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1세의 즉위는 스페인 미술의 기회였을까 위기였을까?
1. 카를로스라는 이름을 스페인 최초의 국왕
16세기 전반기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카를5세(Karl V, 1500-1558)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입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알려져 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앞서 스페인의 왕위에 오릅니다. 1516년 그는 16살의 나이로 스페인의 왕이 됩니다. 그는 독일식 이름인 카를(Karl)의 스페인 버전인 카를로스(Carlos)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왕(Carlos I)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1516년 3월 14일 피레네(Pyrenees), 스페인 어로는 피리네오스(Pirineos) 산맥 이남의 두 왕국의 왕위를 카를로스1세가 동시에 계승함으로서 비로소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스페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우연하게 탄생한 게 아닙니다. 이미 카를로스1세가 즉위하기 약 50여 년 전, 스페인의 탄생은 예견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왕국으로 재탄생한 스페인이 500년이 지난 2025년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2. 1469년: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시작
카를5세 혹은 카를로스1세가 스페인의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의 모계 혈통 때문입니다. 그의 외조부는 아라곤 연합 왕국(Kingdom of Aragón)의 페르난도2세(Fernando II, 1452-1516)입니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아라곤 왕국(Aragón)과 바르셀로나(Barcelona) 자치시를 포함하는 카탈루냐(Cataluña)왕국과 발렌시아(Valencia)왕국으로 구성된 왕국으로 지중해를 접하며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동쪽에 부분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런 아라곤 연합 왕국의 국왕인 페르난도2세의 부인이자 카를 황자의 외할머니는 이사벨1세(Isabel I, 1451-1504)입니다. 그녀는 페르난도2세의 부인으로 아라곤 왕국의 왕비이기 이전에 카스티아 이 레온(Castilla y León) 왕국의 통치자입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오늘날의 스페인의 중심부인 카스티야 지역을 비롯하여, 갈리시아-레온(Galicia-León) 지역과 나바라(Navarra) 지역 등에 걸쳐 있는 왕국입니다.
이러한 카스티아 이 레온 왕국의 여왕인 이사벨1세는 각자의 왕국에서 왕위를 계승하기 전인 1469년 10월 18일 혼인합니다. 이들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각자의 왕국을 각자 통치하는 데 합의합니다. 페르난도 왕자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고, 이사벨 공주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남편인 페르난도가 부인인 이사벨의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에 관한 권리를 전혀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온갖 난관을 겪고 카스티야 이 레온의 왕위를 획득할 정도로 강단있던 이사벨 공주였기 때문에 고작 결혼했다는 이유로 왕위를 남편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사벨 공주는 둘 중 한 명이 먼저 하세(下世)하더라도 남은 사람이 배우자의 왕위 계승권을 계승하지 않고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각자의 왕국의 왕위계승권이 승계된다는 조건으로 혼인에 서약하였습니다.
결혼 후, 이사벨이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을, 페르난도가 아라곤 연합 왕국을 물려 받게 되자, 혼인 전 이 계약 조건에 의거하여, 이사벨1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을, 페르난도2세는 아라곤 연합 왕국을 통치했습니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페르난도2세가 전적으로 맡아서 통치했지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실제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공동왕으로서 통치합니다. 아라곤 왕국은 중세 시대부터 지중해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주도권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문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함께 대응하였습니다. 게다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 모두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무슬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는 범(pan) 이베리아적인 목표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는 주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함께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국왕은 이사벨이었으므로 당연히 이사벨의 목소리가 우선이었습니다. 페르난도는 공동왕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사벨이 서열 1위였습니다.
이사벨1세는 1492년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 내 마지막 무슬림 지역이었던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을 함락시키며 800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당시 그라나다 토후국의 마지막 왕인 무하마드12세(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ثاني عشر)가 머리를 조아리며 왕국의 열쇠를 전달하며 그라나다의 통치권을 완전히 양도한 대상은 아라곤 연합 왕국의 페르난도2세가 아니라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서열 1위이자 진정한 주인인 이사벨1세였습니다. 그렇게 이사벨1세는 그라나다 지역까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 편입시키며 남편인 페르난도2세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레콘키스타를 완성한 바로 그 해에 이사벨1세는 자신의 보석을 팔고 왕관을 금융업자들에게 저당잡히면서까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개인적으로 후원하여 신대륙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은 전적으로 이사벨과 그녀의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지원이었으며 여기에 아라곤 연합 왕국과 페르난도2세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페르난도2세는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이자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으로서 여왕의 조언자였지만 당시 스페인의 주요 사건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사벨 여왕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 이사벨1세는 1504년 11월 26일, 53세의 일기로 승하합니다. 결혼 전 조건으로 인하여 남편인 페르난도2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위는 이 둘의 살아 있는 자녀들 중 첫째인 후아나(Juana de Castilla, 1479-1555)에게 돌아갑니다.
후아나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군주가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사이에는 장남인 후안(Juan, 1478-1497)이 있었습니다. 1497년 당시 19세의 후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1세(Maximilian I, 1459-1519)의 황녀 마르가레테 도스트리아(Margarete d'Austria, 1480-1530)와 혼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르가레테와 결혼한 그 해 10월 4일 후안 왕세자는 갑자기 사망합니다. 결혼식 때 처음 만난, 이제 겨우 결혼 한 달 차인 이 둘 부부 사이에는 당연히 자녀가 없었고, 후안이 사망하기 전, 마르가레테 세손빈이 임신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마르가레테는 후안의 첫 번째 부인이어서 후안은 어떠한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의 유일한 아들이 사망함에 따라,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계승권은 이 두 가톨릭 공동왕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에게 넘어갑니다.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는 후안 왕자를 낳기 전, 1470년 첫째 딸 이사벨을 낳았습니다. 후안과 8살 차이였던 그녀는 이미 1490년 이베리아 반도의 또 다른 거대 왕국인 포르투갈 왕국의 알폰소(Alfonso, 1475-1491)와 혼인하였지만 결혼 1년 후인 1491년 낙마 사고로 16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다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그녀는 결국 1495년 포르투갈의 왕이 된 마누엘1세(Manuel I, 1469-1521)와 1497년 재혼하였으며,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후계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다음 해인 1498년 마누엘1세와의 사이에서 포르투갈의 왕비 이사벨은 아들인 미겔(Miguel, 1498-1500) 왕자를 출산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미겔을 낳은 후 몇 시간 후에 사망합니다. 자연스럽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계승권은 그녀의 아들이자,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의 외손자인 미겔에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미겔 왕자 역시 1500년 사망함에 따라, 결국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는 그녀의 두 번째 딸인 후아나에게 넘어갑니다. 1497년 후안 왕세자가 사망한 직후, 1500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강력한 두 왕국의 왕위는 첫째 딸인 포르투갈의 왕비 이사벨에서 그녀의 아들인 미겔에게, 마침내 후아나에게 돌아가며 3년 사이 왕위계승자가 무려 네 명이나 바뀌었습니다.
3. 1496년, 1500년: 스페인 역사를 바꾼 우연한 사건들이 발생한 해
장녀 이사벨을 낳은 후 8년 동안 후사를 보지 못한,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는 1478년 유일한 아들인 후안 왕자를 시작으로 2년 혹은 3년 간격으로 자녀들을 낳습니다. 1480년 둘째 딸 후아나를 낳은 후, 1485년에는 훗날 잉글랜드의 악명높은 왕인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의 첫 번째 왕비가 되는 카타리나 다라곤(Catharina d'Aragón, 1485-1536)을 마지막으로 이 둘은 부부일 때 동안 1남 4녀의 총 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 딸인 포르투갈의 이사벨을 제외한 네 명의 연령대가 모두 비슷했으며 이는 그들의 혼인 시기가 모두 비슷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실제로 1497년 왕세자였던 후안이 신성로마제국의 마르가레테 도스트리아와 혼인하기 전, 후안보다 두 살이 어린 여동생 후아나가 그보다 1년 전인 1496년에 먼저 혼인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1세 황제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 드 부르고뉴(Marie de Bourgogne, 1457-1482)와의 사이에서 필립(Philip, 1478-1506)과 마르가레테의 두 명의 자녀를 낳는데 공교롭게도 황자와 황녀의 나이 터울도 후안과 후아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두 살 차이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마르가르테를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의 며느리로 보내기 전인 1496년, 이베리아 반도의 두 공동왕이 자신들의 둘째 딸인 후아나를 먼저 막시밀리안1세의 장남이자 마르가레테의 오빠인 필립의 배우자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1496년 먼저 사돈 관계를 맺은 이사벨1세/페르난도2세 부부와 막시밀리안1세는 다음 해에는 바꿔서 아들과 딸을 혼인시켜 겹사돈이 됩니다.
이베리아의 두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이 겹사돈을 맺은 것은 둘 다 철저한 노림수 때문입니다. 이 둘 모두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주도권 다툼을 벌였으며, 피레네 산맥에 인접한 나바라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며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시칠리아(Sicillia) 섬을 노리던 것도 아라곤 왕국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이렇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 및 신성로마제국 모두의 공동의 적이었던 프랑스를 고립하기 위하여 황제와 이베리아 반도의 두 공동왕은 비슷한 나이대의 총 네 명의 자녀를 교환하며 상호 방위 관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당시 유럽의 유일한 황제국으로서 유럽의 중심지인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아프리카의 시작으로 여겨질 정도로 유럽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런 이베리아 반도의 두 왕국과 황제가 겹사돈을 맺고자 한 건 신대륙 발견에 따른 식민지 건설 때문이었습니다. 신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의 귀금속이 발견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활용함으로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재정 수입은 단기간에 막대하게 증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막시밀리안1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의 사돈 관계를 맺으면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예상한 겁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는 먼저 황자인 필립을 후아나와 혼인시키고, 다음 해에 황녀인 마르가레테를 왕세자 후안에게 출가시킵니다. 처음에는 단지 재정적인 지원을 염두에 둔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필립 역시 후아나가 그저 유럽의 일반적인 공주들처럼, 자신의 배우자로서 자신의 정식 후계자를 낳아주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497년 후안 왕세자의 예상치 못한 사망을 시작으로 1498년 장녀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1500년 포르투갈의 왕비 이사벨의 유일한 아들인 미겔마저 사망함으로서 필립 황자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온 겁니다.
"미남왕 필립(Philip the Fair/Handsome)"으로 불렸던 필립 황자는 결혼 후에도 여성들과 외도를 즐겼습니다. 바로 이 점이 후아나에게 불행으로 작용했습니다. 후아나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약간의 정신병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녀의 증상은 필립 황태자와 혼인하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가 여러 여성들과 바람을 피우거나 혹은 외도를 의심함에 따라, 그녀의 신경증과 불안증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녀의 정신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그녀의 필립에 대한 의심과 집착이 심해질수록 둘의 부부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립은 후아나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보다는 그녀의 정치적 배경, 즉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계승권 그리고 신대륙으로부터 발생하는 재정적 수입 등에 더욱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립과 후아나의 관계는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필립이 후아나를,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유럽의 다른 공주들처럼 그저 자신의 법적인 아내로만 치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후아나는 필립을 이베리아 반도의 두 왕국에서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로 만들어 줄 사람이자 신대륙으로부터 발생한 막대한 수입을 자신의 고향인 신성로마제국으로 끌어올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 사이의 유일한 아들인 후안이 사망한 상황에서 정신병을 이유로 후아나가의 왕위계승권이 상실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인 이사벨1세와 같은 강단도,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아나 홀로 왕국을 통치하는 건 불가능하며 그녀와 공동으로 왕국을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점점 명백해졌습니다. 그렇기에 필립 황자는 자신이 후아나의 정식 남편이자 그녀의 법적인 보호자임을 강조하며 후아나를 대신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권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필립의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통치권에 관한 야욕은 1504년 이사벨1세의 승하로 후아나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실제로 드러납니다. 후아나가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필립은 자신이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의 장인인 아라곤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2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호걸이었습니다. 평생을 이사벨1세의 뒤에서 그녀의 왕국을 노렸던 페르난도2세는 아내가 사망한 후, 정신 병력이 있는 딸의 권한을 대놓고 노렸습니다. 페르난도2세 역시 필립처럼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 관하여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장인인 페르난도2세와 사위인 필립 황자는 후아나1세(Juana I)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을 두고 대립합니다. 1504년 이사벨1세가 승하하였을 때, 이사벨1세는 이미 출가하여 남편뿐만 아니라 네 명의 자녀들까지 출산한 출가외인(出嫁外人)이었고 그녀의 보호자는 아버지가 아닌 남편이었습니다. 의회(Cortes Generales)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후아나1세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고 3년이 지난 1506년 7월 12일 필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립은 그렇게 후아나1세와 더불어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으로 인정됩니다. 비록 후아나와 공동 군주의 형태였지만 그는 스페인의 국왕으로 공식 승인된 겁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자 필립은 스페인 역사에서 필립, 스페인 식으로는 펠리페(Felipe)라는 이름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군주(Felipe I)가 됩니다.
4. 1506년: 펠리페1세의 탄생과 페르난도2세의 복귀
하지만 펠리페1세는 1506년 9월 25일, 28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펠리페1세의 사망 후,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정치는 다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후아나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졌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그녀의 정신에 더욱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신대륙에서 식민지를 개척함으로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막대한 재정적 수입을 거두고 있었지만 왕국이 처리해야 할 사안들은 더 다양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히 왕국을 통치하기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국 후아나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왕국을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정신병을 앓는 여인에게 남편을 대신할 남성 보호자는 그녀의 아버지 혹은 아들이었는, 이미 국정 운영에 빠삭한 그녀의 아버지가 적임자였습니다.
펠리페1세의 사망 후, 페르난도2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서 자신의 세력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펠리페1세가 사망할 당시, 페르난도2세는 나폴리 왕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측근인 시스네로스 추기경(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1436-1517)을 자신을 대신한 섭정으로 지정하며 왕국의 통치를 맡깁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을 통해서였지만 페르난도2세는 분명히 왕국와 왕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딸의 거취까지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2세는 이사벨1세가 생존해 있을 때에도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 군주이기 이전에,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아라곤 연합 왕국과 나폴리 왕국을 포함한 방계 왕가가 지중해에서 누리던 기존의 헤게모니(hegemony)를 확장하는 데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력이 뒷받침 되어야 했고 그는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가 레콘키스타 전쟁을 벌이던 15세기 후반, 이미 중세 시대와 달리, 전쟁은 막대한 자금력을 필요로 한 엄청나게 비싼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비용이 대단히 커진 현실에서 페르난도2세는 늘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어 오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수익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사벨1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는 부인의 눈치를 봐야했으며, 자신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사위 펠리페1세가 살아 있을 때는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사라진 상황에서 페르난도2세는 딸 후아나라는 걸림돌만 제거하면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페르난도2세는 딸이 자신의 야욕에 방해가 될 수 없도록 후아나의 정신병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명목으로 1509년 2월부터 그녀를 톨레도(Toledo)에서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의 산타 클라라 왕립수녀원(Real Monasterio de Santa Clara)에 감금에 가까운 요양을 보냅니다. 후아나1세는 스페인의 여왕이지만 여왕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발휘하지도 못한 채, 평생 수녀원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다음 해인 1510년에는 민심을 잃은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의회에 의하여 실각함에 따라, 오히려 페르난도2세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페르난도2세가 딸을 수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수녀원으로 유배를 보낼 정도로 모진 아버지였던 건 그의 탐욕스로운 성격도 원인일 수 있지만, 사위인 필립에 대한 적개심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장인과 사위의 대립은 그저 감정적인 대립에 그치지 않고, 필립은 카스티야 이 레온의 궁정에서 서슴없이 카탈루니아 인 - 페르난도2세 - 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펠리페1세는 페르난도를 권력에서 배제하며 숙청에 성공하여 페르난도2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펠리페1세가 공동왕으로 인정받기까지 장인 페르난도2세와 사위 필립의 대립은 심각해짐에 따라, 페르난도2세는 후아나와 필립, 그리고 딸과 사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까지 상속받는 것만은 막고자 결심하였습니다. 펠리페1세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으로 선언되던 1506년 그는 자신보다 36살이나 어린 당시 18살의 프랑스의 제르멘느 드 푸아(Germaine de Foix, 1488-1536)와 재혼합니다. 제르멘느와의 혼인으로 낳은 후사에게 아라곤 연합 왕국을 분할 상속하여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이 후아나1세와 펠리페1세 부부의 수중에 모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고령인 54세에 새 장가를 가기로 결심한 건 그가 강력하게 후사를 원했다는 걸 의미하며, 이사벨1세와의 혼인 전, 둘 사이에서 태어난 후사에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가 모두 계승된다는 원칙이 명문화 되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전 부인인 이사벨1세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자식을 얻고자 한 겁니다. 페르난도2세가 이러한 행보를 보인 건 그가 사위인 펠리페1세와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5. 1516년: 카를로스1세, 스페인의 왕이 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이자,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 후아나1세의 대리인이었던 페르난도2세는 1516년 1월 23일 63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페르난도2세의 사망으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비록 후아나는 산타 클라라 왕립수도원에 요양 중이었지만 그녀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엄연한 국왕이었습니다. 의회는 후아나를 수녀원에서 모셔와 그녀의 자리를 회복시킬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왕을 맞이할 지.
후아나1세와 펠리페1세는 10년 동안의 결혼생활 동안 여러 명의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1498년 장녀 엘레오노레(Eleonore, 1498-1558)를 낳은 후, 1500년에는 장남인 카를을, 1503년에는 차남인 페르난도(Ferdinand, 1503-1564)를 낳았으며, 펠리페가 사망할 당시 임신 상태였던 후아나는 남편이 사망한 후인 1507년에는 그들 사이의 막내 딸인 카탈리나(Catalina, 1507-1578)까지 출산하며, 2남 4녀의 총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펠리페1세가 사망할 당시 장남인 카를로스는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습니다. 후아나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고작 여섯 살짜리 왕자에게 왕국의 통치를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를 대신한 섭정이 국정을 운영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건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카를로스 왕자가 성인이 되기 전인 1516년 페르난도2세마저도 사망합니다. 그는 아직 법적인 성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군주로서의 교육을 받아 왔으며, 16세는 스스로 통치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결국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16살이 된 카를로스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것인지 후아나1세를 복귀시킬 것인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으며 그렇다고 그녀의 정신 병력 역시 호전되지 않았으므로 왕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젊은 군주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카를로스 왕자는 페르난도2세가 서거한지 2개월 정도가 지난 1516년 3월 14일부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으로 인정받습니다. 심지어 아라곤 연합 왕국 역시 그를 왕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난도2세는 제르멘느 드 푸아와 재혼하며 후사를 얻으려 하였지만 결국 자식을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카를로스 왕자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 역시 카를로스 왕자에게 상속됩니다.
페르난도2세가 승할 당시 카를로스 왕자는 플랑드로(Flandres)와 네덜란드의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에 있었습니다. 1506년 후아나와 펠리페가 이사벨1세의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떠날 때 장남인 카를은 부모를 따라가지 못하고 카를은 고모인 마르가레테의 네덜란드에 남았습니다. 그 후 펠리페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어도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지 못한 채 네덜란드 궁정에서 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후에도 그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부친의 사망 즉시 카를은 아버지의 영지인 부르고뉴(Bourgogne)의 공작의 자리를 물려 받았기 때문이죠. 동생인 페르난도는 자신과 이름과 생일까지 똑같은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스페인의 왕자로 자라는 동안, 카를은 저지대 국가들의 황자로 컸습니다. 그 결과 페르난도는 스페인어를, 카를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물이 됩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으로 결정된 카를은 왕관을 받기 위하여, 네덜란드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로 떠납니다. 1517년 9월 19일 카를로스1세는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Astrurias)의 작은 항구 마을인(Villaviciosa)에 도착합니다.
스페인에 도착한 후 그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토르데시아스로 육로로 이동했고 1517년 11월 4일 그는 무려 10년만에 어머니와 재회합니다.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반드시 어머니 후아나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명목상으로는 후아나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카를은 어머니를 감금에서 풀어주고 다시 복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어릴 때 어머니와 헤어져서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기억도 애정도 없었으므로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가 두 왕국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는 데 어머니 후아나는 걸림돌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를 찾아가서 무려 6주 동안 토르테시아스에 머문 건 자신이 후아나1세로부터 전권을 이양 받은 합법적인 후계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이후 카를로스1세는 1518년 3월 9일 톨레도(Toledo) 대성당에서 후아나1세와 함께 스페인의 공동 국왕으로서 정식으로 직위하지만 이미 1516년 3월 14일부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 결과 카를로스1세 시대와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나라 에스파냐(España), 영어로는 스페인(Spain)이라는 나라가 정식으로 성립된 시기는 바로 1516년 3월 14일로 봐도 무방합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탄생은 1469년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할 이사벨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페르난도가 두 왕국의 왕위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에게 계승된다는 합의 하에 혼인한 시점부터 예견되었으며 그 시점이 이 두 부부의 첫째 아들인 후안 왕세자가 아닌, 차녀인 후아나의 첫째 아들인 큰 외손자인 카를로스의 시대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후안 왕세자가 사망한 이후, 내부 상황이 복잡해지고, 페르난도2세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지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은 합쳐져 하나의 왕국으로 거듭날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겁니다.
물론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와 아라곤 연합 왕국이 분리 상속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후아나1세와 펠리페1세에게는 차남인 페르난도가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스와 페르난도가 각각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을 상속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전에 유럽에서는 두 명 이상의 남성 왕위계승자가 존재할 경우 별도로 상속되는 게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의회(코르테스)는 지금보다 더욱강력한 권력을 지닌 군주에 의하여 통일되고 효율성 있는 국가를 원했기 때문에 두 왕자에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이 분리 상속 되는 대신 장자인 카를로스 왕자에게 집중되어 상속되었습니다.
6. 카를로스1세의 즉위, 스페인 미술계의 위기? 혹은 기회?
에스파냐 혹은 스페인 왕국을 출범시킨 카를로스1세가 고모인 마르가라테 도스트리아의 손에서 네덜란드 궁정에서 자라 스페인어를 전혀 구사할줄 모르고, 이베리아 반도의 자연 환경, 문화, 풍속, 백성 등의 특징 등 스페인과 관련한 거의 전반에 걸쳐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를 염려한 스페인 의회(제레랄레스 코르테스) 역시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조건으로 그가 열심히 스페인어를 습득하여 스페인어로 국정을 운영하고 스페인의 문화와 전통에 대하여 열심히 학습해야 할 것을 내걸었습니다. 또한 스페인 의회는 국정을 운영하는 데 플랑드르나 독일계 인사들을 기용하는 걸 제한하고 스페인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하도록 주장합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의 두 왕국의 왕위가 달렸기 때문에 카를로스는 이 두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새로운 국왕이 플랑드르에서 성장한 독일계의 외국인에 가까운 사실에 스페인 의회는 심각한 우려는 표명했지만 이는 스페인 미술계에는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카를로스1세가 성장했던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 북부 지역의 저지대 국가는 이베리아 반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습니다. 춥고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은 척박한 땅이었던 저지대 국가는 대신 빠르게 기술 발전에 몰두하여 당시로서는 고부가 사업이었던 방적 및 직물 기술을 개발하여 면직물과 의류를 가공하여 유럽 전역에 수출하며 상업과 무역에 집중합니다. 이렇게 축적된 부로 플랑드르와 독일 북부는 알프스 이남의 베네치아(Venezia), 피렌체(Firenze)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 문화 면에서도 개방적이며 혁신에 민감하듯, 플랑드르 지역은 피렌체, 베네치아와 더불어 15세기 유럽의 새로운 미술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5-1441), 로지에르 판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imus Bosch, 1450?-1516)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등 전통과 혁신을 넘나드는 미술가들이 등장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새로운 미술과 또 다른 특징을 지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미술들이 등장하면서 세련된 취향의 궁정 문화 및 도시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카를로스1세의 양육자였던 고모 마르가레테는 플랑드르의 미술 발전에 큰 공헌을 합니다. 사보아(Savioie)의 여공작이자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마르가레테 도스트리아는 미술에 대한 높은 취향과 심미안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미술작품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르가레테 도스트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알프스 이북 지역의 대표적인 미술 후원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마르가레테는 문학과 예술에 관한 세련된 취향을 지니는 게 군주의 이미지에 대단히 중요하며, 문학과 미술의 후원이 군주의 주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며 전사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전사-군주(warrior-prince)의 덕목이 우선되었지만 16세기는 중세와 달랐습니다. 자신이 물려받은 영토를 잃지 않은 채 더 넓은 영토를 후손에게 상속하는 건 여전히 군주의 기본 중의 기본 덕목이었습니다. 여기에 세련되고 우아한 예법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취향을 지닌 교양인으로서 궁정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것까지 군주의 덕목으로 떠올랐습니다. 싫든 좋든 당시의 군주는 모범적이라 여겨지는 군주의 모습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고 마르가레테는 군주에 대한 이미지가 변화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르가레테 고모 밑에서 성장한 카를로스1세는 고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미술에 대한 취향이 높든 그렇지 않든 이미 아버지 펠리페1세가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작의 자리를 물려 받아 통치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기에 문화와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카를로스1세는 막시밀리안1세의 유일한 남성 핏줄로서 황제의 붕어 이후 차기 황제가 될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당시만 하더라도 세습제가 아닌 독일의 여덟 명의 선제후들(Princeps Elector)에 의하여 선출되는 자리로서 카를 황손이 친조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막시밀리안1세는 오랫동안 자신의 손자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자 준비해 왔습니다. 황제의 의중을 그의 딸인 마르가라테 도스트리아 황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을 왕국의 왕을 넘어 제국의 차기 황제로서 키웠습니다. 당연히 카를이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높든 그렇지 않든 문화와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랬던 그가 결국 1516년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를 동시에 승계하였고 그렇게 두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연합 왕국은 신대륙의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양의 귀금속 수탈로 국가 수입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지만 자체 산업 기반이 좋지 못하여 경제적 번영의 성격은 플랑드르나 베네치아, 피렌체와는 달랐습니다. 경제 성장의 시기도 짧아 내부에서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동력도 부족하였습니다. 스페인 미술은 당시에 여전히 중세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중세 시대부터 온난한 기후로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던 이베리아 반도는 농산품과 모직물의 원자재가 되는 양모를 저지대 국가에 수출하였고, 플랑드르는 이렇게 수입한 원자재를 가공하여 완제품을 이베리아에 수출하며 이 두 지역은 무역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플랑드르 미술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스1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됨에 따라 스페인과 플랑드르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습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인물의 문화적 뿌리가 플랑드르였기 때문에 그가 세련된 플랑드르와 북유럽의 미술을 스페인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이식할만한 조건이 더욱 강화됩고 스페인 미술계도 외부의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기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겁니다.
물론 이는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궁정에서 세련된 미술 문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왔던 카를로스1세에게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나 미술은 세련되지 못하고 조악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궁정의 미술 사업들을 전적으로 플랑드르 출신의 미술가들에게 맡기며 스페인 미술가들을 배제할 수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플랑드르 출신의 미술가들이 궁정화가를 차지하면 스페인 미술가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이들 역시 플랑드르의 최신 미술 경향을 학습하며 스페인의 전통과 정체성이 반영된 독자적인 미술 문화를 발전시킬 겁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단 스페인 미술계는 외국인들의 침공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카를로스1세의 즉위는 스페인 국정이 플랑드르와 독일계 사람들에게 좌우될 수 있는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의회는 국왕의 측근들을 스페인 사람들로 채워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당시는 왕정 사회로서 의회보다 국왕의 권력이 더 컸습니다. 게다가 플랑드르 출신의 인사들의 수를 제한하더라도 카를로스1세의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 그가 친조부인 막시밀리안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차지하는 욕심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카를로스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재위 기간 내내 스페인 국왕보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를 우선하며 스페인은 본의 아니게 유럽 사회에 한층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미술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모 마르가레테 도스트리아로부터 새 시대의 군주는 마땅히 미술을 즐길 줄 알고 후원해야 한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고 그는 상당한 미술 작품들을 주문하고 미술가들을 후원하였지만 그 대상은 스페인 미술가들이 아닌 유럽의 다른 미술가들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위치한 플랑드르나 독일의 미술가들이나 혹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던 그의 정치적 야심에 걸맞게 이탈리아 미술가 특히, 베네치아 미술을 대표하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왕이었지만 스페인은 늘 뒷전이었던 카를로스1세가 유럽 전체의 정치 문제에 더 관심을 두고 유럽의 다른 선진 미술 지역의 미술에 더욱 호감을 보였으므로 그의 치세 동안 스페인 미술계 역시 그의 우선적인 후원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플랑드르, 독일과 베네치아 미술에 대단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미술계 역시 열심히 이들 지역의 선진 미술 문화를 수용하면서 자기 발전을 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곧 국가였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