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람인 티치아노는 왜 스페인 미술의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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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르네상스 미술의 Legend of Legend: https://youtu.be/VZupWZAbg1A
▶ 수다인 공식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hysudain
1. 국립프라도미술관과 티치아노 베첼리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Madrid)에 위치한,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미술관인 국립프라도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코, 스페인 미술, 더 나아가 19세기 이전 서양미술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미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시녀들 Las Meninas>(1656-1657)입니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쉘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말과 사물 The Order of Things>(1966)에서 시선과 권력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언급하면서 <시녀들>은 서양미술의 전체에서 매우 미스테리하면서 동시에 17세기 서양 미술에서 반드시 눈여겨 봐야 할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스페인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Francisco Franco, 1892-1975)이 사망하며 후계자로 후안 카를로스1세(Juan Carlos I, 1938-)가 입헌군주제로서의 왕정 복고를 선언하며 빠르게 자유민주화 되며 문호를 개방하게 된 1975년 이후,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을 직접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프라도미술관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프라도미술관에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cia)주의 중심도시인 세비야(Sevilla) 출신인 벨라스케스는 1623년 궁정화가에 임명된 후, 두 차례 이탈리아 로마(Roma) 교황청의 사절단으로 방문하여 활동한 전력을 제외하고 1660년 사망할 때까지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왕실을 위해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왕실 소장품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 전역이 혁명으로 몸살을 앓을 때, 스페인은 프랑스와 같이 왕정이 몰락하지 않도록 왕실의 권위를 상당 수 포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왕실이 소장한 미술품을 국가의 소유로 전환시켰고 그렇게 국유화된 미술품들을 바탕으로 1819년 국립프라도미술관이 공식 개관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프라도미술관은 벨라스케스의 거의 대부분의 주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스페인 미술의 또 다른 천재 미술가이자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상당 수의 걸작들이 프라도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 출신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지만 그만큼 스페인 출신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활동한 전력이 없던 미술가들의 작품들도 상당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 출신의 거장인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77-1576)입니다. 프라도미술관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하면, 미술관은 티치아노의 유화 작품을 45점 정도 소장하고 있으며, 티치아노의 원본을 후배 미술가들이 모사하거나 스케치로 남긴 자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습니다. 단지 다수의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장 작품들의 퀄러티 역시 티치아노 및 르네상스 미술 연구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작품들일 정도로 뛰어납니다.
2. 르네상스 3대 거장?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를 흔히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합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화적 중심지는 알프스 산맥 북쪽의 네덜란드, 플랜더스(혹은 프랑스어로 Flandres) 지역과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 중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해요. 비슷한 시기 르네상스라는 명칭을 공유하지만 이 둘은 상당히 이질적입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발전한 문화적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후대 사람들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세 명의 예술가를 꼽습니다. 이런 바, 르네상스 3대 거장인데,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첫 번째, 인류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두 번째, 인류의 미술의 전체 역사에서 불굴의 초인으로 평가받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rnati, 1475~1564), 마지막으로는 고전적인 우아함(grace)으로 미술에서 천상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낸 미술가로 평가받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가 이들입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에는 편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피렌체(Firenze) 혹은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영토에 속하는 지역 출신입니다. 이들은 평생 혹은 특정 시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다 빈치는 아니지만,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경우 로마에서 교황청의 야심찬 여러 미술 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1490년대에서 1520년대 사이에는 딱히 궁정화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특히 라파엘로는 1510년 이후, 아예 로마에 정착하며 교황청의 미술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이 둘을 교황청의 궁정화가(court painter)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피렌체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이후 이들은 모두 피렌체와 로마와 같은 이탈리아 중북부 특유의 미술 문화를 형성. 발전시키며 후에는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들입니다.
3. 피렌체/로마 미술 vs. 베네치아 미술 feat. 디제뇨(disegno) vs. 콜로레(colore)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동하던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거점지는 크게 네 곳으로 나뉘었습니다. 반도의 중부에 위치해서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Papal State)과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피렌체 공화국, 남부의 나폴리(Napoli)를 수도로 한 나폴리 왕국, 북서쪽으로 프랑스와 국경을 맞닿고 있으며 상업과 양모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스포르차(Sforza) 공작 가문이 통치하는 밀라노(Milano) 공국(dukedom), 그리고 북동쪽의 아드리아 해(Adria)에 변한 항구 도시이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항구 도시였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습니다. 이 중 르네상스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미술 문화를 꽃피운 건 피렌체. 로마 그리고 베네치아였습니다. 정확하게는 피렌체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술 문화가 이후 로마로 확산되었고 1520년대, 즉 라파엘로의 사망 이후로 미술의 중심지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피렌체와 로마는 같은 미술 문화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와 대척점에 있던 지역이 베네치아였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크게 피렌체 및 로마의 이탈리아 내륙 중북부 지역과 베네치아의 두 지역으로 구분하는 건 이 두 지역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이들이 구현하는 예술관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1300년대부터 기하학적 원리를 발전시켰고 기하학적인 효과로 2차원의 평면에 현실감 있는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눈은 시각적 환영을 실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므로 2차원의 평면에 공간적 특성과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트릭(trick)을 사용하여 보여지는 대상을 현실로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수학적인 원리를 적용한 기하학적 원근법, 특히 선원근법(linear pespective)을 그림에 적용함으로서 그림의 사실감을 부여하며 사람들에게 2차원의 그림이 부피감을 지닌 3차원의 예술로 보이게 끔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관을 지닌 피렌체와 이탈리아 중부 내륙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는 그림을 선으로 잘 표현해내고 사람들에게 명확한 외형 묘사를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드로잉, 이른바 디제뇨(disegno)라는 밑그림 작업을 미술의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위에 색을 얹히는 건 부차적인 거고 디제뇨 작업을 통해 그림에 현실감, 공감적 깊이감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의 예술관은 예술이 얼마나 자연을 잘 재현하느냐를 관건으로 생각했는데냐, 이탈리아 중부 내륙 지역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3차원의 공간성, 부피감의 재현이야말로 회화의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반면, 베네치아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실점(vanishing point)으로 수렴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 기하학적 원근법에 따라 그림의 깊이감을 구현하려는 건 베네치아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인위적인 장치대신 그림의 뒤쪽에 점차 멀어지는 자연의 풍경이나 배경을 묘사함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림에게 사실감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의 배경과 풍경 묘사를 중요한 요소로 보게 만들었으며 그림에서 풍경의 비중을 점차 높이며 후에 풍경을 단독으로 그리는 풍경화(landscape)라는 독자적인 회화 장르의 탄생으로 예고합니다.
베네치아의 자연 환경은 피렌체와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결정적인 요소였고 그들이 왜 색채를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바다 위에 인공 섬을 건설해서 그 위에 도시를 만들어 나간 베네치아는 앞에는 바다, 내부에는 수로로 연결된 온통 물로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다에 접해 있고 도시 내부도 수로러 연결되어 있는 베네치아에서 세계는 내륙 도시들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바다에는 연중 해무가 끼기 쉽상이고, 물에 의해 빛은 산란되기 마련입니다. 물에 반사된 대상은 대상과 배경이 종종 모호하기 마련입니다. 지중해는 맑고 청량한 하늘과 물빛은 사람들에게 색채에 대한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들은 내륙 지역 사람들보다 색채를 더욱 잘 구분할 수 있었고 색에 대한 언어적 표현도 훨씬 다양하였습니다. 베네치아 인들은 우리가 보는 세상은 빛의 산란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불분명하게 보여질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림을 그리는데 드로잉, 즉, 디제뇨는 덜 중요했습니다. 그림을 더욱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건 색채였습니다. 빛에 따라 대상은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었고 심지어 동일한 대상 역시 빛의 조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임으로서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디제뇨보다는 색채, 즉 콜로레(colore)가 진실을 전달하는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이 그림을 시작하는 지점이 드로잉 작업이라면 베네치아 사람들은 드로잉 과정을 생략한 채 우선 물감을 붓에 묻힌 채 색으로 대상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표현한 후, 색채를 덧바르면서 윤곽을 명확해 나가는 거였습니다.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당시 상업, 무역(혹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이미 2세기가 넘게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이들의 오랜 라이벌 관계는 심지어 미술로도 이어졌습니다. 피렌체가 제시하는 미술과 베네치아가 제시하는 미술 중 어느 쪽이 보다 우월한지가 이미 1500년대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피렌체의 미술이 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대로 베네체아 사람들은 베네치아 미술이 피렌체가 지향하는 미술관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주장하였고요. 이러한 대립에는 일종의 애국심 혹은 애향심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미술가들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반면, 글 재주가 있는 문예가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언변과 글솜씨로 각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지역의 미술이 더 우세하다는 걸 나름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승자는 피렌체였습니다. 로마와 국경을 맞댄 피렌체는 제212대 교황인 식스투스4세(Sixtus IV, 1414-1484) 시기 피렌체와의 전쟁을 벌였지만 오히려, 이 전쟁으로 로마에 피렌체의 최신 미술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식스투스4세는 자신의 명령 하에 조성되던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la Sistina)의 완공 단계에서 필요한 내부 장식에 피렌체 미술가들을 적극 초빙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교황청과 피렌체 공화국의 우호적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당시 피렌체의 통치자인 로렌조 데 메데치(Lorenzo de'Medici, 1449-1492)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을 비롯한 자신이 후원하는 혁신적인 미술가들을 로마에 대거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비록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 사업 계약이 종료된 후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갔지만 로마에는 이렇게 피렌체의 최신 미술 문화가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1490년대, 식스투스4세의 조카이자 제216대 교황의 자리에 오른 율리우스2세(Julius II, 1443-1513)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 피렌체 출신 혹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젊고 유능한 미술가들을 로마로 불러 모으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황청의 작업을 수주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작업이 끝나면 피렌체로 돌아가곤 했지만 라파엘로는 로마에 입성한 후 죽을 때까지 로마에 머물며 교황청을 위해 작업하였고 그렇게 피렌체 미술을 로마에 이식하였습니다. 생의 후반인 30대 중반,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 된 라파엘로, 그리고 이미 당시에도 경이롭다고 평가된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아담의 탄생 The Birth of Adam>을 포함한 천지창조 벽화들 등의 이들 거장들이 이룩한 성과들직접 경험하기 위해 젊고 유능한 미술가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그렇게 이탈리아 내륙의 미술 중심지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동하였습니다.
베네치아는 아쉽게도 당시에 지중해 무역으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얻음으로서 유럽의 많은 지역들에게 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도 개방적이었으며 심지어 성(sex) 관련 산업이 대단히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베네치아를 "유럽의 매음굴"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베네치아는 경제적 부와 도덕적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시기 베네치아 미술계가 이룩한 혁신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폄하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룩한 미술은 도덕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베네치아 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색채(colore)는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여성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 그대로 유약하고 나약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감성적이며, 심지어 성(sex)적 방탕함을 부추긴다고 비난받았습니다. 반면에 선(disegno)는 남성적인 미덕과 연결되었습니다. 강인하고 금육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으로도 올바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따라 붙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네치아 미술를 도덕적 해이이며, 베네치아 미술을 선호하는 건 올바르지 못한 취향으라는 무고로 이어졌습니다.
베네치아는 상업적,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권력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 못지 않게 권력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베네치아는 경제적 번영과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는 있지만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제적 번영에 대한 욕구와 권력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은 1520년대의 로마였습니다. 1527년 이전, 교황은 여전히 유럽에게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으며, 교황청은 유럽 권력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권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유럽의 많은 재력가들과 상인들이 로마로 몰려 들었습니다. 단지 경제적 성공 그 이상의 성공을 원했던 미술가들이 로마에 끌렸던 건 그 이유입니다. 심지어 베네치아 출신의 세바스티아노 루치아니(Sebastiano Luciani, 1485-1547), 일명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 역시 베네치아를 떠나 로마에서 교황청의 미술 작업들에 참여하며 활동하였습니다. 1527년 발생한 로마 약탈(Sack of Rome)로 로마는 폐허가 되고 교황의 권위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로마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1527년 로마를 침공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Karl V, 1500-1558)는 그 후로도 교황의 권위를 여전히 존중해 주었습니다. 1535년 이후, 로마는 미술의 중심지이자 부와 권력의 중심지로서의 권위를 회복하였습니다. 1520년 라파엘로는 사망했지만, 전설 그 자체였던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건재하였고 율리우스2세 이후의 교황들의 미켈란젤로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였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피렌체와 로마의 디제뇨를 중심으로 한 미술문화는 칭송을 받은 반면, 색채, 즉 콜로레를 핵심에 둔 베네치아의 미술은 폄하되었습니다. 당연히 피렌체와 로마의 미술 문화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예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은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반면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가장 늦게 태어나 가장 늦게 삶을 마감한 거장 베네치아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는 칭호는 의미 있지만 여기에는 편견이 숨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피렌체와 로마의 이탈리아 중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피렌체와 로마의 미술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는 건 결국 피렌체와 로마의 미술 문화가 베네치아 미술에 비해 우수하며 베네치아 미술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편견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4. 르네상스 4대 거장!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오늘날의 많은 미술사 연구자들은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르네상스 4대 거장이라는 보다 온건한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거죠. 그 결과 티치아노를 여기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티치아노는 1510년대 중반부터 사망하는 1570년대 중반까지 무려 60년 동안 베네치아 미술계를 대표한 인물로서 그 자신이 당시 베네치아 미술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게다가 1520년 라파엘로의 사망 이후, 그는 미켈란젤로의 최고의 그리고 평생의 라이벌이었습니다. 1510년 이후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할 때까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둘 다 교황청을 위한 작업들을 수행하면서 강력한 라이벌 관계를 구축합니다. 사람들 역시 로마에서 이 둘이 교황의 주문에 따라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이 둘을 자주 비교하였고요. 하지만 1520년 이후 라파엘로의 이른 죽음으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라이벌 관계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사후 새롭고 더 오랫 동안 지속되는 라이벌 관계가 시작됩니다. 바로 티치아노와의 라이벌 관계죠. 비록 티치아노는 교황청을 위해 로마에서 작업을 한 적은 없기에 미켈란젤로와 활동 영역이 겹치지 않았으며, 미켈란젤로가 화가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 활동 영역은 조각이었던 반면, 티치아노는 철저히 화가로 활동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라이벌 관계만큼이나 격렬했습니다. 이 둘의 라이벌은 단지 둘 중 누가 더 뛰어나냐의 문제를 넘어 각 미술계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마의 미술의 대표자였고,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미술계의 대표자였습니다. 이 둘에 대한 논쟁은 결국 둘 중 어느 지역의 미술이 더 우월한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 논쟁은 이번에는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는 1564년까지 거의 40년 동안 지속됩니다. 이렇듯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티치아노를 르네상스 미술 역사의 전체에서 배제하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티치아노의 미술가로서의 활동은 오히려 다 빈치를 뛰어 넘습니다. 다 빈치는 물론 인류 역사에서 손 꼽히는 천재 중 한 명입니다. 그렇지만 다 빈치의 관심은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창조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렇지만 미술가로서 그의 업적은 제한적입니다. 그가 완성한 미술품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Santa Maria della Grazie)에 조성된 벽화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1495-1498)은 이미 1500년대부터 빠르게 훼손되었고 작품의 보존, 관리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모나리자>나 <암굴의 성모 The Virgins of Rocks>와 같은 뛰어난 회화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많은 수는 스케치 수준에 머물고 실제 작품의 완성으로 이어지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마나 그의 스케치들도 그의 사후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다 빈치의 작업 노트가 발견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알려졌을 뿐이지, 다 빈치 사후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다 빈치의 미술가로서의 업적은 잘 알기 어려웠습니다. 다 빈치가 성모자 그림들에서 구현한 감각적이고 우아한 아름다움은 라파엘로의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 외의 다 빈치에게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미술가들은 거의 없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프랑스 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은 군주로 평가받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 중 한 명인 프랑수아1세(François I, 1494-1547)가 다 빈치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그의 죽음 순간을 곁에서 지켰다는 게 전설로 회자될 뿐, 미술가로서 그의 미술 작품이 후배 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반면 티치아노는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을 화가에 매진하였습니다. 거의 90년을 산 티치아노는 1510년대부터 작업을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려 65년 정도를 화가로서 활동한 겁니다. 화재 등의 이유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지만 오랜 활동 시기동안 다작한 탓에 티치아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도처에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후배 미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에는 틴토레토(Tintoretto)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야코포 로보스티(Jacopo Robusti, 1518-1594)와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 등의 후배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베네치아 미술의 거장인 티치아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대단한 야심가인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의 아성을 뛰어 넘고 싶어했고 여러 파격적인 그림들을 그랬습니다. 그렇게 베네치아 미술계에서 자리 잡아가던 틴토레토로 인해 노년의 티치아노 역시 틴토레토의 혁신을 받아들이는 등 계속해서 자기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티치아노의 영향은 단지 16세기 후배 베네치아 미술가들에게만 그치지 않습니다. 17세기 거장들로 평가받는 다른 유럽 국가의 미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부드러운 윤곽 표현과 분위기, 밝고 화려한 색채 표현 등이 돋보이는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앤소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등의 후배 미술가들은 티치아노의 미술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티치아노의 미술로부터 특히 깊은 영향을 받은 후배 미술가는 17세기의 두 스페인 미술가들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입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가 된 이후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티치아노의 장점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무리요 역시 1658년에서 1660까지의 마드리드 체류 이후 그림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는데 이 기간 동안 왕실이 소장한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들을 집중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50년대 티치아노와 루벤스, 반 다이크의 화풍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고, 티치아노의 그림을 연구하고 고향 세비야로 돌아간 무리요는 당시 유행하던 미술 경향을 고향에 전파하여 결국 세비야 미술계에도 변화를 촉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1660년대 이후, 세비야의 미술가들 역시 간접적으로 티치아노의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티치아노는 르네상스 3대 거장 못지 않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존중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와 더불어 르네상스의 4대 거장으로서 그의 중요성과 서양미술 전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제대로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5. 스페인 미술의 토대를 제공한 티치아노
무엇보다 그는 스페인 미술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17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티치아노가 사망한 후 한참이 지나 그의 작품들을 연구할 수 있었던 건 스페인 왕실이 티치아노의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의 다른 거장들인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로마의 교황과 교황청의 후원을 받으며 그림을 주문 받은 반면, 티치아노는 당시 유럽에게 가장 강력한 세속의 권력자들에게서 그림을 주문 받고 후원을 받았습니다. 다 빈치를 존경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 역시 티치아노로부터 자신의 공식 초상화를 주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티치아노는 이탈리아의 여러 귀족들과 왕족들로부터 그림을 주문 받았으며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카를5세, 그리고 카를5세에 이어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입니다. 이 둘은 티치아노의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들로 꼽히는 다수의 작품들을 주문하였습니다. 특히 펠리페2세는 아버지 카를5세로부터 스페인의 왕위를 공식적으로 물려받기 전(1556년)부터 부왕을 통해 거장인 티치아노를 소개 받아, 완연한 경지에 오른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그로부터 그림을 주문함으로서 티치아노에 관한 애정이 카를5세보다 더욱 깊었습니다. 게다가 펠리페2세는 카를5세보다 미술에 대한 안목이나, 문화예술이 현실 정치에 미치는 효과를 부왕보다 더욱 잘 이해했기에 티치아노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카를5세에서 펠리페2세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2대(代)에 걸쳐 스페인 왕실에 봉사하며 스페인 왕실을 위해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했기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은 이탈리아 본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티치아노의 다수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겁니다.
카를5세에서 펠리페2세의 티치아노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단지 티치아노로부터 여러 작품들을 의뢰하고 그의 작품들을 수집한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페인 왕실이 소장하게 된 티치아노의 작품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와 같은 뛰어난 스페인 미술가들의 등장의 근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는 모두 그들 자신이 미술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이들의 재능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건 뛰어난 선배 거장들의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선배 화가의 장점을 학습하고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거장으로 알려진 그 어떤 미술가라도 선배 예술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들을 연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변형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인물이 없습니다. 티치아노에게는 선배 미술가인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과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7-1515)이었고,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에게는 그 존재가 티치아노였습니다.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는 이후 고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야는 프랑스인인 19세기의 미술가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뿐만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와 같은 20세기 스페인 현대미술의 거장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고려하였을 때, 티치아노는 비록 스페인 출신도, 그렇다고 스페인에서 활동한 미술가도 아니지만, 티치아노의 걸작들을 스페인 정부가 소장함으로서 국립프라도미술관의 경쟁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스페인 미술의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스페인 미술의 전체 역사에서 보았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보다 더욱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