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후원자의 탄생)카를5세 vs. 프랑수아1세

4.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이상적 군주가 되기 위한 미술에서의 경쟁

by 수다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5세는 16세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본 시리즈는 카를5세의 미술 후원에 나서기 전, 그가 미술 후원에 관심을 쏟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시리즈를 평생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1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가 미술 후원자로서의 카를5의 행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주목합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프랑수아1세와 경쟁하다!

2. 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심화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대립

3. 프랑수아1세 문화 군주로서 우위에 서다: 루브르 궁 건설 프로젝트

4.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이상적 군주가 되기 위한 미술에서의 경쟁

5. 다 빈치에 버금가는 천재 미술가가 필요한 카를5세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베스트셀러를 꼽으라면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 Il Principe』(1532)일 겁니다. 마키아벨리 사후 출간된 『군주론』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하고 냉혹한 군주의 표상을 제시하면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라는 용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세속적인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인류 최고의 지적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군주론』은 당시의 군주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리더(leader)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가르침을 전달하며 무려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저서이지만 『군주론』은 당시에는 금서 목록에 올라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당대를 상징하는 스테디셀러로서의 위상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0000054158_OG.JPG Raffaello, <Portrait of Baldassarre Castiglione> (1514-1515)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 왕족과 귀족의 지배계층 사이에서의 필독서는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re Castiglione, 1478-1529)의 『궁정인 Il Cortegiano』(1528)입니다. 1528년 발간된 『궁정인』은 발간 즉시 유럽의 궁정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미 16세기가 되면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스스로 르네상스 시대라고 지칭한 적은 없지만 조상들의 살던 시대와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천 년 동안의 기존의 가치들이 이제는 낡은 가치로 전락하였고 새로운 시대에 따라 새로운 시대정신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백작의 귀족 계층이었던 카스틸리오네는 궁정 사회를 형성하는 왕족과 귀족이 중세 시대의 왕족과 귀족들과는 다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중세 시대의 왕족과 귀족들은 전장을 누비는 전사(warrior) 혹은 기사(knight)로서 용맹함과 전투 능력이 중요하게 요구되었습니다. 군주는 군인으로서의 덕목이 우선이었지 문화적 소양은 군주의 필수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시대의 유럽 군주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항구적인 수도 개념은 중세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군주는 말을 타고 칼을 든 채 싸워야 하는 전사로서 전장을 누벼야 했기 때문에 군주는 전장을 따라 이곳 저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사냥을 위한 별도의 별장이나 성에서 잠시 머물거나 그도 없다면 수도원에서 머물렀습니다. 군주를 따라 왕실 가족들도 이동해 다녔습니다. 이렇게 부유하던 유럽의 왕실 가운데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비교적 일찍부터 특정 지역에 정주하였습니다. 프랑스는 파리를, 잉글랜드는 런던에 정착한 후 거의 이동하지 않았고 왕실에 한 도시에 머물다 보니 궁전이 필요하였고 군주와 왕실 가족을 중심으로 궁정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중세 초/중기 빈번하게 발생하던 전투는 중세 말에 가면 발생 빈도가 줄어들었고 군주가 궁정에 머물자 군주를 보필하는 고위 귀족들과 하급 귀족들 역시 궁정에 머물고 자연스럽게 군주를 주축으로 궁정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왕과 귀족들이 전장을 누비지 않고 한 곳에 정주함으로서 왕과 귀족은 관료화(bureaucratization) 되어갔습니다. 왕족과 귀족에게 여전히 검술, 활쏘기 등의 전술 능력은 중요한 능력으로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갈고 닦아야 할 능력이었지만 관료화 되어가던 시점에는 검술, 활쏘기, 말타기 등은 이제 왕족 및 귀족 남성들의 취미 활동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다 보니 왕족과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덕목이 요구되었습니다. 인문적 소양과 문화적 교양이었습니다. 궁정 사회를 이루는 궁정인(cortegiano)들은 기본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여야 하며, 시를 지을 줄 알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미술·음악·문학 등에 관한 조예도 깊어야 했습니다. 15세기 말, 16세기가 되면 궁정은 세련된 교양인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축소판이며 군주는 세련된 덕목을 갖춘 새로운 시대의 교양인들이 활약할 수 있는 궁정사회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릅니다.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인』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의 궁정사회, 그 궁정사회를 구성하는 왕족 및 귀족들이 어떠한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스크린샷 2025-08-31 오후 4.38.17.png Clouet, <Potrait of Henri II> (1559)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은 1528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그의 글은 이미 정식 출판본이 아닌 상태로 유럽의 궁정사회에서 폭넓게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글이 정식 출판되기 전에도 이미 유럽의 많은 왕족 및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질 수 있었던 건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이 한 몫했지만 그가 유럽의 주요 궁정사회에서 활약한 외교관이었던 점도 큰 역할을 합니다. 그는 교황청, 만토바(Mantova)를 비롯한 이탈리아 주요 궁정, 스페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에도 활약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높은 명성으로 인하여 그의 『궁정인』은 유럽의 많은 궁정에서 읽히며 공감을 얻어 그의 글에 영감을 받지 않은 당대의 군주는 거의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문화 현상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프랑수아1세는 비록 카스틸리오네와 직접적인 친분은 적었지만 카스틸리오네가 프랑스 궁정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프랑수아1세 주변의 많은 궁정인들이 카스틸리오네의 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카스틸리오네의 글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새로운 시대의 군주에게 걸맞는 의무와 역할에 대한 카스틸리오네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후대의 학자들은 프랑수아1세를 최초의 르네상스 군주로 평가합니다. 이 르네상스 군주는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에서 제시된 군주입니다. 그가 카스틸리오네와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친분이 있던 없던 혹은 그가 카스틸리오네의 글을 직접적으로 읽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와 상관없이 프랑수아1세가의 삶은 『궁정인』에서 제시된 새 시대의 이상적인 군주의 이미지와 거의 일치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스크린샷 2025-06-29 오후 1.42.32.png Tiziano, <Federico Gonzaga with His Dog> (1529)


오히려 카스틸리오네와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은 카를5세입니다. 만토바의 궁정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당시 만토바 공작인 페데리코 곤차가(Federico Gonzaga, 1500-1540)와도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페데리코 곤차가는 1519년부터 만토바를 통치한 공작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인 프란체스코 곤차가(Francesco Gonzaga, 1466-1519) 시기까지 곤차가 가문은 만토바를 통치하는 후작(marquis) 가문이었으며 만토바는 후작령이었습니다. 하지만 1530년 페데리코 곤차가는 공작에 봉해졌고 그의 가문은 공작 집안이, 그가 다스리는 만토바는 공작령이 되었습니다. 페데리코 곤차가를 공작에 봉한 건 다름 아닌 카를5세였습니다. 만토바는 곤차가 가문이 통치하는 후작령이지만 지역의 통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은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만토바 후작의 자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하여 임명되었으며 페데리코 곤차가는 1523년 4월 7일 정식으로 만토바 후작에 임명됩니다. 그를 만토바 후작에 정식 임명한 인물이 다름아닌 황제 카를5세였습니다. 카를5세와 페데리코 곤차가의 관계는 그만큼 매우 밀접했습니다. 그런 페데리코 곤차가의 만토바 궁정에서 카스틸오네는 곤차가 가문의 신뢰를 얻으며 외교관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곤차가 가문이 신성로마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카를5세와 카스틸리오네와의 관계 역시 가까워질만한 충분한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실제로 카스틸리오네는 생의 말년인 1524년부터 1528년까지 카를5세의 궁정에서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궁정인』의 저자였던 카스틸리오네가 20대 중반의 카를5세에게 세련된 취향에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는 새로운 시대의 군주의 덕목에 관하여 황제에게 간언하지 않았다는 게 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카를5세가 직접적으로 『궁정인』을 읽지 않더라도 저자인 카스틸리오네로부터 관련된 내용을 여러 차례 들었을 거고 그 때마다 새 시대의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 이야기는 5편으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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