술협회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이나 조선미술협회와 차별화를 모색하였습니다.
광복 직후, 여러 단체들의 출범은 오히려 한국 미술계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단발성의 단체전 개최 후 해산하였으며, 조형적 이념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집결했기에 반대 이데올로기의 미술가 단체에 대항하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 시대 동안 우리 미술계를 장악했던 일본 미술계의 흔적을 극복하고 새 시대의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기 위한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3. 이쾌대 <군상-1> 혹은 <해방고지>
심지어 해방이 당시 미술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광복, 해방, 독립을 주제로 한 당대의 미술 작품은 현재 이쾌대의 《군상》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 <군상-1> 혹은 <해방고지>(1948) 이외에는 별다른 예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쾌대(1913-1965)는 한국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중도 좌파로서 1953년 한국전쟁 휴전으로 남북 포로교환 때 북한을 선택하여 월북하였습니다. 휴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한과 관련한 모든 것의 언급 자체를 금지했기에 월북 미술가들 역시 언급될 수 없었습니다.
이쾌대 뿐만 아니라 해방을 주제로 한 그의 <해방고지> 혹은 <군상-1>을 포함한 그의 미술 전체는 거의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1988년 10월 27일 정부의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며 상황은 급변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월북한 미술가들에 대한 언급과 연구가 가능해졌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쾌대 역시 남한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이 그의 많은 작품들과 관련 사료들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군상》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작 배경을 입증할 사료는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어떠한 의도로 이 시리즈를 제작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2m 이상의 대형 크기의 네 점의 작품들을 하나의 연작으로 묶고 여기에 《군상》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도 후대의 연구자들입니다. 《군상》 시리즈는 순전히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1953년 이후 이쾌대는 월북하였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이쾌대의 생가에서 계속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이쾌대의 막내아들이 다락방에서 비슷한 크기의 네 점의 작품들을 발견하였고 연구자들은 이 작품들의 유사성을 발견하며 연작으로 묶었으며, 이 시리즈에 《군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습니다.
네 개의 작품은 각각 <군상-1>에서 <군상-4>까지의 명칭이 붙여졌지만 특히 첫 번째 그림은 그림 속 인물들이 광복 직후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며 <해방고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비록 1948년 완성되었지만 이쾌대는 광복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그림은 <군상-1>이라는 제목보다 <해방고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4. 광복 80주년, 앞으로 우리의 역할은?
광복절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쾌대의 <해방고지>를 제외하고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사이 해방을 주제로 한 미술 작품을 찾기 어렵습니다. 광복 직후 한반도는 냉전의 무대가 되어 38선이 그어져 남쪽에는 자유주의의 미군이, 북쪽에는 공산주의의 소련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남한에, 9월 9일에는 북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일명 6·25 전쟁으로 최고조에 달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8년 동안 한반도는 긴박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해방을 즐길 여유도, 미술가들 역시 해방의 즐거움을 미술에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은 대단히 고달팠습니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 미술계 역시 광복 80주년을 기념해야 하지만 이쾌대의 <해방고지>를 제외하고 광복을 주제로 한 당대 미술가의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라 기념 전시회를 기획하기에도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동안 엄청난 수의 문화재와 미술품이 소실되었음을 감안하면 아마 당대의 미술가들이 해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창작하였지만 전쟁 기간 동안 소실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쾌대가 해방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저 소문으로만 알려졌으며 실제로 그림은 광복 이후 40년도 더 지나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쾌대의 <해방고지>처럼 다시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작품들이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에 당대의 미술품들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힘쓰는 것이야말로 한국 미술계가 광복 90주년, 100주년을 준비하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