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예배당1] 콘클라베와 시스티나 예배당

시스티나 예배당 건설과 교황 선출 투표에 관한 짧은 역사

by 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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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클라베는 어쩌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열리게 된 걸까?:https://youtu.be/OeD95bayn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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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pella-sistina-28316.jpg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Sistine Chapel)


1.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

2025년 4월 21일 제266대 프란시스코 교황(Franciscus, 1936-2025)의 선종으로 전 세계 이목은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에 쏠렸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의 장례식까지 언론은 산 피에트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티칸은 전임 교황을 애도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새 교황을 맞기 위한 공식 절차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언론 역시 프란시스코 교황의 장례식 즈음부터 교황 선거 과정을 소개하며 새로운 교황에 대한 기대감을 은근히 드러냈습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언론은 투표가 진행되는 장소를 보여주면서 교황 선거, 즉 콘클라베(Conclave) 과정을 소개합니다. 콘클라베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궁전(Palatium Apostolicum)의 부속 된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에서 진행됩니다. 2005년부터 거의 10에서 15년에 한 번씩 교황 선거가 이루어졌고 시스티나 예배당은 주기적으로 전 세계 언론에 재조명되었죠. 그런 이유로 시스티나 예배당은 일반인들에게 산 피에트로 대성전과 더불어 바티칸에서 가장 친숙한 건물일 겁니다. 가톨릭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은 산 지오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이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은 콘클라베 개최 장소라는 이유로 산 피에트로 대성전을 제외한 나머지 3대 성전보다도 일반인들에게 더욱 익숙할 겁니다. 사도궁전의 부속 건물이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은 가톨릭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이 공식적으로 탄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전혀 작지 않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교황의 개인 기도실로서 만들어진 이 예배당은 애초부터 콘클라베 투표 장소로 만들어진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콘클라베 투표 장소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그 지위가 확고부동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위상을 갖게 된 걸까요?


2.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시스티나 예배당은 제212대 교황인 식스투스4세(Sixtus IV, 1414-1484)가 추진한 여러 건축 사업 중 하나입니다. 이 예배당은 완공되면 교황의 전용 예배당으로 쓰일 용도였습니다. 교황 한 사람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 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중세 말기부터 유럽의 왕족 및 유력 귀족 가문들은 자신과 가문의 전용 예배당을 마련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여전히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 중 한 명이었기에 교황 전용의 기도실을 만드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죠. 그렇게 식스투스4세는 교황의 개인 예배당 건설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게 시스티나 예배당이고요. 시스티나 예배당은 식스투스4세의 교황명에서 유래합니다. 라틴어 “식스투스(Sixtus)”는 이탈리아어로 “시스티나(Sistina)”인데, 시스티나 예배당은 “식스투스4세의 예배당”이란 뜻으로 식스투스4세를 기념합니다.

Tizian_Portrait_Papst_Sixtus_IV_ca._1545-46_Uffizien_Florenz-01-removebg-preview.png Tiziano, <Portrati of Sixtus IV> (1540)


시스티나 예배당은 당시의 다른 건축 사업들과 달리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공사가 시작됐는지 등과 같은 기본적인 사항마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건설 시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르비노 공작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가 로마를 방문했던 1473년이라는 주장, 두 번째로 시스토 다리(Ponte Sisto)나 산토 스피리토 병원(Ospedale di Santo Spirito in Sassia)과 같이 식스투스4세가 주문한 건설 작업들이 시작된 1475년이라는 설, 세 번째 견해는 1477년입니다. 이 중 1477년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 토비아스 다니엘스(Tobias Daniels)는 1479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골조 작업이 이루어지며 공사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기존의 견해들과 비교하면 적게는 2년, 많게는 6년이나 늦습니다. 다니엘스 교수는 예배당 건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대사관들이 주고받은 편지, 외교문서들에 시스티나 예배당 건설과 관련 정보를 확인하며 이러한 주장을 제기합니다.


Daniels_Tobias_jqgj2t.jpg 토비아스 다니엘스(Tobias Daniels)


다니엘스 박사는 파치 전쟁(Pazzi War)이 시스티나 예배당 공사가 시작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고 지적합니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Firenze)의 귀족가문인 파치(Pazzi) 가문이 식스투스4세와 결탁하여 피렌체 대성당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에서 메디치(Medici) 일가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 사건을 벌입니다. 이 사건에서 훗날 교황이 되는 레오10세(Leo X, 1475-1521)의 친아버지이자 당시 피렌체의 통치자인 “로레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1492)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로렌초의 동생인 25살의 쥴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Medici, 1453-1478)는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미혼이었던 쥴리아노에게는 피오레타 고리니(Fioretta Gorini, 1460-1478)라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신 8개월 차였는데 쥴리아노가 사망한 한 달 후인 5월 26일 아들을 출산합니다. 그 사내아이는 쥴리오 디 쥴리아노 데 메디치(Giulio di Giuliano de’Medici, 1478-1534)로 1523년에 제219대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VII)가 됩니다. 이 사건은 피렌체 시민들의 극렬한 분노를 일으켰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파치 가문의 사람들을 대거 처형하며 복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쟁으로 비화되었는데 식스투스4세는 나폴리(Napoli) 왕국과 협약하며 1478년부터 피렌체를 공격하는 파치 전쟁이 개시됩니다.


다니엘스 교수에 의하면, 이 전쟁을 위해 교황청과 나폴리 왕국의 대사들을 통해 여러 서한과 문서들이 오고갔고 이 자료들에는 시스티나 예배당 건축에 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스투스4세는 로마 재건 사업뿐만 아니라, 교황청 내에서 자신과 자신의 로베레(Rovere)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자금을 필요로 했는데 전쟁까지 발생하며 재정적으로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파치 전쟁으로 나폴리와 연합함으로서 1478년부터 1479년 여름까지 나폴리는 상당한 인적/재정적 자원을 교황청에게 제공합니다. 이렇게 지원받은 자금으로 1479년 9월부터 시스티나 예배당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청과 나폴리 왕국의 연합은 피렌체 공화국에게 상당한 압박이었고 결국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1479년 나폴리로 건너갑니다. 그 성과로 나폴리 왕국은 1479년 가을 즈음부터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습니다. 1480년부터는 전쟁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1481년 3월 20일 교황의 발표에 의하여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비록 파치 전쟁에서 교황청이 상당한 이득을 본 건 아니지만,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받은 재정 지원으로 교황청은 1479년 9월부터 시스티나 예배당 공사를 시작하여 11월까지 골조 및 구조 작업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자금 압박으로 공사를 시작할 수 없었지만 메디치 가문에 대한 파치 가문의 암살과 그로 인해 촉발된 파치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음에 따라 시스티나 예배당 건설이 착공될 수 있었다는 게 다니엘스 교수의 설명입니다. 공사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자금이 확보된 게 공사가 시작된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그럼에도 1479년 9월부터 11월 사이 빠르게 기본 골조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건 이미 그 이전에 시스티나 예배당 건설 계획이 명확하게 수립되어 있었고 전체 설계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3. 시스티나 예배당의 총 공사 책임자는 누구일까?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견해에 따라, 시스티나 예배당은 오랫동안 바치오 폰텔리(Baccio Pontelli, 1449-1494)에 의해 지어졌거나 최소한 설계를 맡았을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점차 많은 학자들이 지오반니노 디 피에트로 데 돌치(Giovannino di Pietro de’Dolci, 1435-1485)가 설계자 및 건축 총감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토비아스 다니엘스 교수 역시 이러한 입장입니다. 바치오 폰텔리는 “건축가(architectus)”로 등재되어 있는 반면, 지오반니노 데 돌치는 “책임자 혹은 작업 수석장인(commissario seu capomagistro fabrico)”으로 등록되어 있었죠. 그렇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482년 완공되었는데 1481년 11월 지오반니노 데 돌치는 로마에서 70㎞ 정도 떨어진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로 떠납니다. 치비타베키아 요새(Rocca di Civitavecchia) 건설 작업에 참여하라는 식스투스4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죠. 건축 총책임자가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떠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예배당 공사는 1479년 9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481년 11월 이전에 이미 외부 작업은 거의 끝났으며 남은 건 내부 인테리어 작업이었습니다. 건물의 핵심 작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가 다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도 문제가 되지 않을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치비타베키아로 건너간 후에도 데 돌치는 1482년까지 여전히 내부 장식 작업에 관한 감독자였습니다. 그 이후 1482년 바치오 폰텔리가 로마로 오면서 남은 작업을 건축가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거죠.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총감독한 건 아니지만, 시스티나 예배당 건축의 전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설계자이자 총 책임자인 지오반니노 데 돌치였습니다. 바티칸 문서고(Vatican Archive)에서 발견된 자료도 이를 말해줍니다. 1485년 데 돌치가 사망한 직후, 교황청은 예배당 공사에 관한 급여를 그의 유가족에게 지급했으며 그 액수는 폰텔리가 받은 금액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정리하면, 시스티나 예배당은 지오반니노 디 피에트로 데 돌치가 설계에서 실제 감독까지 맡았으나 사정으로 인해 바치오 폰텔리가 후반 작업을 이어 받아 완성되었습니다.


keys.jpg Perugino, <Christ Handing the Key of Heaven to St. Peter> (1481-1482)


4. 시스티나 예배당은 언제부터 콘클라베 투표장이 되었나?

제207대 교황을 선출하는 1431년과 제208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모두 산타 마리아 미네르바 성당(Santa Maria sopra Minerva)에서 열렸습니다. 이후 1455년부터는 새로 복원된 바티칸 궁전에서 선거가 치러졌다고 합니다. 프란체스코 곤차가(Francesco Gonzaga, 1444-1483) 추기경은 1464년 콘클라베 투표가 사도궁전 내의 니콜리나 예배당(Cappella Niccolina)에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콘클라베는 “열쇠로 문을 잠근 방”을 의미하며 원칙적으로 최종 당선자가 배출되기 전까지 추기경들이 그 안에서 투표를 반복합니다. 프란시스코 교황과 현 레오14세(Leo XVI, 1955-) 모두 투표 이틀만에 당선되었지만, 선거는 1주일 혹은 몇 주가 걸릴 수 있습니다. 교황의 자리를 두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대립하던 15세기에는 몇 달 동안 지속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콘클라베 장소는 투표와 미사와 같은 공식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의식주 활동도 가능한 공간이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추기경들은 모두 왕족이나 귀족 출신으로 하인들을 대동했기 때문에 이들 수행원들 역시 수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이들이 추기경을 보필함으로서 원활한 의사 진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요. 그렇지만 고귀한 신분의 추기경이 하인들과 한 방을 쓸 수는 없었고 개별 숙소가 주어져야만 했죠.


Arazzi-Sistina-7.jpg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교황청은 투표 공간과 추기경들의 숙소를 분리해서 운영하였습니다. 1464년 콘클라베에서도 투표는 니콜리나 예배당에서, 추기경들의 숙소는 카펠라 마냐(Cappella Magna)에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펠라 마냐는 이미 1460년대에도 상당히 노후화 되어 있었습니다. 1471년 콘클라베로 교황에 당선된 식스투스4세는 카펠라 마냐를 허물고 다시 짓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예배당이 시스티나 예배당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주 용도는 교황의 개인 기도실이지만 과거 카펠라 마냐가 그랬던 것처럼, 콘클라베 기간 동안에는 추기경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티나 예배당에는 추기경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결과 식스투스4세의 선종 후 개최된 1484년 콘클라베 당시에 시스티나 경당에는 25칸의 추기경들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은 1559년까지 총 12번의 콘클라베 동안 추기경들의 숙소이자 임기 거주지로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1503년 콘클라베에서부터 나타났습니다. 1503년경에는 추기경들의 수가 20명 남짓에서 40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시스티나 예배당만으로 추기경들의 숙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503년 10월 31일 콘클라베를 통해 제216대 교황에 당선된 율리우스2세(Julius II, 1443-1513)는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들의 숙소로 활용될 공간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1550년대까지 새로운 숙소를 확보하는 속도보다 추기경의 수가 더욱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16세기 중반이 되면 시스티나 예배당은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들의 숙소로 기능하기에 불가능할 정도가 됩니다. 실제로 1549년에서 1550년 초까지 진행된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의 수는 52명인데 시스티나 예배당의 숙소는 불과 19개였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559년 콘클라베에서 마지막으로 추기경의 숙소로 사용되고 1565년 12월에서 1566년 1월 동안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추기경들의 숙소는 시스티나 예배당이 아닌 사도궁전 내의 방들로 완전히 이동하였습니다. 이때의 콘클라베로 시스티나 예배당은 추기경들의 숙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콘클라베의 투표 장소가 되면서 시스티나 예배당은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죠. 1565년 12월 전까지인, 1464년부터 1534년까지는 기존대로 니콜리나 예배당이 투표 장소였습니다. 1549년에서 1559년까지는 바오로3세(Paulus III, 1468-1549)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파올리나 예배당(Cappella Paolina)이 투표장이었습니다. 그러나 1565년 콘클라베를 시작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은 콘클라베의 정식 투표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482년 완공된 시스티나 예배당은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의 숙소라는 부차적인 기능을 맡아 오다가 1565년 12월에서 1566년 1월까지의 제225대 교황 선출 콘클라베부터 공식적인 투표 장소가 되면서 이후 모든 콘클라베의 정식 투표 장소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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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의 투표 장소로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지위는 그로부터 430년이 지나서야 공식 문서화 됩니다. 제263대 교황인 요한 바오로2세(Ioannes Paulus II, 1920-2005)는 1996년 교황 선출에 관한 규정을 정립한 「주님의 온 양떼 전체에 대하여 Universi Dominici Gregis」를 발표합니다. 이 칙령에서 처음으로 콘클라베 투표 장소가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규정하였고 비로소 시스티나 예배당은 1565년 12월 이후 4세기가 넘어서야 그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교황의 칙령과 가톨릭의 오랜 전통에 의거하여, 2005년, 2013년 그리고 2025년 콘클라베 역시 예외 없이 이 시스티나 예배당 내에서 교황 선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가톨릭은 전 세계에서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가장 보수적인 세계로서 레오14세 이후의 성 베드로의 후계자들은 이변이 없는 한 모두 이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탄생할 겁니다.


5.태생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시스티나 예배당

스크린샷 2025-05-08 오후 4.01.08.png Raffaello, <Portrait of Julius II> (1511-1512)


율리우스2세는 르네상스 교황의 전형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쟁도 불사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율리우스2세를 추기경의 자리에 앉히며 교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건 삼촌인 식스투스4세입니다. 율리우스2세는 식스투스4세를 로마 재건을 위한 문화·예술 후원의 롤모델로서 삼을 정도로 삼촌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율리우스2세처럼 식스투스4세 역시 호전적이며 교황의 세속권 확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파치 가문의 암살 사건으로 촉발된 파치 전쟁에 식스투스4세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식스투스4세가 전사 교황(Warrior Pope)으로도 불리는 조카 율리우스2세 못지않은 대단히 호전적이며 야심찬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식스투스4세는 이러한 본 모습을 감추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밀라노(Milano) 대사였던 지오반니 안젤로 탈렌티(Giovanni Angelo Talenti, ?-?)는 식스투스4세는 세속 정치나 전쟁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신앙이나 영적인 차원, 문화·예술의 지원과 예술품 수집 등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를 입증하듯, 식스투스4세는 전적으로 종교적인 순수한 의도로 파치 전쟁의 종전 협상을 이끌어내려는 중재자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에 주력했습니다. 교황은 종전 협상이 교황 법정에서 이뤄지도록 주선했는데 교황 법정은 전통적으로 카펠라 마냐에서 열렸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시스티나 예배당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늘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건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의 숙소로 이용되고 교황청 법정이 개최되는 등 정치적인 기능들을 수행하던 카펠라 마냐를 대체하는 시스티나 예배당 역시 단순히 종교적인 기능만 요구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일상적으로는 교황의 개인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지만 교황청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할 운명이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이러한 태생적인 특성, 그리고 추기경의 수가 늘어나면서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들의 숙소가 사도궁전으로 완전히 이동하며 더 이상 추기경들의 임시 숙소로 쓰일 수 없으면서도 기존의 니콜리나 예배당보다 더 크고 최신식의 대형 홀(hall)에서 투표가 진행되어져야 하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시스티나 예배당은 1565년 12월 교황 선출에서부터 콘클라베의 투표 장소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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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에 의하면, 교황청의 정치적 활동의 주요 무대로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성격은 건물이 완공될 시기에 이루어진 내부 벽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아르놀트 네셀라트(Arnold Nesselrath)와 울리히 히스테러(Ulrich Pfisterer)는 파치 전쟁 동안 식스투스4세와 로렌체 데 메디치 사이의 평화 협정이 시스티나 예배당이 완공될 당시의 벽화 작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토비아스 다니엘스 역시 파치 전쟁 초기인 1478년에서 1479년 사이에 유통된 정치 팜플렛에 등장하는 주요 이슈들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초기 프레스코 벽화들에 반영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콘클라베 개최 장소로 유명합니다. 한편 내부를 빼곡하게 장식하는 벽화들로 전 세계에서 엄청난 방문자들을 끌어 모읍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그 자체가 르네상스 회화 예술의 보고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들을 빼면 시스티나 예배당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이야기는 2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