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후원자의 탄생)카를5세 vs. 프랑수아1세

2. 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심화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대립

by 수다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5세는 16세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본 시리즈는 카를5세의 미술 후원에 나서기 전, 그가 미술 후원에 관심을 쏟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시리즈를 평생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1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가 미술 후원자로서의 카를5의 행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주목합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프랑수아1세와 경쟁하다!

2. 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심화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대립

3. 프랑수아1세 문화 군주로서 우위에 서다: 루브르 궁 건설 프로젝트

4.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이상적 군주가 되기 위한 미술에서의 경쟁

5. 다 빈치에 버금가는 천재 미술가가 필요한 카를5세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라이벌 관계가 심화된 건 이탈리아 문제 때문입니다.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프랑스는 줄곧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교황들은 교묘하게 이용해 왔습니다. 교황청은 로마(Roma)에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 북부는 신성로마제국의 영지였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보다는 신성로마제국 황실과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습니다. 그에 따라 교황의 자리는 신성로마제국 혹은 그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차지해 왔습니다.


palais-des-papes211-2.jpg 프랑스 아비뇽(Avignon) 교황청


하지만 14세기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교황청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제195대 교황으로 프랑스인인 클레멘스5세(Clemens V, 1264-1314)가 즉위하자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이전합니다. 프랑스 영토 안으로 교황청이 이전하자 교황청은 프랑스의 영향권 하에서 프랑스와의 밀착된 관계를 형성합니다. 1309년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이 발생하기 전부터 교황의 자리가 프랑스인에게 돌아가자 그 후 제201대 그레고리우스11세(Gregorius XI, 1329-1371)에 이를 때까지 교황의 자리 역시 프랑스인 혹은 프랑스왕이 지지하는 인물이 차지합니다. 프랑스인임에도 교황청이 성 베드로(San Pietro)의 반석 위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당한 그레고리우스11세는 100년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1377년 1월 17일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이전합니다.


비록 교황청이 로마로 재천도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교회의 분열은 본격화 되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오면서 다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은 교황청은 제202대 과거처럼 이탈리아인인 우르바노6세(Urbanus VI, 1318-1389)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에 이탈리아 교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프랑스 인 혹은 프랑스 국왕의 지지를 받는 이른 바 대립교황(anti-Pope)들이 등장하며 "서방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분열은 니콜라우스5세(Nicolaus V, 1397-1455)가 제208대 교황이 될 때까지 약 80여년 간 지속됩니다. 이 시기에도 교황청은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로마에 항구적으로 정주함에 따라 교황청의 프랑스에 관한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서방 교회의 대분열로 교황청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짐에 따라 대립교황 문제를 해결한 니콜라우스5세의 15세기 중반부터 교황은 교황청의 권위를 회복하고 교황청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제212대 교황 식스투스4세(Sixtus IV, 1414-1484), 제216대 율리우스2세(Iulius II, 1443-1503), 제217대 레오10세(Leo X, 1475-1521), 제219대 클레멘스7세(Clemens VII, 1478-1534) 등은 이 시기 그러한 목표에 대단히 몰두했던 대표적인 교황들입니다. 이들은 자신과 교황청의 권위를 확대하고 교황청의 영토를 늘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가 오랫동안 대립 관계인 것을 이용하여 교황 자신과 교황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경우에 따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혹은 프랑스 국왕과 연합하여 상대방을 견제하곤 하였습니다.


스크린샷_2025-05-09_오전_11.57.13-removebg-preview.png del Piombo, <Portrait of Clemens VII> (1526)


카를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이후 1523년 11월 26일 교황의 자리에 오른 클레멘스7세 역시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였습니다. 카를5세가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왕으로서 유럽에게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함에 위협을 느낌에 따라 클레멘스7세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수아1세와 손을 잡고 신성로마제국 견제에 나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카를5세가 프랑수아1세를 꺾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됨에 따라 일단락 된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화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카를5세의 프랑수아1세에 대한 적개심은 카를5세가 황제가 된 이후인 1520년대 격화됩니다.


- 이야기는 3편으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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