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K-미술의 원조, 기산 김준근

전통놀이 그림으로 전 세계를 사로 잡은 최초의 K-미술가

by 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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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의 민화

헌트릭스(Huntrix)의 <Golden>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K-Pop Demon Hunters》(2025)의 전 세계적 열풍의 핵심입니다. 헌트릭스가 <Golden>을 부르는 장면에서 무대 뒤 홀로그램에는 가운데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의 좌우로 해와 달이 떠 있는 이미지가 비칩니다. 영화 최고의 신스틸러로 인정받은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 역시 《케데헌》 열풍의 주역입니다. <Golden> 무대 장면에서의 해와 달 그림, 더피와 서씨가 각각 조선시대 민화(民畵)의 주요 주제인 《일월오봉도 日月五峰圖》와 《호작도 蒿雀圖》, 즉 《까치호랑이》에서 모티프를 따온 게 알려지면서 《케데헌》에 대해 열광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한국의 전통 민화로까지 넓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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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케데헌》이 공개되지 전부터 외국인들 사이에서 민화의 인기는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2025년 1월 4일 『외교저널』의 기사에 의하면, 민화는 미술 시장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전통 방식 그대로 혹은 현대적인 미감에 걸맞게 재해석하며 민화는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케데헌》에 숨어 있는 한국 전통 미술에 관한 관심, 미술 시장에서 민화에 관한 수요 증가 현상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게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줍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1900년대 초, 이미 한국적인 소재와 표현 기법으로 K-미술의 저력을 보여줘 외국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은 미술가가 있습니다. 미스테리한 미술가로 알려져 있는 기산 김준근(?-?)이 그 주인공입니다.


2. 미스테리 화가, 김준근

김준근은 출생지뿐만 아니라, 정확한 생몰연대도 알려지지 않은 미스테리 그 자체의 인물입니다. 김준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부산, 인천, 원산 등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을 이동하며 활동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로 원산에서 활동했지만 작품에서 평안도 방언이 자주 등장하는 사실로 보아 평안도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김준근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서양인 수집가들의 작품 수집 시기 및 기증 연도 등을 토대로 그의 활동 시기 및 양상을 추측해내고 있습니다.


H22799-L367750120-removebg-preview.png 컬린, 『한국의 놀이』(1895)


김준근의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서양인들의 책에서 꾸준히 삽화로 등장하였습니다. 미국의 고고학자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 1858-1929)은 1895년 『한국의 놀이: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1895)를 출간합니다. 컬린은 서문에서 조선의 전통놀이 그림은 1886년 미 해군 장성인 로버트 W.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2-1895)의 딸인 메리(Mary)의 주문에 의해 부산 초량에 사는 기산이라는 화가가 그렸다고 밝힙니다. 기산(箕山)은 김준근의 호(號)입니다. 슈펠트 장군은 1886년에서 1887년 봄까지 부산에 머물렀습니다. 김준근의 그림은 1887년 2월 슈펠터 가족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나가사키(長崎)로 보내졌고 1983년 미국 워싱턴 D.C(Washington D.C.)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으로 최종 이관됩니다.


스크린샷 2025-10-03 오전 11.12.31.png 김준근, <널뛰는 모양>, 『한국의 놀이』 by 컬린


그 중 22점의 풍속도가 컬린의 『한국의 놀이』의 삽화로서 등장합니다. 무등타기, 연날리기, 줄타기, 팽이치기, 널뛰기, 그네타기, 제기차기, 눈가리고 술래잡기, 공기놀이, 주사위놀이, 장기, 바둑, 투전놀이 등을 묘사한 김준근의 그림이 컬린의 자세한 설명과 곁들여져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10-03 오전 11.16.02.png 김준근, <제기차는 아이>, 『한국의 놀이』 by 컬린


그 후 동독(현 독일)의 한국학 연구자인 하인리히 융커(Heinrich Junker, 1889-1970)가 1958년 『箕山, 한국의 옛 그림 箕山, Alte Koreanische Bilder』(1958)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김준근의 그림들을 소개한 책으로 융커는 수록된 그림들이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1901)가 소장했던 그림이었다고 밝힙니다. 독일인 폰 묄렌도르프는 1882년에서 1885년 사이 조선 왕실의 정치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이 기간 동안 고종(高宗, 1852-1919)으로부터 김준근의 그림을 하사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에드워드 마이어(Edward Meyer, 1841-1926)를 통해서도 기산의 그림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이어는 1886년 주독한국총영사에 임명되기 전, 폰 묄렌도르프와 같은 시기에 조선에 머물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마이어는 1883년 인천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개설한 사업가로서 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폰 묄렌도르프가 김준근의 그림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폰 묄렌도르프가 수집한 그림들 중 풍속화 27점을 비롯하여, 산수화 및 인물화 16점을 포함한 총 43점의 김준근의 그림이 『箕山, 한국의 옛 그림』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30536826664_3-removebg-preview.png 융커, 『箕山, 한국의 옛 그림 箕山, Alte Koreanische Bilder』(1958)


1894년 영국에서는 윌리엄 R. 칼스(William R. Carles, 1848-1929)가 『조선풍물지 Life in Corea』(1894)를 발표합니다. 칼스는 1884년 3월부터 1885년 6월 사이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를 역임한 후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풍물지』를 집필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된 약 30점의 그림은 김준근의 그림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원산에서 활동한 미술가로만 밝혀져 있지만 그림 스타일이 전형적인 김준근의 그림과 일치하기 때문이죠.


UnjinMiruk.jpg 『조선풍물지』 (1894) 속 삽화


『한국의 놀이』, 『箕山, 한국의 옛 그림』, 『조선풍물지』 등을 토대로 김준근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로 그는 늦어도 1862년경에 출생했을 겁니다.


3. 전 세계에 보관되어 있는 김준근의 그림들


기산풍속화첩_PS0100100102400369400000_30.jpg 김준근, <단오추천> , 『기산풍속도첩』


『기산풍속도첩 箕山風俗圖帖』(1894년 이전)은 김준군의 그림 모음집으로 그의 풍속도 98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에드워드 마이어가 1894년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현 Museum am Rothenbaum)에 『기산풍속도첩』을 전시한 걸로 보아, 1894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산풍속도첩』은 김준근을 비롯한 2인 이상이 판화로 빠르게 대량으로 제작하여 현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10여개 국가의 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김준근은 『기산풍속도첩』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서양 소설인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텬로력뎡 天路歷程』(1678)에 삽화가로도 참여하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참여한 『기산풍속도첩』, 『텬로력뎡』 뿐만 아니라, 『한국의 놀이』, 『箕山, 한국의 옛 그림』, 『조선풍물지』처럼 서양인들이 그의 그림을 삽화로 사용한 사례, 그리고 판화가 아닌 원화까지 모두 합하면 김준근의 그림은 미국, 캐나다,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 미술관 및 도서관에 약 1,500점이 소장되어 있는 걸로 파악됩니다.


스크린샷 2025-10-03 오후 12.56.51.png 김준근, <독점> (1891-1894)


특히 독일에 김준근의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에드워드 마이어 덕분입니다. 그는 1891년에서 1894년 사이에 김준근이 제작한 그림의 원화로만 총 61점을 소장할 정도로 김준근 그림을 열심히 수집하였습니다. 그렇게 수집된 마이어의 그림들은 함부르크의 민속박물관, 현 토속박물관(Museum am Rothenbaum)으로 이첩되었습니다. 에드워드 마이어와 같은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늘날 독일 및 서양의 여러 박물관, 미술관 및 도서관에 김준근의 다수의 그림이 보존되어 있게 된 겁니다.


기산풍속화첩_PS0100100102400369400000_2.jpg 김준근, <석도무요>, 『기산풍속도첩』


4. 호기심에서 진심어린 애정으로

서양인들이 김준근의 그림에 호기심을 느낀 건 그의 그림에서 조선의 독특한 풍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항 시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조선을 방문한 기념으로 조선의 풍속이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미술가들에게 요청하여 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김준근은 이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다는 걸 인식하고 그들의 수요를 최대한 빠르게 충족시키기 위하여 전통놀이가 포함된 풍속을 주제로 한 원화를 그린 후, 판화로 인쇄하여 『기산풍속도첩』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김준근은 풍속도 이외에도 훌륭한 수묵 산수화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해외에 소장되어 있는 김준근의 그림이 『기산풍속도첩』과 같이 김준근의 풍속화라는 사실은 서양인들에게는 평상시 혹은 설날, 단오, 추석과 같은 한민족 최대 명절 때 조선 사람들이 어떠한 놀이를 하고 어떠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더욱 흥미를 느꼈음을 뜻합니다.


기산풍속화첩_PS0100100102400369400000_1.jpg 김준근, <고촌춘경>, 『기산풍속도첩』


그 이끌림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을 수도, 그 근원은 상대의 문화가 저급하고 야만적이라는 우월 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호기심만으로는 김준근의 그림을 열정적으로 수집한 에드워드 마이어와 같은 수집가의 collecting 활동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 우월감에서 기반을 둔 호기심에서 시작했겠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 사람이 그토록 많은 작품을 수집하는 것도, 많은 외국인 방문자들에 의해 기산의 그림이 전 세계에 그토록 많이 남아 있는 현재의 상황도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5. K-Culture의 뿌리, 전통놀이

《오징어게임》 시즌1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 외국인들은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 열광했습니다. 시즌2가 공개된 직후 해외에서 <한국 전통놀이 챌린지>가 또 다시 유행하였습니다. 전통놀이가 전혀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한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지난 20년 사이, 유교에서 비롯된 설날과 추석의 의미는 희미해졌고 윷놀이, 연날리기, 그네타기, 널뛰기 같은 명절 문화는 못 살던 시절의 ‘구닥다리 문화’로 치부되며 이제 한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20년대 K-Culture가 세계를 사로잡은 배경에는 이 전통문화가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징어게임》에서는 전통놀이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는 한복, 갓, 한옥, 민화가, K-POP에서는 한국적인 요소가 등장할 때마다 더 뜨거운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100년 전, 기산 김준근은 이미 우리의 문화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전통이 사라졌지만 그의 풍속도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놀이와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2025년 현재, 전 세계가 한국의 전통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이때, 긴 연휴 동안 우리도 선조들처럼 전통놀이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하며 현대적인 나라로 평가받는 한국의 국민들이 여전히 추석에 전통 문화를 즐긴다는 사실에 외국인들은 더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스크린샷 2025-10-03 오전 11.06.51.png 김준근, <팽이치기>, 『한국의 놀이』 by 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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