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다가 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삶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부디 비극이 아니길 바라며

by ARTSYKOO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수준과 기준은 시대별로 참 많이 달랐다. 특히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그가 살다가 떠나는 세계의 방식으로 그를 존중하는 방식은 사실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 “미개함”이라고 까지 판단할 수 있었던 일들도 많다.




일전에 일하던 갤러리에서 고대 유물을 담당하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고대 유물, 그러니까 대부분이 Burial Art, 부장용 공예품들이었다.


나는 고대 이집트, 중국 지역에서 평생 고품격의 삶을 살다 간 신분 높은 사람들의 내세의 품격을 위해서 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고 가까이하던 그 모든 것들을 흙으로 빚어 똑같이 재현해서 묻어 주었던 부장품들과 하루 종일 한께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죽음’이 시대별로, 그 신분별로 얼마나 달라야만 했던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그전에는 우리가 아주 잘 알다시피 함께 있던 사람을 같이 묻었다. 이 부분은, ‘순장’ 풍습은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지만 그게 그 시대의 정신이었고, 죽음을 기리고 특정 고귀한 사람의 삶을 존엄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또 동시에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조차 수습되지 못하고 삶의 끝을 맞이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에 비해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가,

그 간극을 생각할 때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내가 얼마나 그나마 확률적으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도하기도 한다.



————————



어제는 엄마와 지난여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추억하다, 병원, 요양병원에서 맞이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죽음을 앞둔, 정신도 신체도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급’되는 또 다른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한다. 혼자 내 어떤 의지로도 내 몸을 가눌 수 없을 때, 내가 불편한 몸 때문에 표현이 막혀서 싫은 일을 당할 때, 내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때.

평생을 취향과 개인의 존엄, 존중에 대한 고민과 실현을 위해 애써왔던 사람들이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냉정히 말해 비참하다.

아무리 미화하고 싶어도 내가 지난 5년간 요양병원에서 경험한 그곳의 분들은 모두 스스로의 비참함을 하루하루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개 돼지다. 돼지우리에 밥 주러 갈 때 봤던 그 돼지가 딱 지금 우리다. 주는 밥만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




외할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고 계시던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전달 들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엄마도, 전해 들은 나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요양병원조차 가지 못하는 형편에 비하면 인생의 말년이 차라리 요양병원에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요양병원의 환자는 스스로를 개돼지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제정신인 사람라면, 그곳에서의 삶, 최선을 다해 죽을힘을 다해 살아온 삶의 말로가 “개돼지 같은 삶”이 될 줄 알았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사실 마음 한편에 그런 상태가 될 것이 두려워 정신적으로 공포감에 떨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존엄이 요양병원 이하는 사실 또한 수백 년이 지난 후예들이 봤을 때 순장만큼 끔찍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__________________





요양병원에서 할머니를 간병하던 엄마에게 “곧 내 모습이 저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라는 공포가 생겼고, 그 사실은 사실 엄마를 괴롭게 한다.

띄엄띄엄 병원을 찾아갔던 나조차 갈 때마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자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감이 들었는데 그걸 매일같이 보는 사람들이라면

과연 [삶]은, 남아있는 삶, 그리고 다가올 죽음 직전의 내 삶과 나라는 사람의 존엄성은 과연 보존될 수 있을까.



그 비참한 현실을 하루하루 마주할 때,

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