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지노의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의 문화적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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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스승을 넘어 거장으로: https://youtu.be/mUvf_cspU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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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루지노의 제자가 된 산티의 아들
르네상스 4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20살에 완성한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Sposalizio>(1504)에는 청출어람(靑出於藍) 그 자체인 라파엘로와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이 남긴 문화적 유산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UNESCO)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이탈리아 중부의 우르비노(Urbino)는 15세기에 몬테펠트로(Montefeltro) 가문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용병 대장 출신인 페데리코 몬테펠트로(Federico Montefeltro, 1422-1482)는 우르비노 궁정을 이탈리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육성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 궁정에서 지오반니 산티(Giovanni Santi, 1435-1492)는 궁정 미술가로서 활동했습니다. 산티는 1483년 48살의 나이로 유일한 자식을 얻게 됩니다. 산티는 자신의 아들이 화가가 되어 우르비노 궁정화가 지위를 잇기를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잇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지위가 아들에게 승계되는 게 일반적이었죠. 산티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틈틈이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고작 11살이 된 1494년 59세의 나이로 산티는 사망합니다. 산티의 아들은 화가가 되어 아버지의 작업실과 우르비노 궁정화가 자리를 물려받기로 결심하지만 아들은 정식 교육을 이수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일정 기간 동안 직업 미술가 밑에서 도제(徒弟)식으로 교육을 받은 후 장인(master)의 자격을 얻고 조합(guild)에 가입해야만 미술가의 지위를 인정받아 직업 미술가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산티의 아들은 아버지가 당대 최고의 천재로 인정한 “페루자(Perugia)의 피에트로라는 이름의 남자”(Pietro Perugino)를 떠올립니다. 그렇게 산티의 아들은 고향을 떠나 페루자로 향하였고 50대 중반의 페루지노, 즉 피에트로 바눈치(Pietro Vannuchi)를 찾아갑니다.
페루지노는 소년이 지오반니 산티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던 산티의 아들은 페루지노의 가르침을 잘 따라 왔습니다. 페루지노는 이내 산티의 아들이 자신을 능가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음을 알아챕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조기 교육, 타고난 재능에,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더해져 소년은 1500년 불과 17살에 마스터 자격을 얻습니다. 보통은 20대 초반에 장인의 자격을 획득하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놀라운 결과입니다.
2. 라파엘로의 걸작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페루지노는 피렌체(Firenze)에서 장인의 자격을 얻은 후 바로 페루자로 돌아갔지만, 산티의 아들은 21살이 되는 1504년까지 4년 동안 페루자에 남아 페루지노의 화풍을 스폰지처럼 흡수했습니다. 20살이 된 1503년 젊은 마스터는 알비치니(Albizzini) 가문으로부터 그림을 의뢰받습니다. 알비치니 가문은 페루자에서 약 85㎞ 떨어진 움브리아(Umbria)의 시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를 통치했습니다. 알비치니 가문은 시타 디 카스텔로의 산 프란체스코 교회(Chiesa di San Francesco) 내에 성 요셉 예배당(Cappella di San Giuseppe)을 조성하고 중앙제단화까지 주문합니다. 이 그림은 성처녀 마리아와 나사렛의 성 요셉의 결혼식 장면으로서 페루지노의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Sporsalizio>(1500-1504)을 그대로 모방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제자는 스승의 그림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채 세부적 요소들만 바꾸었습니다. 제자는 마리아와 요셉의 위치를 바꾸어 마리아를 화면 왼쪽, 요셉을 오른쪽에 배치시켰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보다 결혼식 하객들 및 중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를 줄였습니다. 대신 후경의 인물들은 건물의 계단에까지 배치하는 등 넓게 분산시켜 시각적인 쾌적성을 높였습니다. 페루지노의 그림에서 중경에 있던 상체를 숙인 채 한 쪽 다리로만 서 있는 남성은 제자의 그림에서는 그림 앞쪽, 그것도 요셉의 바로 옆에 위치합니다. 이 남성의 위치를 화면 앞쪽으로 끌어 오면서 그림 전체의 고요한 분위기는 유지하되 유머감을 더했습니다. 그림 중앙의 건물은 양옆에 회랑이 붙어 있는 십자가 형태에서 회랑이 건물 1층 현관을 둘러싸는 원형의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대신 건물은 8면이 아닌 14면 이상의 면을 지닌 복잡하고 화려한 외부장식이 돋보이는 형태입니다. 건물의 높이 역시 페루지노의 그림보다 두 계단 정도 더 높이 올라와 있습니다. 건물의 정면에는 작가의 사인을 대신하여 “우르비노에서 온 라파엘로”라는 뜻의 라틴어로 “Raphael Vrbinas”라고 쓰여 있어 이 작품이 라파엘로 산치오의 그림임을 증명합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완성 직후 성 요셉 예배당에 봉헌되었지만 1806년 밀라노(Milano)로 옮겨져 현재는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의 소장품입니다.
3. 스승을 넘어선 라파엘로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라파엘로가 이미 20살의 나이에 스승 페루지노를 능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마리아의 목이 유난히 길어 아직 신체 비례는 서툴지만 우아함은 페루지노를 넘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수준에 근접했습니다. 다 빈치는 지오반니 산티가 페루지노와 함께 당대의 천재로 꼽은 미술가입니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포즈와 표정, 음영을 활용하여 얼굴에 입체감을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방법, 다채로운 표정으로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전달하는 건 다 빈치 미술의 최대 장점입니다. 평생 다 빈치를 존경한 라파엘로는 다 빈치의 화풍을 전폭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 사제의 머리는 오른쪽 방향으로 기울어진 사선이며 얼굴 오른쪽에는 그림자가 집니다. 인물의 이러한 표현은 페루지노의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라파엘로의 <스포살리치오> 속 요셉의 표정은 페루지노의 요셉보다 더욱 미묘합니다. 요셉은 혼인 전,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의 정체와 그의 숙명, 그리고 요셉 자신이 마리아와 예수의 공식적인 보호자로서 하나님에게 선택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마리아와의 결혼식은 성모자의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험난한 미래가 시작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마냥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이는 슬픔이자 기쁨(sweet sorrow)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복잡한 심리는 라파엘로 그림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와 달리 결혼을 주관하는 유대교 사제 역시 초상화처럼 풍부한 표정을 부여하며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했습니다. 중세 말부터 주문자 혹은 후원자가 종교 그림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관행에 따라 이 사제의 얼굴은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주문한 알비치니 일가의 남성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라파엘로에게 <스포살리치오>를 주문한 건 알비치니 가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특정 인물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안필리포 알비치니(Gianfilippo Albizzini)가 알비치니 가문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으며, 여러 예배당을 후원했다는 점에서 사제의 얼굴은 지안필리포 알비치니의 초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4. 페루지노가 라파엘로에게 미친 영향
페루지노는 1500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스포살리치오>를 완성한 반면 라파엘로는 1년 만에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런 이유로 라파엘로가 스승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스승이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장면을 그리는 과정을 목격했고, 스승의 그림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1503년 스포살리치오를 의뢰받았습니다. 라파엘로는 스승이 이룩한 성과 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풍의 섬세한 인물 묘사, 여성적인 우아한 분위기, 미묘한 심리 묘사들을 더하고 세부적인 변화를 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는 페루지노의 그림보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더욱 잘 알려져 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라파엘로의 초기 대표작에 꼽힙니다. 하지만 스승 페루지노가 새로운 스포살리치오 도상을 창조하려던 노력이 없었다면 라파엘로가 단기간에 <스포살리치오>를 완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라파엘로의 초기 걸작인 <스포살리치오>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5. 페루지노의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가 남긴 문화적 유산
라파엘로의 <스포살리치오>에서 페루지노의 <스포살리치오>로 거슬러 올라가면 페루지노의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 Christ Handing the Keys to St. Peter>(1481-1482)를 만나게 됩니다.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는 피렌체에서 발생한 기하학적 선 원근법에 기반을 둔 초기 르네상스 미학의 정점이며, 페루지노가 당대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게 된 작품입니다. 이 작업 이후 페루지노는 여러 작업을 수행하며 대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페루자 산 로렌조 대성당(Cattedrale Metropolitana di San Lorenzo)이 처음에는 핀투리키오(Pinturicchio, 1453-1513)에게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도상을 의뢰했지만 끝내 페루지노에게 작업이 넘어간 것도 대성당 측의 요구는 오직 페루지노와 같은 천재만이 부응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은 페루지오에게도 스포살리치오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페루지노는 자신이 시스티나 예배당에 조성한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를 떠올렸고 이 벽화의 장점을 적극 수용해 스포살리치오 도상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했습니다. 페루지노의 유산은 제자인 라파엘로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는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에 그치지 않고, 페루지노 자신의 또 다른 걸작과 라파엘로의 초기 걸작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전기 르네상스(Early Renaissance)의 거장 페루지노도,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거장 라파엘로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 이야기는 6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