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레 비어든의 <서머타임 Summer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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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은 재즈의 계절
10월은 한국에서 가을의 절정이자 축제/페스티벌 최대 성수기입니다. 경기도 가평군 자라섬 일대에서 개최되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은 20년이 넘는 역사 동안 국내 대표 축제이자 국제적인 명성의 재즈 이벤트로 확실한 명성을 쌓았습니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덕분에 한국에서 재즈의 저변이 상당히 확대되었죠. 재즈는 1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닌 대중음악의 클래식으로 오늘날에는 어렵고 고상한 음악으로 여겨지지만 1950년대까지 대중음악의 상징으로서 미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특히 로마레 비어든(Romare Bearden, 1911-1988)의 미술에 재즈는 핵심입니다.
2. 로마레 비어든의 <서머타임>
미국 미주리(Missouri)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의 세인트루이스미술관(Saint Louis Art Museum)에는 로마레 비어든의 대표작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 하이힐을 신고 귀걸이를 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고, 그 옆에 중절모를 쓴 남성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건물 앞에 있는데요, 화면 오른쪽에 건물로 들어가는 계단의 일부가 보입니다. 2층 높이에는 작은 발코니(balcony)가 있는 커튼이 쳐진 창문 사이로 여인이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의 창문으로는 남성이 보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서머타임 Summertime>(1967)입니다. 1999년 뉴욕시(New York City)의 마이클 로젠펠트 갤러리(Michael Rosenfeld Gallery)로부터 구입한 후 <서머타임>은 세인트루이스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푸른색과 초록색이 조화를 이룬 청량한 느낌의 반팔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건물의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아이스크림콘을 먹고 있는 평범한 이미지입니다.
서머타임(summertime)은 여름 한철을 뜻하는 보통 명사지만 특정 제도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서머타임은 동절기보다 하절기에 해가 더 긴 특성을 이용해 3월 둘째 주부터 11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표준시간을 1시간 앞당기는 제도입니다. 한국에서는 1988년 완전히 폐기되었지만, 미국에서는 1918년 시행 이후 여전히 적용 중입니다.
3. 조지 거쉰의 《포기와 베스》
세인트루이스미술관은 홈페이지를 통해 로마레 비어든의 <서머타임> 속 여인이 들고 있는 건 핸드마이크로도 보이며, 이미지의 전체 인상 역시 흑인 여가수가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광경으로도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아이스크림콘을 마이크로 보면 의자에 앉아 있는 중절모를 쓴 남성은 여가수의 노래에 반주하는 음악가이고, 건물 안의 여성과 남성은 창문 틈을 통해 거리 공연을 감상하는 청중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 <서머타임>은 건물 앞에서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 잠시 창밖을 내다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재현한 이미지로,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들과 건물 안에서 이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로도 인식될 수 있습니다.
서머타임은 그 자체가 재즈의 아이콘입니다.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쉰(George Gershwin, 1898-1937)은 미국의 특성을 반영한 미국적인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영어 가사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작곡을 계획합니다. 거쉰은 헤이워드 부부(DuBose Heyward, 1885-1940; Dorothy Heyward, 1890-1961)가 미국 흑인들의 삶을 다룬 소설 《포기 Porgy》(1925)를 원작으로 선택합니다. 그가 영어 오페라의 대본으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이야기 한 《포기》를 선택한 건 필연입니다. 거쉰은 1920년대 고전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1924)와 《파리의 미국인 American in Paris》(1928)을 발표하며 미국적인 modern한 클래식 음악의 개척자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오페라까지 적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재즈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서 유래된 음악이기 때문에 미국의 언어인 영어로 된 가사, 미국에 사는 흑인이 주인공인 각본은 자신의 실험을 완성하는 데 필수였습니다. 거쉰은 400년의 역사 동안 엄격한 전통과 미학을 정립한 오페라의 기존 문법에 즉흥성과 뮤지션의 자의적인 해석의 허용과 같은 재즈의 주요 특징들을 적용하여,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1935)를 완성합니다. 정통 오페라들과 비교하면 곡의 진행이 상당히 자유로운 특징을 지닌 《포기와 베스》는 초연 후 호평을 받았고, 오늘날에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4. <서머타임>: 클래식에서 재즈로, 그리고 미술로
《포기와 베스》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받는 건 아름다운 아리아(aria)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서곡 후 극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제이크(Jake)의 아내인 클라라(Clara)가 아이를 들고 등장합니다. 이때 클라라가 자장가로 부르는 아리아가 <서머타임 Summertime>입니다. 재즈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의 특성상 성악가들뿐만 아니라, 재즈 뮤지션들 역시 끊임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머타임>을 커버(cover)해 왔습니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 1917-1996), 사라 본(Sarah Vaughan, 1924-1990)과 같은 전설적인 여성 재즈보컬리스트들뿐만 아니라,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1899-1974), 찰리 파커(Charlie Parker, 1920-1955),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 등의 뮤지션들은 연주곡 버전으로도 조지 거쉰의 명곡을 재해석 했습니다. 올해로 발표 된지 90년이 되었지만 <서머타임>은 재즈의 고전으로서 현 시대 재즈 뮤지션들에게도 여전히 사랑 받고 있습니다. <서머타임>은 클래식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오페라 속 유명 아리아일 뿐만 아니라, 재즈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입니다.
세인트루이스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로마레 비어든의 1967년 작품이 <서머타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도, 단순히 계절의 풍경을 재현하려는 것을 넘어 조지 거쉰의 명곡 <서머타임>을 연상시키려는 중의적인 장치로서 재즈가 자신의 예술 세계에 얼마나 큰 원동력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서머타임> 이후: 재즈에 관한 본격적인 탐구
1960년대부터 <지나가는 여객 열차를 바라보며 Watching The Good Trains Go By>(1964)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며 로마레 비어든은 흑인들의 일상을 자신의 예술에 적극 표현합니다. 그는 1967년부터 음악을 주요 소재로 등장시키기 시작합니다. <서머타임>에서는 비유적, 중의적으로 음악을 활용하였지만, 같은 해에 완성된 <세 명의 포크뮤지션 Three Folk Musicians>(1967)에서는 음악을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작품에서는 통기타와 함께 아프리카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는 세 명의 흑인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흑인의 정체성과 음악과의 연관성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1970년대에 그는 재즈 뮤지션들, 혹은 재즈 공연 장면으로 재즈라는 주제에 집중합니다. 재즈의 고향인 루이지에나(Louisiana)주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뉴올리언스미술관(New Orleans Museum of Art)의 <재즈, 캔자스시티 Jazz, Kansas City>(1977)는 피아노, 색소폰, 기타 연주자들의 잼세션(Jam Session)이 묘사되었습니다. 그 후 비어든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재즈 혹은 재즈뮤지션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합니다.
6. 비어든에 관한 오마쥬: 《Romare Bearden Revealed》
재즈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로마레 비어든의 미술은 후에는 재즈 뮤지션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재즈 색소폰 뮤지션(saxonphonist)인 브랜포드 마살리스(Branford Marsalis, 1960-)는 자신이 결성한 브랜포드 마살리스 쿼텟(Brandford Marsalis Quartet)의 2003년 새 앨범으로 《Romare Bearden Revealed》를 발표합니다.
이 앨범은 로마레 비어든에 관한 오마쥬(hommage) 앨범으로서 그가 유·소년기를 보낸 재즈의 황금시기인 1920년대의 뉴올리언스 재즈와 193-40년대의 스윙(Swing) 재즈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Romare Bearden Revealed》는 로마레 비어든 재단(Romare Bearden Foundation)과 collaboration한 앨범답게 부클릿(booklet)에는 비어든의 주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로마레 비어든의 미술이 생소한 재즈 팬들에게 비어든의 미술 작품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재즈의 황금시기에 작곡된 음악들 및 그 시대 스타일의 신곡들과 재즈를 주제로 한 비어든의 그림들이 수록된 부클릿으로 비어든에 관한 존경심을 드러낸(revealed) 《Romare Bearden Revealed》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서머타임>으로 조지 거쉰은 재즈와 클래식을 연결했다면, 로마레 비어든은 <서머타임>으로 재즈와 미술을 이었습니다. 이번 세기의 또 어떤 <서머타임>이 재즈가 다른 예술과 만나는 길을 열어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