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후원자의 탄생)카를5세 vs. 프랑수아1세

1.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프랑수아1세와 경쟁하다!

by 수다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5세는 16세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본 시리즈는 카를5세의 미술 후원에 나서기 전, 그가 미술 후원에 관심을 쏟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시리즈를 평생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1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가 미술 후원자로서의 카를5의 행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주목합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프랑수아1세와 경쟁하다!

2. 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심화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대립

3. 프랑수아1세 문화 군주로서 우위에 서다: 루브르 궁 건설 프로젝트

4.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이상적 군주가 되기 위한 미술에서의 경쟁

5. 다 빈치에 버금가는 천재 미술가가 필요한 카를5세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3.45.17.png van Orley, <Portrait of Karl V> (1510-1520)


카를5세(Karl V, 1500-1558)에게는 평생의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발루아(Valois) 왕조의 국왕 프랑수아1세(François I, 1494-1547)입니다. 프랑스는 중세 시대부터 이웃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북부의 노르망디(Normandie)와 브르타뉴(Bretagne) 지방 문제, 거기다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촉발된 100년 전쟁(Guerre de Cent Ans, 1337-1453) 등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주적이었습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Castilla y León)은 프랑스 남쪽 국경 문제로, 아라곤 연합 왕국(Aragon)과는 지중해에서 시칠리아(Sicilia) 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였습니다. 동쪽 국경을 맞대며 서로 유럽 본토에서의 패권을 다투었던 신성로마제국도 역시 프랑스와 앙숙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의 대립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3.47.55.png Clouet, <Portrait of François I> (1515?)


그렇지만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각자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군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된 건 아닙니다. 프랑수아1세가 카를5세보다 6년 연상으로 카를5세와 동년배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이 되기 전부터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차기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라는 점에서 종종 비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카를5세가 고모인 마르가레테(Margarete d'Austria, 1480-1530)의 네덜란드 궁정에서 성장한 것도 이 둘이 종종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둘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프랑수아1세가 1515년 1월 1일 루이12세(Louis XII, 1462-1515)의 뒤를 이어 먼저 프랑스의 군주가 됩니다. 카를5세는 1516년 1월 23일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스페인의 왕이 된지 3년 후, 카를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왕자 시절부터 서로 비교되며 은근히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던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라이벌 관계는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되자 심화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는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가 본격 대립하는 사건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현재 황제의 자손에게 자동적으로 차기 황제의 자리가 승계되는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느슨한 연맹(federation) 수준으로 연방제(Federalism)와 흡사한 국가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의 개인 영지를 비롯하여 보헤미아 왕국, 오늘날 독일 지역의 수 많은 제후국, 주교령과 자유 도시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연합체였습니다. 황제의 자리는 세 명의 성직제후, 네 명의 세속제후의 총 7명의 선제후(Kurfürs)에 의하여 선출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자체가 느슨한 정치 공동체에 가까웠으므로 당연히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centralized) 국가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더라도 실제로는 제국을 구성하는 지역에 강력하게 황권을 행사할 수도, 그렇다고 구성 지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무한히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황제는 제국과 관련한 주요 문제를 의결할 때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재정 지원에 있어서도 제후들은 황제의 요청에 거의 대부분 따랐지만 이는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의무라기 보다는 황제의 뜻에 동의하고 존중한다는 원조의 의미였습니다.


스크린샷 2025-08-01 오후 4.33.28.png Dürer, <Portrait of Maximilian I> (1519)


그럼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위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구성 지역은 황제의 요구를 수용하며 전쟁을 통한 유럽에서의 헤게모니 장악에 가장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성로마제국 황위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던 막시밀리안1세(Maximilian I, 1459-1519) 황제는 아들 펠리페1세가 사망한 후 자신의 유일한 남성 직계 후손인 카를 황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계승하기 위해 무려 10년이 넘게 준비를 해왔습니다. 황제 선출에 결정적인 권한을 지닌 선제후들에게 자신의 친손자가 황제가 되도록 물밑에서 은밀한 포섭 작업을 해왔습니다. 게다가 황제의 자리는 결국 든든한 재정력을 통해 획득된다는 걸 경험한 막시밀리안1세는 선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알자스(Alasace) 지역의 탄광에서의 이권을 담보로 당시 최고 은행가인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1459-1525)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빌립니다. 여기에 카를5세가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의 신흥 부국(富國)으로 떠오른 스페인에 왕이 됨에 따라 카를은 막대한 자금 원천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투표에 의한 선출직이지만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는 왕족들 사이에서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처음으로 프랑스인인 프랑수아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프랑수아1세는 할아버지의 오랫 동안의 물밑작업과 카를5세의 강력한 자금 동원 능력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카를5세는 프랑수아1세를 꺾고 1519년 6월 28일 비싼 값을 치루고 친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당선됩니다. 프랑수아1세 이후 프랑스 왕족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왕위에 도전한 인물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두고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경합을 벌였다면 이 둘의 감정적 대립은 덜 심하였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늘 비교 대상이었던 프랑수아1세가 프랑스인으로서는 전례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출마함으로서 카를5세의 자존심은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는 카를5세가 차지했지만 둘 다 20대의 젊은 국왕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대립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향후 이들의 대립이 격화될 수 있음을 예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야기는 2편으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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