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고위 국가공무원 vs. 고소득 프리랜서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따로 또같은 삶과 예술 세계

by 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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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에고 벨라스케스 vs.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17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술가 두 명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가 꼽힐 겁니다. 그와 함께 여러 미술가들 사이에서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이 꼽힐 겁니다. 이 둘은 당시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지만 인생 전반에서 매우 다른 career의 길을 걸었는데요, 짧게 요약하자면 이 둘의 career는 각각 국가직 공무원과 프리랜서 자영업자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career가 어떻게 다르지만 어떤 부분이 유사한지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2. 스페인 미술의 중심지, 마드리드 vs. 세비야

Seville-in-16th-C-Sanchez-Coello-Wikimedia.jpg 17th Century Seville, Spain

벨라스케스는 1599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sia)의 주도(capital)인 세비야(Sevilla)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비야는 지금도 마드리드(Madrid), 바르셀로나(Barcelona), 발렌시아(Valencia)에 이어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세비야는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과달키비르 강(Guadalquivir)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내륙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지리적 이점으로 16세기부터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습니다. 세비야는 신대륙에서의 귀금속과 각종 수입품들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반대로 유럽의 물류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향해 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세비야는 1600년에서 1630년 사이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프랑스 파리(Paris),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와 함께 인구 10만 명이 넘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유럽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세비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세비야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la Sede)이 증명해줍니다. 198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열 번째로 거대한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으로서 이 시기 세비야의 부가 집약된 건축물입니다.


오늘날에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는 각 국가의 미술 중심지인 것처럼, 당시 세비야는 스페인 미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 미술계는 세비야와 마드리드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두 도시가 미술계의 중심이 된 이유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마드리드는 유럽의 수도들 중 역사가 가장 짧은 도시입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는 1561년 왕국의 정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를 왕국의 새로운 영구적 수도로 결정하였습니다. 중세의 전통에 따라 스페인 왕실은 한 곳에서 정주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계속 이동했는데, 주로 톨레도(Toledo)에서 머물렀습니다. FM 스타일인 펠리페2세는 공평함을 가장 우선했는데, 톨레도는 왕국의 중심에서 약간 남쪽에 있어서 왕국의 정확히 중앙에 있는 마드리드를 왕국의 항구적인 수도로 결정했습니다. 1561년 선언 즉시 펠리페2세는 중세 요새였던 알카사르(alcázar)에 왕실을 이주했고 마드리드는 그렇게 갑자기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마드리드를 당시 유럽의 패권 국가였던 스페인의 수도로 탈바꿈하기 위해 왕실은 왕궁의 개/보수를 비롯한 각종 건축 사업들을 실시하였습니다. 도시 미화 사업에 미술 사업들이 포함되었고 자연스럽게 왕국 전역에서 미술가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펠리페2세가 마드리드로 천도한 50여 년 후인 1600년대 초가 되면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미술 중심지로 거듭났습니다.


마드리드가 정치적인 이유로 스페인 미술계의 중심지가 된 것과 달리, 세비야는 민간 시장에 의하여 미술 시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대서양 무역에 참여해 부를 축적한 재력가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발전 혹은 과시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여러 미술 작품들을 의뢰하였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후원자인 교회 역시 지속적으로 미술가들에게 작업을 요청하였고요. 그렇게 도시 전체에서 미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세비야의 미술계 역시 상당한 호황을 맞게 됩니다.


단지 미술 시장의 규모만 커진 건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취향의 주문자/후원자들이 몰려듦에 따라 그들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재능 있는 미술가들 역시 몰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비야 미술계의 전반적인 quality 역시 높아졌습니다.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는 16세기 말, 세비야 미술계의 leader였습니다. 이론가로도 활동했던 파체코는 미술가는 타고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천부적 재능의 중요성은 인정하는데 후천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미술사학자 후안 미겔 세레라(Juan Miguel Serrera)는 미술가의 출신 지역이나 배경도 천재적 미술가의 탄생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벨라스케스를 그 예로 제시하는데, 벨라스케스는 당시 스페인의 미술 중심지인 세비야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어서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3. 벨라스케스 이야기

Velázquez, <Self-Portrait> (1640)


벨라스케스는 12살이었던 1611년 파체코의 제자로 들어갔고 1617년까지 6년 동안 파체코 밑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벨라스케스는 1618년부터는 독자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500년대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적극 수용한 스페인은 1600년경에는 강렬한 명암대비법을 활용해 리얼리즘(realism)을 추구하는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비야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카라바지오 화풍에 열광하였고, 종교화, 세속화 할 것 없이 카라바지오 style은 세비야 화가들의 작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였습니다. 벨라스케스 역시 마찬가지고요.


스크린샷 2025-04-25 오전 11.30.26.png Velázquez, <Old Woman Frying Eggs> (1618)

<계란을 부치는 노파 Old Woman Frying Eggs>(1618)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1620)는 1610년대에서 1620년대 초반에 완성된 벨라스케스의 주요 작품으로 꼽힙니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는 시장에서 계란 후라이 장사를 하는 늙은 여인과 소년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식사 장면이나 음주 등 서민층의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을 묘사한 스페인 풍속화를 “보데고네(bodegone)”라고 하는데요, <계란을 부치는 노파>는 벨라스케스의 “보데고네” 중 하나입니다. 주제 자체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노파 앞에 놓인 주전자나 접시, 칼 등의 정물들이 특별히 역동적으로 배치된 것도 아니고요. 이 작품은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는 어떻게 그렸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채 후라이 되는 계란, 빛이 반사된 팬의 표면, 그 밑에 기대어 놓여 있는 양은 냄비의 매끈한 표현, 실제 사람의 손을 보는 듯 한 노파의 손 등의 묘사는 오늘날로 치면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에 가깝습니다. 이 그림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기술적 완벽함을 갖춘 technician임을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전 11.33.07.png Velázquez, <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 (1620)


벨라스케스는 종교 단체로부터 종교적 주제의 작품들도 의뢰받아 제작하였는데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의 그리스도>는 <계란을 부치는 노파>가 완성된 2년 후에 그려졌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10장 40절에서 42절에 근거를 둡니다.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마르다가 혼자 집안일을 하는 상황을 묘사한 종교화이지만 벨라스케스는 그림에서 마르다가 혼자 집안일을 하는 부엌 장면을 정면에 배치합니다. 신약의 내용을 전혀 모르거나, 그림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이 그림이 그리스도의 일화는 다룬 종교화라는 걸 거의 알기 어렵습니다. 마르다의 못마땅한 표정, 그녀의 옆에서 마르다에게 한 소리를 하는 노파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 음식을 준비하려는 마르다의 앞에 놓인 네 마리 생선의 비늘 표현은 다시 한 번 벨라스케스가 얼마나 뛰어난 묘사력을 지닌 화가인지를 확인시켜줍니다. 이 그림이 흥미로운 건 그리스도의 행적을 다루지만 그리스도는 그림 뒤쪽에 작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종교적 내용은 그림의 뒤편에서 작게 표현되고 대신 일반 풍속을 전면에 배치하는 표현 전략은 이미 16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그림들에서도 등장합니다. 벨라스케스 역시 이러한 네덜란드 회화의 방식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의 그리스도>에 적용하였습니다. 벨라스케스가 활동하던 세비야에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Flandres) 사람들도 대거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네덜란드를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유래한 시각 방식을 자신의 작품에서의 reference로 활용할 수 있었던 건 벨라스케스가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서 유럽 전역에서 상인들이 모여든 세비야 태생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의 그리스도>처럼, 중요한 요소를 그림의 뒤편에 작게 표현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프라도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시녀들 Las Meninas>(1656-1657)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가 제작된 1618년은 벨라스케스 개인에게도 중요한 해인데요, 평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해입니다. 벨라스케스는 스승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고명딸인 후아나(Juana Pacheco, 1602-1660)와 혼인하여 세비야 미술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닌 파체코의 사위가 됩니다. 후아나와 결혼한 3년 후인 1621년 벨라스케스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1621년 펠리페4세(Felipe IV, 1605-1665)가 16세의 나이로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이 되었습니다. 아직 성년이 안 된 펠리페4세를 대신하여 올리바레스 백작(Conde de Olivares, 1587-1645)이 수상(Prime Minister)으로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세비야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은 왕실을 부흥시키는 전략으로 왕실의 미술 후원 사업을 확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올리바레스는 당시 세비야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명성을 듣게 됩니다. 파체코는 사위인 벨라스케스에게 궁정화가를 제안했고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벨라스케스에 대한 추천서를 써줍니다. 궁정화가가 된 벨라스케스는 1622년 아내 후아나와 함께 마드리드로 떠났습니다. 스페인의 또 다른 미술 중심지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미술 후원자인 왕실로부터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벨라스케스는 인생과 그의 career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천재성은 올리바레스 백작뿐만 아니라, 젊은 왕 펠리페4세와 이사벨 데 보르본(Isabel de Borbón, 1602-1644) 왕비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왕실에 소속된 화가, 오늘말로 하면 국가직 공무원으로, 세속화에서 종교적 주제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완성하며 수석 궁정화가의 지위까지 오릅니다. 결과적으로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 미술을 한 단계 upgrade 시켰습니다. 그러던 그는 1660년 61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지방 출신의 미술가가 중앙의 미술 중심지로 진출하여 어떻게 최고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당시 미술가가 화가로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명예도 얻을 수 있는 전형적인 방법을 제시하죠. 그가 만약 세비야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어땠을까요? 천부적 재능으로 아마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을 겁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화가가 궁정화가가 아니더라도 미술가로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 바르톨레메 에스테반 무리요입니다.


4. 무리요 이야기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1.51.51.png Murillo, <Self-Portrait> (1670-1672)

무리요는 1617년 태어나 벨라스케스보다 18살 어립니다. 무리요는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아버지의 14명의 자녀들 중 막내로 세비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무리요는 11살 때 고아원에 보내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인 아나(Ana)가 무리요를 거둬줬다고 하네요. 무리요는 후안 델 카스티요(Juan del Castillo, 1593-1657)로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델 카스디요는 세비야에서 태어나 세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파체코가 벨라스케스의 스승이자 장인이지만 미술가이자 미술 이론가로서 후대에도 잘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델 카스티요는 오늘날에는 무리요의 스승이라는 사실 때문에 회자되는 평범한 재능을 지닌 화가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무리요는 16살이 되던 해에 세비야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신대륙으로 떠났는지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 그의 나이 28살이었던 1645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직업 화가로서의 career를 시작하던 나이보다 무려 10살이나 많았던 걸 감안하면 그가 세비야를 떠나 신대륙으로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2.51.51.png Murillo, <Joseph and Potiphar’s Wife> (1645)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Joseph and Potiphar’s Wife>(1645)는 무리요의 가장 초기 작품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39장에 따르면,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Potiphar)의 집에서 노역을 하는데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얼굴을 보고 반해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지속된 유혹을 거부하였고 이에 모욕감을 느낀 그녀는 요셉이 자기를 범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무리요는 요셉이 보디발의 처(妻)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은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오라시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 등의 선배화가들도 묘사했는데, 이들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무리요의 작품은 손색이 없습니다. 베네치아(Venezia)에서 활동한 틴토레토의 그림에서 나체의 보디발의 아내는 침대에 길게 누워 요셉의 옷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틴토레토는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3-1510)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로 이어지는 베네치아 선배 미술가들이 개척한 세로로 길게 누운 여성 누드화의 방식을 적극 활용하여 구약의 한 장면을 매우 에로틱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젠틸레스키의 그림에서 보디발의 아내는 반나체로 등장하며, 귀도 레니의 작품에서 보디발의 아내는 옷을 갖춰 있은 채 등장합니다. 무리요의 그림 속 보디발의 아내는 그 중 젠틸레스키의 그림과 가장 가깝습니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와 귀도 레니의 그림보다 요셉의 모습이 훨씬 더 역동적입니다. 심지어 이 원치 않는 상황에서 요셉이 느끼는 불쾌감을 요셉의 얼굴 묘사에서 매우 잘 포착해냈습니다. 비록 깜짝 놀라는 듯 한 요셉의 두 팔의 위치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혹스러운 순간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젠틸레스키의 그림과 귀도 레니의 그림 속 보디발의 처가 다소 생기 없어 보인다면, 무리요의 그림에서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유혹에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요셉에게 모멸감을 느껴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남편에게 거짓 증언을 하는 이후 상황을 예고하듯, 불쾌함과 모멸감을 읽을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틴토레토의 그림처럼 노골적으로 에로티시즘을 강조하지 않는 적절한 수준에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무리요의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벨라스케스 못지않게 얼마나 뛰어난 묘사 능력을 지닌 화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종아리 및 팔뚝의 근육에 대한 묘사, 요셉의 분홍색 투니카(tunica)의 매끄러운 질감 표현, 보디발의 처가 앉아 있는 침대에 깔려 있는 담요와 바닥의 카페트의 세밀한 문양 묘사는 놀랍습니다. 게다가 침대 뒤편의 어두운 커튼을 배치하며 검은색 어둠으로 처리된 배경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의 밝은 피부를 제시하며 작위적이지 않게 각각을 대비시킵니다. 1610년대 말에서 1620년대 초, 벨라스케스의 세비야 시절 화풍이 1640년대의 세비야 미술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벨라스케스의 전통에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벨라스케스와 또 다른 무리요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4.20.37.png Murillo, <San Isidro> (1655)

미술가로서의 career를 시작하던 시점에 각자의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을 완성한 그 해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겪은 것도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공통점입니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가 완성된 그 해 벨라스케스가 후아나 파체코와 혼인했듯,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가 완성된 1645년 무리요는 베아트리스 데 빌라로보스(Beatriz de Villalobos, ?-1663)와 혼인합니다. 평생의 반려자를 맞이해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꾸리면서 벨라스케스의 career가 발전했듯, 무리요 역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1655년은 무리요가 출세가도에 오른 해입니다. 무리요는 세비야 대성당의 주문을 받아 세비야 출신의 두 가톨릭 성인인 성 이시드로(San Isidro, 560-636)와 성 레안드로(San Leandro, 534-601)에 관한 그림을 완성합니다. 완성작을 접한 성당 측은 1655년 무리요를 세비야 최고 화가로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세비야 최고 권위의 단체가 무리요의 재능을 인정하니 그는 성공할 일만 남았습니다. 1655년 스페인 미술계의 두 중심지인 마드리드는 56살의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는 38살의 무리요가 각 지역의 미술계를 대표하며 스페인 미술을 양분하였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평생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무리요는 세비야에서 머물다가 1682년 세비야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무리요는 1642년, 1645년, 1658년의 단 세 번 마드리드를 방문합니다. 1655년 세비야 최고 화가로 인정받은 이후인 1658년 41살의 무리요는 왕실이 소장한 티치아노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같은 대가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연습할 목적으로 마드리드에 1660년까지 장기 체류합니다. 일각에서는 이 기간 동안 그가 궁정화가가 되려는 시도를 했을 수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1658년이면 벨라스케스가 60세로서 생의 말년이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후배인 무리요를 질투해 그의 궁정화가 임명을 막았다는 정황은 없습니다. 게다가 1660년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에 무리요가 궁정화가에 도전했다면 세비야에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궁정화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궁정화가가 되는 대신, 고향 세비야로 돌아갑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5.06.09.png Murillo, <Portrait of Nicolás Omazur> (1670-1672)


이미 그는 세비야 최고 화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플랑드르 출신의 거상(巨商) 니콜라스 오마수르(Nicolás Omazur, 1630?-1698)는 무리요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무리요의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로 오마수르는 무리요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그는 단지 무리요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리요의 명성이 스페인 바깥으로 알려지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합니다. 유럽 전역의 부유한 상인계층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었던 오마수르는 세비야에서만 활동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무리요의 작품을 유럽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소개하였고, 그 결과 무리요를 평생 세비야에서만 작업했지만 국제적인 미술가가 되도록 도왔습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6.42.40.png Murillo,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7-1670)


후원자인 니콜라스 오마수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무리요가 1660년을 기점으로 그림 style을 완전히 바꿨다는 겁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서 보이는 명암대비법을 활용한 극적이지만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표현 방식은 1650년대 후반이 되면 다른 유럽에서는 이미 구시대적인 양식이 되었습니다. 강렬한 명암대비법만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티치아노나 루벤스,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등 보다 감각적이면서 유려한 붓질에 따뜻한 색감의 부드러운 표현 기법이 두드러진 화풍이 유행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무리요와 오마수르의 인연은 1657년경부터 시작된 걸로 확인됩니다. 무리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후원자를 자처한 오마수르는 무리요가 국제적인 commission을 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트랜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했을 겁니다. 이듬해인 1658년 마드리드를 방문한 목적도 궁정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미술 시장에서 경쟁력을 얻기 위해 기존의 화풍을 버리고 철저히 새로운 화풍을 익히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무리요는 1658년 마드리드 체류 기간 동안 특히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을 집중 연구한 것도 당시 유럽에서 새로운 트랜드가 이들의 화풍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6.23.31.png Murillo, <Jesus Christ the Good Shepherd> (1660)


1658년에서 1659년 사이 무리요가 새롭게 완성한 그림들은 거의 없습니다. 마드리드 방문 이후 무리요가 완성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660년의 <선한 목자인 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Good Shepherd>(1660)입니다. 들판을 배경으로 흰색 양과 함께 아기 예수가 등장합니다. 비록 전면과 후면 일부를 어둡게 처리하지만 이 그림은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를 그린 화가와 같은 화가가 그린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다릅니다. 명암대비법의 사용 여부만 차이 있는 게 아니라, 그림 스타일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붓의 표현 자체가 상당히 부드럽고 대상의 윤곽 역시 명확하게 구분되게 표현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상과 배경으로 넘어감으로서 오히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를 그린 무리요가 아니라 루벤스의 그림이라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가 마드리드 체류 기간 동안 얼마나 대단한 자기 혁신을 이루려고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있죠. 이렇게 일대 혁신을 이루며 국제 양식을 수용한 무리요는 유럽 전역의 미술 애호가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면서 고객층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키면서 말년까지 성공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04-25 오후 6.47.06.png Zurbaran, <The Martyrdom of St Serapion> (1628)


무리요의 새로운 화풍의 장착은 결과적으로 세비야 미술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기존의 세비야 화풍은 구시대적으로 보이게 되었고 세비야 화가들에게도 새로운 trend가 요구되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떠난 후, 세비야 미술계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과 대(大)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Francisco de Herrera the Elder, 1590-1656) 등이 주도하였습니다. 하지만 1660년을 기점으로 무리요가 불러온 새로운 trend에 따라 화풍을 변화시키지 못한 이들은 점차 일감이 줄어들었습니다. 수르바란은 일자리를 찾아 궁정화가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고요. 수르바란은 살아남기 위해 궁정화가가 되고자 했지만, 무리요는 니콜라스 오마수르라는 강력한 후원자의 지원 하에 폭넓은 개인 수요자들과 교회나 단체의 주문을 받으며 프리랜서로서 경제적인 성공과 유럽 전역의 미술 시장에서 궁정화가와는 다른 차원의 명예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굳이 궁정화가가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5. 마무리


미술가가 전체 career에서 완전히 style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벨라스케스와 무리요 모두 그 어려운 일을 성공해낸 인물입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에 임명된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러한 자기 혁신을 이루어냈다면, 무리요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40살 정도의 나이에 이러한 자기 변신을 꾀하였습니다. 20년이 넘게 자기에게 익숙했던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무리요가 벨라스케스보다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에 버금가는 미술가인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 무리요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기울인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인데요, 무리요는 1645년 career를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이들을 그렸습니다. 어린 아이들에 대한 그림은 무리요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발행한 아래의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방황은 어른의 책임이다!] : https://brunch.co.kr/@grandauphin/8


이번 글에서는 고위 국가직 공무원으로서의 벨라스케스와 고소득 프리랜서 자영업자로서의 무리요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았는데요, 이 둘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17세기 스페인 미술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대가들로 평가받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성공하였든 이 둘이 대단한 미술가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 분들은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삶 중 어떤 삶이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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