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스페인 미술에 미친 영향

페르난도 야녜스의 <성녀 카테리나>

by 수다인

본 내용은 유튜브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수다인" 채널에서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페르난도 야녜스의 성녀 카타리나

페르난도 야녜스의 성녀 카타리나

페르난도 야녜스의 성녀 카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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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디난드 야녜스(Fernando Yáñez)는 누구?


스크린샷 2025-06-19 오후 2.59.55.png Yáñez, <St. Catherine of Alexandria> (1505-1510)


살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아래로 시선을 낮추며 희미하게 가벼운 미소를 짓는 하얀 피부의 여성. 왼손으로 푸른색 치마 한 쪽 끝을 들어올려 생동감을 주고 있지만 우아하고 고요한 여인의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반대손에는 긴 장검을 들고 있는 그녀는 누구고, 이 그림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요?


이 그림은 마드리드의 국립 프라도미술관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가로 1.12m, 세로 2.12m로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로, 묘사된 여인도 실제 성인 여성의 크기와 대략 유사해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페르난도 야녜스입니다. full name은 페르난도 야녜스 델라 알메디나(Fernando Yáñez de la Almedina, 1505~1536)인 그는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스페인 미술 전문가인 John F. Moffitt은 <The Arts in Spain> (1999)에서 그의 활동 시기를 토태도 그의 출생년도를 어림 잡아봅니다. 그는 1505년부터 1536년까지 활동했는데 1505년 경 화가로서의 career를 시작하였다면 야녜스는 대략 1475년에서 1480년 사이에 태어났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505년이 그가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라면 대략 1475년에서 1480년 사이에 태어난 셈이죠.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장검을 들고 있는 그림은 1505년에서 1510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인데 이는 야녜스의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에 해당합니다.


2646506.jpg Yáñez, <Holy Family>(1505-1510)


야녜스는 르네상스 시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미술사학도라고 하더라도 잘 알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시기는 피렌체(Florence), 로마(Rome), 베네치아(Venice) 등의 이탈리아 중북부와 독일의 일부, 플랜더스(Fladers) 지역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 되며 이 지역 출신 혹은 이 지역에서 활동한 미술가들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야녜스 역시 특별히 16세기 스페인 미술에 특별히 관심이 없다면 거의 알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출신 및 활동 지역을 초월할 정도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실만한 분들도 계실텐데요, 2024년 6월6일부터 9월 8일까지 서울 여의도 더 현대에서 <서양 미술 800년 전: 고딕부터 현대미술까지> 전시가 개최되었는데, 이 전시에 야녜스의 <성 가족 Holy Family> (1523)이 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미술 800년 전>을 관람했던 분들이라면 야녜스라는 미술가의 이름을 혹은 그가 그린 <성 가족>이라는 그림을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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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제자 야녜스


2024년 더 현대에서 한국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보여진 <성 가족>, 그리고 긴 장검을 든 우아한 여인 등의 야녜스의 그림 모두 다른 미술가의 그림이 연상됩니다. 눈썰미가 좋다면, 아마 인류 역사에서는 최고의 천재들로 거론되는 인물이 몇몇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레오나드로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를 떠올리실 겁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의 대표작은 <모나리자 Mona Lisa>(1503-1506)과 벽화인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1495-1498)이지만, 그는 뛰어난 이젤(easel) 그림들을 다수 남겼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이젤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성 안나와 함께 한 성모자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1510)입니다. 이 그림은 우아하면서 온화한 인물의 머리와 표정이 보는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죠. <모나리자>나 <성 안나와 함께 한 성모자> 모두 다 빈치의 말년 작품들인데 야녜스의 그림 속 여인은 다 빈치의 그림 속 아름다운 여인들의 분위기와 대단히 흡사합니다.


스크린샷 2025-05-30 오후 1.21.38.png da Vinci,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1510)


야녜스는 스페인의 카스티야(Castilla) 지역 중, 세르벤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걸작인 <돈 키호테 Don Quixote>의 배경인 라 만차에 속한 소도시인 알메디나(Almedina)에서 태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후 야녜스에 관한 기록은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에 등장합니다. 다 빈치는 말년에 밀라노로 건너가 "앙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를 묘사한 대작을 그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실현되지 못합니다. 다만 현재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에 소장된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다 빈치의 드로잉을 모사한 드로잉을 통해 다 빈치가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 빈치는 이 <앙기아리 전투>를 제작할 시기, 1505년 4월 30일에서 10월 10일까지 “스페인 사람 페르난도(Ferrando Spagnuolo)”를 유급으로 고용하여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의 그 "스페인 사람 페르난도"가 바로 페르난도 야녜스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기능이 절정에 달한 다 빈치의 바로 곁에서 그의 그림 스타일을 직접 보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약 5개월에서 6개월 동안 다 빈치의 조수로서 다 빈치의 스타일을 최대한 흡수했고 그러한 경력으로 인해 후에 다 빈치의 제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the-battle-of-anghiari.jpg Rubens, <Battle of Anghiari> after da Vinci (1603)


다 빈치 밑에서의 짧은 수학을 거친 후 야녜스는 다시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갑니다. 스페인에서 돌아간 후 그는 1506년 야녜스는 가톨릭 성인인 성 코스마스(St. Cosmas)와 성 다미안(St. Damian)에게 봉헌된 기도당의 재단화(altarpiece)를 장식하는 패널화를 의뢰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때 그려진 그림이 바로 1505년에서 1510년 사이에 제작된 젊은 여인에 관한 그림입니다.


3.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는 누구인가?


이 여인은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St. Catherine of Alexandria)입니다.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그녀는 287년에 태어나 305년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어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기 이전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삶이 평탄치 않았겠죠? 이집트의 귀족 가문 출신인 그녀는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당시 기독교 박해 정책을 펼친 막센티우스 황제(Maxentivs, 283~312)를 공개 비판할 정도로 대단한 강단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황제를 작심 비판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못이 박힌 바퀴에 찢어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바퀴가 계속 부러져 그의 사형이 집행되지 못하였고 결국 황제는 카타리나의 참수형을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순교한 카타리나는 가톨릭의 주요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순교 과정에 못이 박힌 바퀴와 칼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성녀 카타리나를 표식하고자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부러진 바퀴와 칼이 동시에 등장하곤 합니다.


스크린샷 2025-06-19 오후 3.52.49.png Caravaggio, <St Catherine of Alexandria> (1598)


야녜스의 그림에서도, 친절하게 부러진 바퀴 조각이 그녀의 발 아래에 그려져 있고 또 장검을 지니고 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또한 그녀가 고대 로마인들을 화려한 언변으로 제압했다는 걸 상기시켜주듯, 그림의 뒤쪽에는 책과 그 위에 종려나무 가지가 올려져 있는 모습을 추가합니다. 지성인을 의미하는 책과 지혜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뒤에 배치함으로서 성녀 카타리나의 명석함을 강조합니다.


catherin.jpg Yáñez, <St. Catherine of Alexandria> (detail)


야녜스가 성 카타리나에 대한 재단화를 그린 이후 오늘날 그 기도당은 성 카타리나에게 봉헌된 채플로 바뀌었습니다. 야녜스가 그린 그림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4. 매너리즘에 빠진 야녜스


이 그림과 같은 기간에 제작한, 오늘날 미국 워싱턴 D.C.(Washinton D.C.)의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of Art에 소장되어 있는 <아기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한 성모자 Madonna and Child with Infant St. John>는 다 빈치의 스타일을 더욱 노골적으로 따라합니다.


스크린샷 2025-05-29 오전 10.36.28.png Yáñez, <Madonna and Child with Infant St John> (1505)


2000년대 초반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해 급기야 영화로까지 제작된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 Da Vinci Code』 에는 다 빈치의 여러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극 초반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장면에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 Virgin of the Rocks>가 언급됩니다. 이 소설을 읽어 보셨거나 혹은 영화를 보신 분, 아니라면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를 방문해 본 분이라면 아마 다 빈치의 걸작 <암굴의 성모>를 기억하실 겁니다.


2virg_p-removebg-preview.png Da Vinci, <Virgin of the Rocks> (1483-1486) in Musée du Louvre


<암굴의 성모>는 1483년에서 1486년 사이에 제작된 종교화로서 지금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밀라노에서 제작되어서 애초에는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San Francesco Grande)에 있었다고 합니다. 야녜스가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프로젝트를 도와주고자 밀라노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암굴의 성모>를 직접 봤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암굴의 성모>는 그 시기에도 유명한 작품이어서 당시, 그리고 후대 밀라노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virg_l.jpg Da Vinci, <Virgin of the Rocks> (1483-1486) in National Gallery


다빈치는 이후 1495년에서 1508년 사이 <암굴의 성모>를 거의 그대로 그렸고 이 버전은 현재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루브르박물관 버전과 비교하면 내셔널갤러리 버전은 두 아기 중 세례자 요한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세례자 요한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성모의 오른 편에 위치나 아기와 함께 묘사하여 보다 정확하게 인물의 신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두 버전은 거의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 밀라노에서 다 빈치와 함께 작업을 하고 다 빈치의 테크닉을 모방해야만 했던 야녜스였기 때문에 그가 다 빈치가 이룩한 예술적 성과에 관심이 높고 그에게 존경심을 지니며 열심히 자기 것으로 채화한 건 당연한 거에요. 다 빈치는 이미 1500년 즈음, 살아있는 전설로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술가들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 중 한 명이자 다 빈치에 비하여 무려 31살이나 어려 아들 뻘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다 빈치에 대해서 무한한 존경심을 지녔으며 다 빈치가 회화에서 구현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우아미(grace)를 완벽하게 계승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다 빈치의 장점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충분히 녹여낸 라파엘로는 이미 미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던 1500년대 초반부터 다 빈치의 계승자이자 자신만의 개성이 충분한 젊은 거장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26terran-removebg-preview.png Raffaello, <Terranuova Madonna> (1505)


라파엘로가 다 빈치의 장점을 십분 수용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첨가하며 그 자신이 그 시대의 새로운 전설로 거듭난 것과 달리 야녜스는 전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표현력은 초창기 작품인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와 달리 더 퇴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니라> 이후에 제작된 <아기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한 성모자>는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와 차이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성모자를 인도하는 천사가 등장하지 않고,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이 붙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성모자와 아기 세례자 요한을 그린 그림이라는 동일한 주제이기도 하며, 성모에 대한 묘사는 <암굴의 성모> 속 성모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배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른쪽으로 기울여진 고개며 성모의 왼손은 누가 봐도 야녜스가 다 빈치의 그림을, 오늘날의 표현대로라면, 좋게 표현하면 레퍼런스(reference),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표절 수준입니다.


이후 지중해 연안의 발렌시아(Valencia)에 정착한 야녜스의 화가로서의 기량은 더욱 저하됩니다. 그는 다 빈치가 구현한 우아한 여인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복제하며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자기 복제를 넘어 화면 구성이나 묘사력이나 색채 표현력 등 화가로서의 전반적인 기량은 더욱 떨어집니다. 이를 1507년에 제작한 <이집트로의 피신 The Rest during the Flight to Egypt>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06-19 오후 4.34.00.png Yáñez, <Rest during the Flight to Egypt> (1507)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등장하는데 성모의 표정과 포즈, 손짓은 그 전에 제작한, <아기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한 성모자> 속 성모와 거의 똑같아요. 그냥 자기 복제 수준이죠. 문제는 오히려 테크닉적으로나 표현력에서는 더 조악한 수준입니다. 성모자 옆에서 포도를 따려는 성모의 남편이자 아기 예수의 현세의 아버지인 성 요셉의 모습은 매우 어색하고 작위적이며 아기 예수의 얼굴은 매우 부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며, 그 뒤에 등장하는 다섯 아기 천사는 다소 기괴해 보일 정돕니다.


5. 스페인 르네상스 미술에서 야녜스의 의미는?


르네상스 시기 미술의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피렌체와 로마의 이탈리아 중부의 내륙 지역과 아드리아(Ardria)해에 면한 베네치아였습니다. 야녜스는 페르난도 야노스(Fernando Llanos, ?-?)와 더불어 당시 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가 최신 이탈리아 미술을 직접 경험한 후 최신 미술 경향을 고국에 소개한 1세대 스페인 미술가 중 한 명입니다. 안타깝게도 페르난도 야녜스와 페르난도 야노스 둘 다 이런 값진 경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스크린샷 2025-06-19 오후 4.46.07.png Llanos, <Death and Assumption of the Virgin> (1507)


그저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성공적으로 구현한 기법들이나 양식을 기계적으로 답습,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들은 그 기량마저도 점차 떨어졌습니다. 두 명의 페르난도의 작품들은 오히려 스페인으로의 귀국 초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가장 눈에 띄며 오히려 활동 경력이 길어질수록 테크닉적인 면에서 더욱 조악해졌습니다. 그들이 스페인이라는 지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활동한 미술가들이라면 아마 지금 수준과 같은 언급조차도 되기 어려울 정도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가 왜 뛰어난 미술가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배 천재 예술가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그의 장점을 자신의 장점과 결합하고 자신의 기량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후에는 오히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뛰어넘을 정도의 르네상스 회화의 불멸의 거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페르난도 야녜스 그리고 페르난도 야노스와 같은 이탈리아로의 제1세대 스페인 미술 유학인들의 작품이, 미술 작품 그 자체로서의 예술성은 매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의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페인 미술사 연구의 대가인 프린스톤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조나단 브라운(Jonathan Brown, 1939-2022) 교수는 페르난도 야녜스와 페르난도 야노스는 이탈리아에서 직접 최신 이탈리아 미술의 경향을 경험한 후 이러한 화풍에 따라 그림을 그린 최초의 비(非)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들이라고 평가합니다.


스크린샷 2025-05-08 오후 1.09.12.png Raffaello, <Madonna del Cardellino> (1507)


르네상스 시대의 4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라파엘로 산치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77-1576)가 활동하던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은 교통과 통신이 지금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딘가에서 새로운 문화 현상이 발생하고 문화 운동이 발생하면 소셜미디어(SNS)을 타고 불과 한 달만에 지구 반대편에도 알려져 전 세계적인 유행이 되지만 16세기 초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르네상스 미술이 15세기 중후반에서 16세기 서양 미술의 보편적인 미술 문화로 여겨지지만 르네상스 미술은 정확하게는 이 시기 르네상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중북부에 한정된 미술 운동이었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나폴리 왕국에서는 반도의 중북부에서 발생한 미술 운동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이탈리아의 중북부의 새로운 미술 문화는 16세기 초중반이 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중 이탈리아 미술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건 이탈리아와 육로로 연결된 프랑스나 지금의 독일,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도 아닌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아라곤 왕국(Reino d'Aragón)이나 발렌시아 지역, 바르셀로나(Barcelona)와 카탈루냐(Cataluña) 지역은 중세 시대부터 이탈리아와 교역하며 이탈리아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도 이탈리아의 새로운 미술 문화, 일명 르네상스 미술 수용에 개방적이었으며 적극적이었습니다. 아쉽게도 16세기 스페인 미술가들 중 압도적인 기량의 미술가들이 등장하지 않아 16세기 스페인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스페인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전 유럽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작점에 있는 미술가들이 페르난도 야녜스와 같은 스페인 미술가라는 게 조나단 브라운 박사가 페르난도 야녜스와 또 다른 페르난도인 야노스에게 내리는 평가입니다.


스크린샷 2025-05-29 오전 11.17.43.png Zurbarán, <The Apparition of Apostle St Peter to St Peter of Nolasco> (1629)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피렌체가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점이자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건 1300년대 치마부에(Cimabue, 1240-1302)를 시작으로 그의 제자인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와 같은 혁신적인 미술가들이 등장하면서 계속해서 미술가들의 미술 역량이 축적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1500년에서 1520년대 사이의 30년 사이에 결실이 맺어진 겁니다. 스페인 역시 16세기의 약 100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17세기에 이르러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주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 1591-1652), 프란체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 등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미술가들의 배출로 그 결실을 맺게 됩니다. 17세기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16세기 초반의 페르난도 야녜스와 같은 미술가가 이탈리아의 선진 미술 수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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