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후원자의 탄생)카를5세 vs. 프랑수아1세

3. 프랑수아1세 문화 군주로서 우위에 서다: 루브르 궁 건설 프로젝트

by 수다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5세는 16세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본 시리즈는 카를5세의 미술 후원에 나서기 전, 그가 미술 후원에 관심을 쏟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시리즈를 평생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1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가 미술 후원자로서의 카를5의 행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주목합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프랑수아1세와 경쟁하다!

2. 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심화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대립

3. 프랑수아1세 문화 군주로서 우위에 서다: 루브르 궁 건설 프로젝트

4.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이상적 군주가 되기 위한 미술에서의 경쟁

5. 다 빈치에 버금가는 천재 미술가가 필요한 카를5세




카를5세 프랑수아1세는 미술 영역에서도 경쟁하였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진흥시키고 프랑스에 인본주의가 유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유로 프랑수아1세는 오늘날 프랑스 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꼽힙니다. 프랑수아1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자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파리(Paris)의 모습이 갖추어지는 초석을 닦은 왕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왕실은 샤를5세(Charles V, 1338-1380) 시대부터 파리 시내의 중세의 성채인 루브르 성을 왕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o1cxZWjvGK02VzEENWtit286yEdA5b9t7yjjv1YOAA1gMs30euySp87IdBJtEEXfvMc15_Qg5nD0sU4xrceb7mgoxCLOmKd_tEBkwGNrt2bs5ghqw8IuMrjgnviq5mKFKvMFuavkwwRiPwqMWWrfgA.jpg 중세 시대 루브르 성의 모습


프랑수아1세는 1527년 200여 년간 프랑스 왕실의 본거지로 사용된 루브르 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최신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왕궁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루브르 궁(Palais du Louvre) 프로젝트는 대를 이어 진행됩니다. 루브르 궁의 공사는 아들인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앙리2세를 지나 앙리2세의 아들이자 프랑수아1세의 손자 시대인 샤를9세(Charles XIV, 1550-1574) 시기, 앙리2세의 부인이자 샤를9세의 어머니이며 프랑수아1세에게는 며느리가 되는 카트린느 드 메디시(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 대비(大妃) 역시 루브르 궁전의 증축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 대비의 사위인 앙리4세(Henri IV, 1553-1610) 시대에 오늘날의 루브르 궁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대화랑(Grande Gallerie)으로 루브르 궁과 장모의 명령에 따라 건립된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을 연결하며 루브르 궁의 권역을 지금과 같이 확장하였기 때문이죠. 앙리4세 시대에 비로소 마무리 된 루브르 궁 프로젝트로 인하여 파리는 오늘날과 우리가 아는 파리의 모습에 가까워졌습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10.12.png Pourbus, <Portrait of Henri IV> (1610)


루브르 궁은, 1889년 3월 31일에펠탑(Tour Eiffel)이 건립되기 전,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과 함께 중세 시대에서 절대왕정 시기에 이르는 왕정 시대의 파리를 상징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 루브르 궁은 1793년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으로 국가 박물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근세(early modern) 시기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시작한 장본인이 프랑수아1세입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12.48.png Patel, <View of Château de Versailles> (1668)


오늘날의 관점에서 왕이 새로운 궁전을 짓는 건 전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을 보유한 프랑스에서 루브르 궁은 평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시대의 명령에 의하여 축조된 베르사유 궁전은 찬란하고 화려한 프랑스 문화와 루이14세 시대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의 압도적 규모, 화려함, 사치스러움이 국왕의 강력한 권력의 표상으로 여겨지지 새로운 궁전을 짓도록 명령한 것 자체를 국왕의 강력한 왕권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궁전 건설은 단순한 사업이 아닙니다. 궁전은 별장을 짓는 것과 차원이 다른 건설 사업입니다. 별장은 국왕이나 왕실 가족이 일시적으로 거처하는 건축물로서 여러 건축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 시설물인 궁전과는 규모에서도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궁은 일반적으로 여러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 별도의 건물동으로 별장이 들어갈 수는 있는 별장과 비교하면 보다 상위의 개념입니다. 게다가 궁전은 왕실 전체가 영구히 거주하기 위한 실생활의 목적뿐만 아니라, 국정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정치적 목적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궁전에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만 거주하는 게 아닙니다. 왕족들을 위한 하나 이상의 주거 공간이 필요하며 왕족들을 시종들기 위한 여러 인력들의 거주 공간까지 마련되어야 합니다. 군주의 집무 공간이기 때문에 국정이 결정, 집행되기 위한 공식적인 정무 공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왕국의 주요 부서들이 입주해야 하며 국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어야 하므로 그 규모는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용될 각종 집기나 도구들이 필요하며, 왕실이기 때문에 넉넉하게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조각, 공예, 회화 등의 궁전 내/외부의 미술 장식 사업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전 건립 사업은 간단한 사업이 아닌 대규모 국가 사업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재정 동원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하면 새로운 왕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는 것 그 자체가 군주가 그만한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거의 대부분 새로운 왕궁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왕실이 쌓아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왕궁 건립을 위해서는 추가 세수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납부하는 세금 이외에 추가 세금을 징수하려면 당연히 백성들로부터 큰 반발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왕궁 건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건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력해야만 가능합니다.


스크린샷 2025-06-29 오후 1.39.23.png Rigault, <Portrait of Louix XIV> (1701)


단지 강력한 왕권만 갖추었다고 새로운 궁전 건설 프로젝트를 감행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군주가 새로운 왕궁의 건설 필요성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루이14세는 프랑스에게 문화예술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준 국왕입니다. 루이14세 시대부터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이나 영국,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의 문화 헤게모니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합니다. 파리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30㎞ 떨어진 왕실의 사냥터가 있던 습지를 개간하여 압도적 규모의 왕궁을 건설하며 프랑스 사교계의 중심지를 일순간에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겨 왔기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은 흔히 루이14세의 절대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사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4세가 문화 및 예술로서 유럽의 다른 군주들을 완전히 압도하려는 의도도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건축은 공학의 영역이지만 당시에는 회화, 조각과 더불어 미술의 3대 장르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건축은 회화와 조각을 아우르는 종합미술로서 건축 총감독자가 회화와 조각 작업을 총 감독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새로운 종교 건물이 완공될 때 그 안에 종교적 주제의 각종 벽화나 조각, 회화로 장엄하는 게 이미 중세 시대부터 관례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세속적인 목적의 궁전 건물 역시 완공 시점에 맞추어 그 안을 장식할 벽화나 조각, 회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설계를 비롯하여 그 내외부를 장식하는 조각, 내부의 벽화와 유화 작품들, 심지어 정원 설계까지 모두 당시 프랑스 미술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 참여한 미술가들은 단지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활약했던 미술가가 아니라 루이14세 치하인 1648년 설립된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 de peinture et de sculpture)의 회원으로서 루이14세의 보호와 후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프로젝트는 프랑스의 문화 및 예술 역량의 총 결집이며 이들이 루이14세의 평소 후원을 받는 미술가들이라는 점에서 루이14세가 문화/예술의 후원자라는 걸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4세에게 후원 받는 프랑스 미술가들을 동원함으로서 자신의 문화/예술의 보호자, 후원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다른 유럽의 왕국들과 비교하여 문화/예술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루이14세와 프랑스의 우위를 보여주는 게 베르사유 궁전 건설의 참된 목적이었습니다.


1glaces6.jpg le Brun, <The Conquest of Franche-Comté> (1674)


루이14세의 이러한 노력으로 결국 문화 패권국으로서의 프랑스의 위상은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됩니다. 영국은 17세기 두 차례의 시민혁명으로 일치감치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며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기반으로 18세기 초반에는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시작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19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완료하며 유럽 및 전 세계 경제, 군사, 무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영국은 산업, 경제, 금융, 과학, 심지어 인구에서도 영국을 압도하였지만 문화예술, 패션에서만큼은 프랑스의 절대 우위였습니다. 19세기 초반부터 이미 영국에서도 뛰어난 미술가들이 등장하며 혁신적인 modern art 운동이 전개되지만 파리 화단에 진출하지 않고 자국에서만 머물면 그들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서 보편적인 인정받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프로이센(Preußen) 왕국으로 거듭난 독일이 급격한 산업화와 강력한 중앙집권화로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1870년에서 1871년 발생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대패하고 전쟁으로 고립된 파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쥐를 잡아 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지만 종전 후에 유럽의 문화 수도이자 미술의 본고장으로서의 파리의 명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종전 이후 빠르게 파리의 상황이 복구되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을 거쳐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발생 전까지 파리의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오늘날 문화/예술의 중심지는 미국의 뉴욕(New York)으로 이동하였지만 파리가 지닌 위상, 문화/예술, 패션, 미식의 나라라는 프랑스의 국가 이미지는 여전합니다. 프랑스와 파리의 이러한 위상이 시작된 건 프랑스가 유럽의 문화/예술의 헤게모니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려던 루이14세 시대부터입니다.


스크린샷 2025-07-01 오후 12.59.16.png Velázquez, <Equestrian Portrait of Felipe IV> (1634)


근대 이전 스페인 미술 연구의 대가인 조나단 브라운(Jonathan Brown, 1939-2022) 교수는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전 건립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건 그의 장인인 스페인의 펠리페4세(Felipe IV, 1605-1665)였다고 평가합니다. 펠리페4세는 1621년 3월 31일 16살의 나이로 아버지 펠리페3세(Felpe III, 1578-1621)의 뒤를 이어 스페인의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16살로서 펠리페4세가 홀로 국정을 운영하기 어렵다고 여겨져 펠리페4세의 후견으로 올리바레스 백작-공작(Conde-Duque de Olivares, 1587-1645)이 오랫동안 국정을 대신하였습니다. 올리바레스는 스페인이 과거 카를5세와 그의 아들인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시대 때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며 펠리페4세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유럽의 패권 국가인 스페인의 국격에 맞는 왕궁이 필요하다고 펠리페4세를 설득하여 마드리드 외곽 왕실 사냥터인 부엔 레티로(Buen Retiro)에 새 왕궁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24.57.png Leonardo, <View of Buen Retiro Palace> (1637)


이렇게 부엔 레티로 궁전(Palacio del Buen Retiro) 건립 사업이 1630년부터 시작되어 1637년 완료됩니다. 부엔 레티로 궁전 이전에 왕실이 주도한 대규모 건축 사업의 사례는 있었지만 왕궁의 완전히 세속저인 목적으로 추진된 국책 사업은 스페인 역사에서 부엔 레티로 궁전이 최초였습니다. 대화랑 공사로 튈르리 궁전과 이어져 루브르 궁전의 규모는 앙리4세 시대 때 크게 확장되었지만, 부엔 레티로는 프랑스 왕실의 정궁(正宮)인 루브르 궁전의 규모와 화려함을 압도하고자 하였고 결국 최종 완공된 부엔 레티로 궁전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습니다. 부엔 레티로 궁전 역시 스페인 미술가들에 의하여 설계 되었고 그 안의 대화랑(Gran Galería)는 펠리페4세의 궁정화가인 스페인 미술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최신 작품들로 장식되었습니다. 부엔 레티로 궁전을 통하여 펠리페4세는 스페인이 여전히 건재하며 문화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27.22.png Velázquez, <Portrait of Infanta Maria-Teresa> (1652-1653)


이렇게 궁정 건립 프로젝트를 통하여 유럽의 문화 헤게모니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을 보여준 펠리페4세의 여섯 번째 딸인 마리아-테레사(Maria-Teresa, 1638-1683) 공주와 혼인하며 펠리페4세의 정식 사위가 된 루이14세는 장인의 행보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같은 목적을 지닌 루이14세는 장인의 작품을 뛰어넘고 싶어했고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하여 기존 부엔 레티로 궁전이 가지고 있었던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장엄한 궁전이라는 타이틀을 뺏어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장인인 펠리페4세가 부엔 레티로 궁전을 완공시킴으로서 문화/예술의 후원자라는 군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도 그러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30.27.png Clouet, <Portrati of Fraçois I> (1525-1530)


이처럼 루이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인류 문화유산을 만드는 데에는 부엔 레티로 궁전이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지만 국왕이 국력을 총 동원하여 왕실을 위한 궁정을 건립하는 대대적인 국가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건이전 세기 프랑스에서 프랑수아1세가 그러한 선례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루이14세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준 건 장인인 스페인의 펠리페4세이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적극 이식하며 이미 당시에도 이상적인 문화 군주로 평가받는 프랑수아1세의 루브르 궁전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감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베르사유 궁전이 완공되어 베르사유로 왕실을 완전히 이전하기 전까지 루이14세는 프랑수아1세가 초석을 닦은 루브르 궁전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죠. 프랑수아1세의 루브르 궁전 건설은 당시로서는 선례가 없었던 사업으로서 자신의 권력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문화/예술 후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업입니다.


- 이야기는 4편으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매거진의 이전글#08-2(후원자의 탄생)카를5세 vs. 프랑수아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