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5세와 티치아노의 우정의 시작, <갑옷을 입은 카를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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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신 갑옷을 두른 젊은 남성의 초상화
얼굴을 제외하고 목에서 손까지 철제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남성이 서 있습니다. 남성은 왼손은 허리에 두고, 오른손은 장검을 들고 있습니다. 짧은 검은색 머리에, 구레나룻에서 코밑을 거쳐 턱을 온전히 덮을 정도로 수염을 길게 길렀지만 그럼에도 긴 하관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 남성은 20대 말, 30대 초반 정도로 보입니다. 이 남성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돌려 그림 밖의 관람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습니다. 15세기 말, 16세기 초반의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의 전통에 따라, 일반적으로 그림 속 인물이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도록 묘사되면, 그 그림은 특정 인물을 그린 초상화(portraiture)로 해석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 그림 역시 특정 인물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착용하고 있는 갑옷의 화려함, 오른손에 들려 있는 장검으로 보아 이 남성은 그저 평범한 기사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신분인 것 같습니다. 그림의 왼쪽, 묘사된 인물의 오른쪽은 완전히 검게 처리 될 정도로 어둡지만 그의 왼편, 우리가 보기에는 그림의 오른쪽에는 뒤쪽에 분명한 무언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왼쪽 등 뒤로는 어깨 높이 정도의 단이 있습니다. 이 단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화가가 세심하게 그 질감을 표현해낸 걸로 보아 붉은색 벨벳(velvet)이 덮여 있는 고급스러운 단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붉은 색 융단이 깔려 있는 단상 위에는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가 놓여 있습니다. 갑옷과 같은 색상에 정수리 부분에는 화려한 깃털 장식으로 마무리 되어 있는 이 투구는 남성의 머리 높이와 같은 높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남성이 전장에 나갈 때 아마 지금 착용하고 있는 갑옷과 뒤쪽의 투구를 머리에 쓴 채, 온몸을 완전히 가렸을 겁니다. 군인, 그것도 고위급 군인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지금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아닌, 화가의 캔버스 앞에 군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갑옷을 두르고 이러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의 머리 높이와 똑같은 위치에 투구가 놓여 있어서 지금 당장 전투가 발생하면 바로 그 투구를 집어 들고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용맹한 전사라는 걸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외교가이자 화가인 루벤스, 스페인 궁정을 처음 방문하다!
1603년, 이탈리아 만토바(Mantova)를 통치하는 만토바 공작, 빈센초 곤차자(Vincenzo I Gonzaga, 1562-1612)는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펠리페3세(Felipe III, 1578-1621)에게 외교 목적으로 사절단을 통해 여러 조공품을 보냅니다. 만토바 공작의 사절단에는 26살의 페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상류층 출신으로 그는 만토바 공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궁정을 오가는 외교관으로 활동합니다. 동시에 그는 17세기 유럽 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대단한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스페인 마드리드(Madrid) 궁정을 처음 방문한 만토바 공작을 대신해 펠리페3세에게 조공품을 전달하고 마드리드 궁정에서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는 다른 외교관들과 달리, 미술 작업을 통해 문화 외교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1603년 9월 마드리드에 도착한 루벤스는 1604년 초까지 스페인 궁정에 머물면서 왕실을 위한 미술 작업을 수행합니다. 스페인 왕실에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77?-1576)의 그림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16세기 말, 1600년 경에는 티치아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와 더불어 고전적이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전형을 구현한 불멸의 미술가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왕실은 만토바보다 오히려 티치아노의 작품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스페인 방문 시기,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펠리페3세는 루벤스에게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모사하도록 명령합니다. 티치아노의 많은 작품들 중 펠리페3세는 자신의 조부모를 그린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사하도록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1603년에서 1604년 사이, 루벤스는 스페인 왕실이 소장하던 티치아노가 그린 펠리페3세의 조부에 관한 두 점의 그림을 다시 그립니다. 첫 번째 그림은 펠리페3세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동시에 그려진 이중 초상화(double portrait)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이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한 남성의 초상화입니다.
1603년 말에서 1604년 초까지 루벤스가 모사한 티치아노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남성이 당시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페3세의 친조부라면 그 역시 국왕에 준하는 인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루벤스, 혹은 티치아노의 그림 속 남성은 스페인의 국왕인 카를로스1세(Carlos I, 1500-1558)입니다. 그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카를로스1세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5세(Karl V)로 더 유명합니다. 독일식 이름인 Karl의 스페인식 버전이 Carlos입니다. 그는 Karl이라는 이름을 쓴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다섯 번째 황제이며, Carlos라는 이름으로는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와 스페인의 카를로스1세는 동일 인물입니다. 1603년에서 1604년 동안 제작된 카를로스1세 왼편에 위치한 여인은 그의 부인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자, 스페인의 왕비인 이사벨 데 포르투갈(Isabel de Portugal, 1503-1539)입니다.
루벤스가 모사한 황제 혹은 왕이 묘사된 티치아노의 그림은 모두 티치아노의 원본을 모사한 작품이지만 안타깝게도 티치아노가 제작한 원본은 모두 소실된 상태입니다. 1604년 3월 13일 왕실 초상화들이 보관되어 있던 엘 파르도(Palacio real de El Pardo)에 화재가 발생하여 티치아노의 원본이 모두 소실되어 버립니다. 다행히 그 전에 만토바 공작의 외교 사절로서 화가 루벤스가 펠리페3세의 명령으로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5세의 초상화를 모사했기 때문에 비록 루벤스의 버전으로나마 그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전사-군주(Warrior-Prince) 초상화로서의 <갑옷을 입은 카를5세>
루벤스가 모사한 티치아노의 카를5세에 관한 초상은 티치아노의 원본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림의 실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티치아노는 카를5세의 어진(御眞: 황제나 왕의 초상화)를 네 차례 그렸지만 현재 티치아노의 작품은 세 점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 루벤스가 그린 갑옷을 입은 모습은 첫 번째로 제작된 초상화입니다. 단지 티치아노가 제작한 카를5세의 초상화 중 가장 먼저 제작된 초상화이기 때문만으로 이 초상화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특정 미술작품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건 다음의 대략 여섯 가지 이유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a) 유사한 작품들의 전형을 제시하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을 지녔거나
b) 작품 자체가 대단히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하거나 미학적 가치를 완성했거나
c) 미술가를 대표하거나 혹은 미술가의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는 예외성(exception)을 지녔거나
d) 다른 미술가들의 과거의 유사한 계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독창성(originality)을 지녔거나
e) 작품이 어떠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고를 증언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녔거나
f) 이후 등장하는 유사한 계열의 작품들에 전형(exemplar)이 되며 후대에 영향을 미치거나
루벤스, 혹은 티치아노가 그린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이 여섯 가지 기준 중 첫 번째인 유사한 작품들의 전형성을 따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초상화이며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자면, 전사-군주(warrior-prince) 초상화입니다. 전사-군주 초상화는 인물이 황제, 왕, 혹은 공작이나 백작 등의 특정 지역을 통치하는 군주(prince)이자 군대의 통솔자로서 본인이 직접 전장을 누볐던 인물들, 혹은 그러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은 경우에 제작됩니다. 이러한 전사-군주 초상화에서 인물은 <갑옷을 입은 카를5세>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채 전장을 누비는 전사로서의 모습을 우선합니다. 하지만 군주가 전장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전통은 중세적 전통으로서 카를5세를 마지막으로 16세기에 후반에는 군주가 직접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가 간헐적으로 전투에 출정한 적은 있지만 유럽에서 군주가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전투를 하는 건, 군인 출신으로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1세(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19세기 초반까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자신이 군권의 정점이라는 걸 상징하듯 지휘봉을 든 채 등장하지만 티치아노 혹은 루벤스의 그림처럼 전신 갑옷을 입고 등장하지 않는 대신, 반신 갑옷을 형식적으로 착용할 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다음 세대의 전사-군주 초상화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16세기 초반의 전사-군주 초상화의 전형으로서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예술성과 미학성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게 현존하는 작품이 티치아노가 아니며, 루벤스는 원본에 충실하게 재현한 일종의 복제품(copy)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벤스는 인간으로,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 티치아노가 그린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비교적 원본 그래도 그렸지만, <카를5세와 이사벨 황후의 초상>은 티치아노의 원본과 달리, 그림 뒤쪽에 풍경을 루벤스가 첨가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복제 그림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미학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4. 향후 스페인 미술의 판도를 바꾼 그림, <갑옷을 입은 카를5세>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여섯 가지 이유들 중 다섯 번째 이유보다 더 macro한 이유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평생에 걸쳐 카를5세의 어진을 총 네 차례 제작한 티치아노가 처음으로 황제의 어진으로서 <갑옷을 입은 카를5세>를 제작한 건 1532년입니다. 1532년 카를5세와 티치아노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미 이 둘은 1529년 만토바의 남서쪽에 위치한 파르마(Parma)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Venezia)에서 240km를 이동해 황제를 알현합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첫 만남에 황제는 티치아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비롯한 어떠한 그림도 주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1532년 곤차가 가문이 통치하는 만토바에서 카를5세와 티치아노가 두 번째 만남을 갖습니다. 당시 만토바 공작은 페데리코 곤차가(Federico Gonzaga, 1500-1540)로서 그는 펠리페3세의 스페인 궁정에 루벤스를 사절로 보내 조공을 바친 빈센초 곤차가의 할아버지입니다. 페데리코 곤차자의 만토바 궁정에서 재회한 황제와 화가는 비로소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1532년 황제 카를5세는 티치아노에게 자신의 첫 번째 초상화를 주문하고 그렇게 티치아노는 만토바 궁정에서 황제의 어진인 <갑옷을 입은 카를5세>를 완성합니다.
이렇게 티치아노가 완성한 카를5세의 어진은 황제인 카를5세와 화가인 티치아노와의 오랜 우정과 신뢰 관계가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바로 그 증거가 되는 작품이 <갑옷을 입은 카를5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황제의 초상화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언 혹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향후 스페인 미술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인 그림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당시 유럽에서 미켈란젤로와 함께 최고의 재능을 지닌 미술가인 - 미켈란젤로가 벽화 작업을 통해 화가로서 활동했지만 그는 조각에 매진한 반면, 티치아노는 철저하게 회화에 집중하는 차이가 있지만 - 티치아노가 한 팀이 된 겁니다. 막강한 권력자와 천재의 만남, 그리고 권력자의 천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물질적 지원은, 정작 당사자인 카를5세와 티치아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결국 향후 스페인의 미술의 역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끕니다. 19세기 이전, 스페인의 그 어떠한 화가도 간접적으로나마 티치아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실은 이미 생존해 있을 당시부터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티치아노의 걸작들을 여럿 소유하고 있었고 그렇게 티치아노의 걸작들에 둘러 쌓인 스페인 왕가는 궁정 미술에 대한 기준과 취향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후대의 군주들은 자신이 통치 기간 동안, 왕실의 미술이 카를5세/카를로스1세 시대 때 이룩한 영광을 재현하거나 혹은 이를 뛰어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정미술가에 대한 기대가 높았습니다. 스페인 왕실에 봉사한 후대의 야심만만한 몇몇 궁정 미술가들은 어떻게든 티치아노라는 전설에 근접해지거나 혹은 티치아노를 넘어서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17세기 중반, 펠리페4세(Felipe IV, 1605-1665) 시기, 고전 시기 스페인 미술의 진정한 천재 미술가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스페인 미술의 이러한 전설이 시작된 건 바로, 카를5세와 티치아노가 1532년 두 번째 만남을 가지며 둘 사이의 신뢰 관계를 본격적으로 형성하며, 황제가 티치아노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주문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그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 지금은 원본이 소실된 채, 루벤스의 복사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갑옷을 입은 카를5세>입니다. <갑옷을 입은 카를5세>는 결과적으로 향후 전개되는 스페인 미술의 역사를 결정짓는 대단히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