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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닿으면 좋겠다는 진심만 있다면

크리에이터 유손생, 수어통역사 유슬기 인터뷰

by 아뜨달

경계에서, 언어의 모서리에서 자란 사람은 쉽게 중심을 잃지 않는다. 유슬기는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세계에서 자라났고, 소리의 세상에서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청인과 농인, 구화와 수어, 중심과 주변의 ‘사이’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경계 위에서 치열하게 정체성을 빚어온 사람이다. 익숙함이 곧 정답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낯섦으로 곧게 서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어를 가르치고, 통역하고, 기록하며 살아간다. 이 인터뷰는 그가 지나온 수많은 불통의 순간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진심’에 대한 기록이다. 동시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잊고 있던 소통의 본질을 다시 꺼내보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 우리는 과연 누구의 언어로 살아가고 있는가. 말보다 먼저 마음에 닿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비가 건물만큼 쏟아지던 강남에서, 묵직한 눈빛과 단단한 마음을 지닌 유슬기를 만났다.


달 아래에서 살아가는 방법


1.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슬기입니다. 저는 청인사회에서는 유슬기로, 농사회에서는 (S+여자)라는 수어이름으로 불립니다.

저는 음성언어와 한국수어, 그리고 청사회와 농사회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정체성을 담아 유튜브에서는 유손생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어요.



2. 수어통역사라는 직업을 갖기 전에도, 농인 부모 아래서 자란 청인 자녀(CODA, Child Of Deaf Adults)로서 이미 많은 통역의 순간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통역’이라는 자각 없이 지나간 순간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특히 부모님과 청인 중심 사회 사이에서 ‘어른아이’처럼 행동해야 했던 기억 중에,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는 제가 하고 있는 게 ‘통역’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저 제가 들은 소리를 엄마에게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죠. 예를 들면, 저 사람들이 왜 다투고 있는지, 지하철이 왜 늦는지, 청각으로 전달되는 대부분의 정보를 엄마께 알려드렸어요. 대부분의 정보는 청각을 통해 전달되잖아요. 저는 그걸 엄마에게 설명하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나중에 커서 보니까, 그게 일종의 ‘통역’이기도 했던 거예요. 물론 지금 제가 하는 수어통역이랑은 개념이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통역은 누군가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일이죠. 그 사람의 말과 의도를 해치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전하는 것. 근데 제가 어릴 때 했던 일은 그런 ‘통역’이라기보다는 ‘설명’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엄마 세탁기 끝났어”, “밖에 누구 왔어” 같은 이야기. 그런 건 통역이라기보다는, 소리로 생긴 일상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알려주는 일이었죠.

어린 시절에는 늘 어른이어야 했고, 어른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중약자였던 것 같아요. 장애인의 자녀이자 어린아이라는 이중약자의 위치에서 어른들이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려면 어른스럽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한테 책임을 많이 물었어요. 통역 결과가 좋으면 내가 잘한 거고, 안 좋으면 내가 부족했던 거라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은행에 가서 대출이 안 나왔을 때도, 그게 부모님의 신용이나 조건 문제일 수도 있는데, 저는 ‘내가 통역을 잘못했나?’, ‘내가 설득을 못 했나?’ 하고 자책했어요. 어린 시절 내내 스스로에게 책임을 많이 물으며 자랐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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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다로서 수어를 교육하고 농문화를 알리는 활동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 활동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사실 제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에 꼭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아요. 저는 프리랜서 수어통역사이기도 하고, 영상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며, 수어 교육도 하고 있는데요. 이 모든 활동을 하나로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그건 바로 ‘코다’라는 정체성이에요. 제가 코다이기 때문에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또 비교적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코다이면서도 결국 청인이잖아요. 그래서 ‘청인이 수어를 가르쳐도 될까?’라는 고민은 꽤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수어의 원어민은 농인이고, 누가 뭐래도 원어민인 농인이 청인보다는 잘 가르치는 게 맞죠. 그래서 내가 이 역할을 감히 맡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은 늘 있었어요.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농인의 약 90%는 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요. 그래서 많은 농인이 어린 시절 부모와 언어가 다르고, 수어도 부모에게서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저희 엄마 세대는 대부분 농학교 선후배나 교회 모임 등 커뮤니티를 통해 수어를 익히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반대였어요. 수어 사용자였던 농부모와 함께 자라면서 수어가 저에게는 말 그대로 모국어처럼 스며들었어요. 배우려고 해서 배운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몸으로 익히게 된 거죠. 이런 경험이 수어를 배우려는 청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저는 농인도 청인도 아닌, 청인이 농인을, 농인이 청인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교육은 그 연결 수단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물론 영상을 만드는 것도 수어통역도 있지만, 교육이라는 접점은 그 둘 사이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물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껴요.

저희 부모님을 포함해서 농인 대부분은 학교에서 수어로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고, 대부분 음성언어, 수어를 쓰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농인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전문직을 갖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농인이 수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서 언어를 지키고 알리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청인이 대신하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저도 넌 코다니까 괜찮잖아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저는 코다이면서 결국 청인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굳이 이 많은 직업 중에 농사회의 일자리 하나를 차지해도 될까? 하는 고민은 계속 안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걸 확장해 보고 싶어요. 지금은 작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지만, 언젠가 이 활동이 농문화와 청인 사회 사이를 더 잘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바라고 있어요.


4. 슬기 님의 영상을 보다 보면 수어의 매력적인 점들이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할 수 있고, 시선과 기다림 같은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 수어 속에 녹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슬기 님께서 수어로 소통하면서 느낀 또 다른 장점이나,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수어는 ‘시각언어’이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준다는 내용을 수어로 표현할 때, 꽃이 남자에서 여자 쪽으로 이동하는 움직임 자체가 준다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공간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줬다는 의미가 완성되죠. 이처럼 공간을 활용하고 시각적인 언어를 구성하는 다차원적 언어라는 점이 수어만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수어를 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많은 분이 손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사실은 얼굴, 정확히는 눈을 중심으로 봐야 해요. 얼굴에 문법 정보도 담겨 있고, 감정도 담겨 있거든요. 농인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예요. 모든 방향에 시선이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수어를 쓰면 한없이 정직해지고 솔직해져요.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언어라서 좋아요. 물론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숨기겠지만, 저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요. 저도 때로는 숨기고 싶을 때도 있죠. 음성언어나 메시지는 그런 감정을 감추기가 쉬운데, 수어는 웬만해서는 들켜요. 저에게는 그게 오히려 좋습니다.



5. 수어를 ‘통역하는 일’과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일’은 분명 다른 감각일 것 같습니다. 수어 교육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오히려 수업을 하며 스스로 다시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사실 아직까지 마음을 울릴 만큼 기억나는 특별한 장면은 없어요. 제가 수어의 중·고급 과정보다는 입문자 교육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저는 수어 입문자들이 수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잘 열어주는 역할에 가까워요. 수어를 처음 배우고 어려워서 포기하시는 분이 많은데, 저는 그 입문 과정을 재미있게 열어주고, 농사회에 첫 발을 딛는 것을 돕는 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농문화의 문지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오히려 그들이 가진 편견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수업 첫날부터 수어를 배워서 봉사하고 싶어요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영어를 배워서 봉사하겠다는 사람은 잘 없잖아요. 왜 수어만 도와주는 언어, ‘봉사의 도구가 되는 걸까요? 저는 그 태도 속에 수어를 장애인의 언어로만 규정하고, 수어 사용자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주려는 시혜적인 시선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수어를 잘하지만, ‘봉사’로 하진 않습니다. 수어는 농인의 언어이고, 그냥 그 자체로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언어예요. 그래서 저에게 교육은 잘 가르쳐야 한다는 기술적 차원을 넘어서, 편견의 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는 일에 가깝다고 느껴요. 지금까지는 학생들이 제 생각을 바꾸게 했다기보다는 제가 그들의 생각을 하나씩 깨뜨려주는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6. 수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슬기 님은 어떤 감각이나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단순히 언어를 익히는 걸 넘어서, ‘이건 꼭 기억했으면 한다’ 싶은 가치나, 반대로 ‘이건 가장 경계했으면 하는 태도’가 있다면요.

제가 꼭 전하고 싶은 건, 수어는 하등한 언어가 아니라 완전한 언어라는 점입니다. 수어 사용자에 대해서 “불쌍하다”, “못 한다”, “무식하다”는 식의 편견은 사실 너무 흔하게 들어왔고, 이젠 좀 지겨울 정도예요. 요즘은 그런 말 들으면 그냥 웃겨요. 수어를 장애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시선이 문제예요. 사람들이 농인을 언어적 소수자로 보지 않고, 무조건 ‘장애인’이라는 인식으로 먼저 접근하니까, 수어를 쓰는 사람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거죠. 근데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포르투갈 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못 하면, “한국어 못 하네? 불쌍하다.”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건 그냥 언어 차이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수어 사용자에게는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불쌍하다’는 시선을 던져요. 이건 수어가 언어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이자 편견이에요. 그래서 저는 늘, 수어는 ‘장애와 관련된 보조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접근해 달라는 이야기를 해요. 이 감각이 자리 잡히는 것만으로도, 수어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건강해질 수 있거든요.



7. 청인들의 ‘과한 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하더라도, 그런 배려 자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자리라면 프롬프터 가까운 곳이나 어둡지 않은 공간에서 통역이 보일 수 있도록 전시장이나 무대가 구성돼야 해요. 하지만 아직은 이런 기본적인 배려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죠. 저희 엄마도 청인을 배려해서 일부러 뒤에 가서 수어로 대화하시고, 화면을 가릴까 봐 더 뒤에 앉으세요. 이건 분명 청인을 위한 배려예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된다면, 필요한 만큼 딱 좋은 배려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뾰족한 사례 하나를 꼭 떠올려야 하나 싶기도 해요. 살다 보면 꼭 그렇게 선명하게 찔리는 순간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두루뭉술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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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에 있어도 닿지 않을 때


8. 사람들이 수어와 농문화를 대할 때, 무의식적으로 위계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을 감지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를 들면 시혜적인 태도, 혹은 대화에서 주체가 비껴 나 있는 느낌 같은 것들이요. 슬기 님은 이런 시선을 어떤 방식으로 마주하고, 또 다루고 계신가요?
앞서 언급해 주신 ‘하루 종일 수어만 쓰면 생기는 일’ 브이로그에서는 선물을 받았을 때 아이가 예뻐서 주는 거라고 하셨는데,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수어를 해서, 애기가 불쌍해 보여서 선물을 주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왜냐면 평소에 수어를 쓰지 않고 있을 땐 그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옛날에도 엄마, 아빠랑 시장에 장을 보러 가면 덤을 많이 받았어요. 불쌍해서 그런 것도 있고, ‘얘기도 안 통하는데, 그냥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덤을 많이 받아서 좋았다거나 우리만 문제없이 넘겨줘서 좋았다 같은 순간은 없었어요.
역할 때도 그 시선의 위계를 자주 느껴요. 사실 통역의 관계에서 통역사는 주체가 아니잖아요. 통역은 말 그대로 다리예요. 말하는 사람은 농인과 청인이고, 저는 그 대화를 연결해 주는 부차적인 역할이에요. 그래서 저는 통역할 때 농인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해요. 청인을 절대 보지 않아요. 왜냐면 통역사의 시선이 대화의 구조를 결정하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청인은 저를 봐요. 그렇게 되면 청인-농인의 대화가 아니라, 청인-저의 대화에 농인이 ‘껴 있는’ 구조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게 정말 중요해요. 이 시선의 방향 하나로 대화에서 누구의 존재가 중심인지가 정해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주 의도적으로 시선을 조정해요. 청인과 대화하더라도 농인을 향해 수어를 하고, 농인을 바라보며 대화의 흐름을 이끌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청인도 농인을 보기 시작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균형 맞추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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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코다, 청인 사회, 농문화 사이에서 슬기님 내면의 불통이나 충돌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서로 다른 정체성과 문화가 부딪히며 고민하게 된 순간들이요.

코다라는 두 글자로 제가 얼마큼 설명이 될지 모르겠어요. 저는 항상 경계인이었어요. 농인도 청인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 농인과 청인 중에서는 청인이지만, 저는 수어를 쓰고 농문화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완벽히 청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와 저는 제가 음성언어를 터득하기 전까지 수어로 대화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청인 사회 속에 ‘던져지듯’ 들어간 거예요. 그 속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어요. 우리 부모님이 왜 수어를 쓰는지, 왜 말을 못 하는지, 나는 왜 수어를 써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스스로 알아야 했어요.

저는 처음에 부모님이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엄마가 청인들과의 어떤 상황에서 입말을 하셨어요. 충격적이었어요. 사람들한테 “우리 부모님 말을 못 해서 그래요”라고 말하고 다녔었거든요. 그 이후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구나’를 이해했어요. 학교 가서 배우니까 청각장애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알게 된 것 같아요. 누가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문화도 다르잖아요. 집에서는 화장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때 불을 껐다 켰다 해요. 근데 학교에서는 노크를 하잖아요. 전 그걸 몰랐어요. 노크라는 개념도, 언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지도 낯설었어요. 저희 집에선 문은 늘 열려 있었고, 소리를 못 들으니 그런 신호도 필요 없었으니까요. 친구를 부를 때도 농인들은 어깨를 툭툭 치는 게 자연스러워요. 근데 청인들은 이름만 부르더라고요. 제가 친구 어깨를 툭툭 쳤다가 “왜 건드려?” 같은 오해를 사기도 했어요. 그때 느꼈어요. 내가 엄마 아빠랑 익숙하게 하던 방식이 바깥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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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어떤 감각을 중심으로 살아왔는지에 따라 삶의 선택지나 말의 방식이 달라졌고,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슬기 님께는 감각의 위계가 개인의 언어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를 실감한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지금의 저는 수어를 제 감각으로 삼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수어를 업으로 삼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게 제가 가장 저다워지는 언어 같거든요. 사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수어와 멀어졌어요. 성인이 되면 수어를 쓸 일이 부모님 말고는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음성언어 중심의 감각을 키우게 됐죠.
어릴 때는 항상 엄마 아빠와 저의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했어요. 청인 사회에서 벌어진 일을 수어로 설명하려 해도 제 수어가 완벽하지 않았고, 다른 청인 어른에게 엄마의 말을 전달하려 해도 엄마의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낼 능력이 저에겐 부족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말을 잘해야 된다’, ‘글을 잘 써야 된다’는 감각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음성언어가 저의 중심 감각이 되었고, 글을 많이 쓰고 말하는 법을 많이 연습했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온전히 저일 수 있었던 감각은 수어였어요. 지금도 완벽하진 않지만 수어를 제 감각으로, 제 언어로 만들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이 질문을 (미리) 받고 엄청 고민했어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온전히 저일 수 있는 공간은 코다인 것 같아요. 사투리 쓰는 사람이 글로도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저도 수어 문장을 그대로 글로 옮겨 쓰기도 해요. 예를 들어 수어에서 ‘가능하다’는 의미로 쓰는 표현이 ‘파-’인데, 그래서 “저 내일 시간 파?” 이렇게 쓰는 식이에요. 불가능은 ‘푸푸’라고 입으로 말하듯 표현하고요.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쓰는 농인도 있지만, 저희 엄마는 그렇진 않으세요. 그래도 가끔 수어 문장을 한국어 문장처럼 바꿔서 표현하시는데, “오늘 밥 뭐?” 같은 식으로요. 이런 문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사람들도 코다 언니, 오빠, 동료들이에요. 그런 선 한가운데에 있는 나의 동료들, 동포들. 하하. 마치 LA의 한인타운처럼 코다 동포들이랑 있을 때 가장 편하고, 저의 언어를 쓸 수 있고, 저의 가장 온전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코다는 아예 다른 세상이에요. ‘경계에 있다’고 표현하긴 하지만, 사실은 그 경계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문화고 세계예요. 청인과 농인의 교집합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인 거죠.



11. 불통은 단지 피하고 싶은 일이나 수동적인 피해 경험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의 선택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슬기 님께도 ‘불통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요?

청인사회에서는 의도적으로 불통을 선택한 적 있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눈치로 이해했는데도 모른 척하거나, 일부러 무시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엄마 아빠와 있을 때는 불통을 선택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기본적으로 이미 불통이니까, 엄마 아빠한테는 제 마음이 닿기만을 항상 바랐지, 닿지 않길 바랐던 적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은 닿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이 늘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화가 나는데 엄마는 몰라줄 때 씩씩거리는 걸 일부러 보여주고 문을 쾅 닫아 보기도 했어요. ‘나 지금 화났어!’라는 걸 일부러 더 표현했죠. 어릴 땐 울고 있으면 엄마는 ‘왜 우냐’고 물으셨는데, 안 통하면 일부러 앞으로 가서 울었던 기억도 있어요. 농사회에서는 불통을 선택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정말로 불통하고 싶으면 수어 안 하고 눈 감으면 되긴 하지만, 그렇게 한 적은 없어요. 마음을 숨긴 적은 있죠. 그런데 수어를 하면 너무 정직해져요. 표정에 다 드러나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숨기고 싶어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동안 엄마는 아마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신 것 같아요.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도 아이를 낳고 나서 알았어요. 엄마한테는 다 보이는구나, 하고요.



12. 에버랜드 브이로그는 여전히 주변 환경과 얼마나 충돌하는지를 증명하는 영상이었던 것 같아요. 수어영상은커녕 문자 통역조차 제공되지 않는 공간이 지금도 너무 많잖아요. 그 공간들이 어떻게 다르게 설계될 수 있을지, 어떻게 감각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래야 개선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테니까요.
우선 에버랜드를 비난하려고 만든 영상은 아니었고요. (웃음) 저는 모든 상황을 영상으로 남기거든요. 수어는 시각 언어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나중에 돌아가시면 제가 남긴 영상들이 기억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그날도 단지 재밌게 노는 장면을 기록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그런 주제가 되었어요. 시정 요구나 민원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에요. 물론 제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었겠죠. 고객의 소리에 글을 쓰거나 민원을 넣는 방식으로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사실 그 공간에서 누리는 사람이에요. 진짜 불편을 겪는 사람은 농인이죠. “농인이 힘드니까요.” 하는 건 싫었어요. 그래서 변화의 주체는 농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게,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실제로 필요한 게 뭔지,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는 농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분들의 목소리가 더 닿길 바라고 있어요. 저는 이슈의 화두를 던진 것뿐이고, 만약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농인과 그 공간이 직접 만나서 바꿔 가는 것이 맞다고 봐요.

어딜 가든 항상 ‘엄마랑 같이 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아찔 했겠다’, ‘엄마랑은 오지 말아야겠다.’ 이런 생각하는 곳이 많아요. 부모님이 나 없이 에버랜드에 다녀오셨다면, 안전벨트 착용 안내나 퍼레이드 전 설명 같은 것도 이해하셨을까 걱정이 돼요. 퍼레이드 전 애니메이션이 정말 길었어요. 1시간을 기다려서 봤는데 몇십 분 동안 자막 없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더라고요. 부모님이라 다행이었지, 만약 농아동이었다면 그 애니메이션이 진짜 재미없었을 거예요.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콘텐츠는 아니었어요. 자막이나 수어 통역이 들어갔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게 계속 바뀌지 않으면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코다가 이런 감각의 격차를 계속 겪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이건 다른 얘기인데, 아빠한테 질문한 적이 있었어요. “내가 수어 해서 좋았던 순간 언제?” 했는데 어릴 때 롯데월드에서 제가 핫도그 두 개를 주문했던 순간을 잊지 못하신대요. 원래는 부모님이 손짓으로 핫도그를 가리키며 ‘이거 두 개 얼마?’ 하는 식으로 소통하셨는데, 그날 제가 “핫도그 두 개 주세요. 얼마예요?” 한 게 기억에 많이 남으셨대요. 충격이었어요.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부모님께는 특별하게 남는 줄 몰랐거든요.



13. 불통의 순간이 반복되면 때로는 말하고 싶다는 마음조차 사라지기도 하잖아요. 슬기 님은 그런 마음을 어떻게 다시 회복하고, 말할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오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불통의 순간이 반복될 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면 ‘잠깐 멈춤’을 선택해요. 감정이 격할 때나, 진심이 어려울 때는 억지로 소통하지 않아요. 내가 정직할 수 있고 진심일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는 편이에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 멋지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회피’에 가까워요. 그냥 안 만나고, 안 부딪히니까 불통이 생기지도 않는 거죠. 어떻게 보면 불통을 피하기 위한 방식이에요. 이게 정답은 아니고, 그냥 제 성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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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 같은 달 아래 살아가야 하니까


14. 카페나 식당 같은 곳에서 의도적으로 수어를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언어 선택이 곧 감각의 주권임을 증명해 주시는 것 같아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영상 말미에 ‘이제는 엄마가 조금은 친절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우시는 걸 보면서 눈물이 너무 났는데, 그 이후로 더 깊이 고민하게 된 소통 방식이나 삶의 태도가 있으셨을까요? 꼭 언어나 말이 아니라 태도로서의 소통 방식이요.
눈을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 때 눈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보다 먼저, 언어나 표현보다 더 깊이 닿는 건 눈이잖아요. 오해할 건 오해하고 소통할 건 소통하고 전해지지 않는 건 눈으로 한 번 더 주고받고, 그게 진짜 소통 같아요. 눈 마주치는 것부터 시작! 그리고 기꺼이 불통을 감수하려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불통도 삶의 일부이고, 때로는 그 안에서 재미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고 봐요. 어떻게 완벽한 소통을 하고 살 수 있겠어요.



15. 사실 슬기 님의 남편분 이야기도 살짝 궁금해졌어요. 슬기 님의 삶과 감각을 지지하는 중요한 존재이시잖아요. 슬기 님보다 먼저 우시던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남편분은 평소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시는 분인지, 또 슬기 님과의 소통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단순히 남편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의 감각을 존중하는 관계에 대해 듣고 싶어 드리는 질문입니다.

그건 그냥 진심 얼마큼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가. 남편도 저에게 진심일 거고 저 역시도 그렇고요. 남편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부분 중의 하나가, 농문화에 되게 진심이에요. 부모님의 문화를 존중하는데, 이게 진심이라서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남편에게 수어를 가르쳐줘서 남편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수어를 가르친 적이 없어요. 남편이 되게 코다 같아요. 제가 어떻게 언어를 배웠는지를 남편을 통해 보는 느낌이에요. 언제 한 번 남편이 레시피를 물어본다고 저희 엄마와 영상통화를 한 적이 있어요. 영상통화 할 때 뒤에 폰을 받칠 걸 막 찾는 거예요. 그걸 멀리서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코다 남편 다 됐네 싶었어요. 그러고 남편이 엄마랑 수어를 하는데 뭔가 이상한 거예요. 제가 모르는 수어였어요. 근데 또 엄마랑은 이야기가 되는 거죠. 나중에 물어보니까 병원이라는 수어더라고요. 남편이 엄마랑 이야기하는데 둘만의 홈사인이 따로 있더라고요. 놀랐어요. 남편도 홈사인을 쓸 수가 있구나. 남편도 엄마에게 진심이고, 엄마도 남편이 청인이기 때문에 쓰는 표현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다름을 진심으로 이어주는 게 진짜 소통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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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코다로서, 수어통역사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소통할 때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단순히 수어라는 언어를 쓰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 역할마다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닿고 싶은지’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각 역할에서 지향하시는 소통의 방식이나 태도가 있다면요?
다 똑같아요. 솔직하고, 정직하려고 해요. 숨겨지지 않아서요. 아기와의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수어와 음성언어를 같이 쓰고 있어요. 남편도 아기에게 수어를 쓰고 있고요. 이건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아기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농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예요. 우리 아이는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갖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는 코다로서 그 문화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저와 남편이 물려주고 싶은 건 단지 수어만이 아니라, 문화를 향한 존중과 애정, 그리고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태도예요.

제가 브이로그 촬영하면서 ‘나 농인이야’ 이런 행동을 뿜었어요. ‘저 못 듣고 말 못 해요’ 이런 걸 보여줬어요. 그게 그렇게 행동이 되고 있더라고요. 어떤 의미냐면 예고 같은 거예요. 농인은 시각장애나 발달장애, 지체장애랑 다르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누군가 엄마한테 말을 걸 때 못 들으면 ‘아 왜 못 들어’ 하면서 엄청 격한 반응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도 농인인 걸 알면 그 정도의 격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겠죠? 거기서 불통이 그렇게 생기기도 하거든요. 그 영상을 보면서 ‘와 나 엄마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의 엄마를 저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엄마 같았고, 남편은 저 같았어요. 남편을 통해서 제 어린 시절을 다시 보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남편한테 통역을 부탁한 적이 없어요. 심지어 저는 농인도 아니라 거짓말이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끝까지 가야겠다 (웃음) 이렇게 된 거죠. 저도 보니까 당당하게 수어를 쓰고 있더라고요. 이게 저희 엄마가 당당하게 수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저에게 수어를 노출해 줬고, 엄마 스스로가 농문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 역시도 아끼고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요. 그니까 어떤 방법이든지 부끄럽다고 생각을 하면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면 어떤 언어든 오해가 생기는 거죠. 나의 말과 생각과 의도가 온전히 닿으면 좋겠다는 진정성만 있다면 모든 언어는 불통 없이 잘 소통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고요.



17. 코다를 위한 교육이라던지 강연 같은 행사를 많이 나가고 계시잖아요. 흩어져 있는 코다를 모으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만약 마음이 맞는 코다분들을 만나게 되면 꼭 시도해보고 싶은 콘텐츠나 행사가 있을까요?

제가 코다 관련 행사나 교육을 계속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보를 전하려는 게 아니라, 흩어져 있던 코다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만약 마음 맞는 코다들을 만난다면 꼭 해보고 싶은 기획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청인들 사이에 농인을 조용히 섞어놓는 실험적인 콘텐츠. 그 사람이 농인이라는 걸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파악하게 될까? 그 과정에서 어떤 소통이, 혹은 어떤 오해가 생길까? 이런 방식으로요. 또 하나는 성인 코다와 어린 코다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만나는 자리. 아이가 자신의 고민을 나누면, 그걸 듣고 있는 어른이 실은 같은 경험을 했던 코다였다는 걸 나중에 밝히는 식이에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세대 간의 이야기와 감정이 연결되기를 바라요. 내년에 제가 기회가 생기면 하고 싶은데, 코다 사회가 워낙 좁아서 가능한 기획인가 싶긴 해요. 같이 기획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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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슬기 님께 수어는 단순히 ‘쓰는 언어’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감각이자 방식일 것 같아요. 수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졌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타인과요? 늘 연결된다고 느끼는데, 농사회 안에서 마음이 연결된다고 생각해 볼게요. 단순하게 “우리 엄마 아빠 농인이에요.” 하는 순간 농사회 안에서 연결되어요. 그게 마치 패스권 같아요. 처음엔 낯설고 경계하던 분들도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수어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되면 그 경계를 허물어주시죠. 그 마음이 저는 정말 감사해요. 단순히 제가 코다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는 경험은 저로 하여금 더 진심으로, 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요.



19. ‘우리는 모두 달 아래 살아간다’는 문장처럼, 저마다 다른 조건과 감각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슬기 님께서는 ‘나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느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2년 전, 2023년에 인천에서 코다국제컨퍼런스가 개최된 적이 있어요. 전 세계의 코다가 모이는 자리예요. 제가 코다코리아 운영위원으로 정말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했어요. 근데 개최 첫날에 너무 힘든 거예요.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나, 언어도 문화도 다 다른데 얼마나 닮았을까, 조금은 지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었거든요. 근데 컨퍼런스를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오히려 집을 떠나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집을 떠나 이곳에 왔는데 다시 고향을 떠나는 느낌. 여기가 내 고향이었구나… 를 느꼈어요. 나 다시 세상으로 가야 하네. 코다들과 함께 있으면 더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 사촌 형제 같은 감각이 있어요. 그때야말로 나 살아 있구나, 같이 살아가는구나를 느껴요.

컨퍼런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밀인데 이 이야기는 해도 될 것 같아요. 컨퍼런스 안에서 서로 소개할 때, 우리 엄마 아빠는 농인이야라고 하면 모두들 안타깝다면서 우는 반응을 해줘요. 사회에서 받는 부정적인 반응을 밈으로 승화시킨 거죠. 코다들 안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이야기 같은 거예요. 그게 정말 기억에 남아요. 우리 엄마 아빠 농인인데, 진짜? 나도~ 사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농인이거든요. 근데 그 안에서 코다만이 느끼고 누리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20. 아기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신 수어가 뭔가요?

사랑해!

유봄이가 쥠 반사로 주먹을 자주 쥐는데, 유봄이의 주먹 위로 제 손을 올려 사랑한다는 수어를 먼저 보여줬어요. 그리고 그 주먹을 코에 대면 좋아라는 의미가 되거든요. 물론 아직 유봄이는 수어를 잘 모르지만, 사랑해, 좋아 수어와 음성언어를 같이 했을 때 유봄이가 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게 좋아요.


우리는 언어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들을 조심스럽게 공유했다. 그의 붉어지는 콧잔등을 보며 수차례 말을 잃기도 했다. 그간의 소통 중 가장 눈물을 참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엄마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나누는 대화에서 어느 누가 무사할 수 있을까. 언제나 마음이 닿기만을 바라는 진심 앞에서 마음이 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고, 표정으로 마음을 전한다. 이는 은유가 아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생의 또 다른 감각이다. 단지 소통을 위한 몸짓이 아니라, 오해와 편견을 깨뜨리는 시선이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문장이었다. 그가 전하는 언어는 기술을 넘어 삶의 태도였고, 손과 얼굴 끝에서 피어나는 진심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드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진심은 말보다 먼저 닿기도 하는 것이었다.



Interviewee 유슬기


Interview 엄나영

Research 배정아

Edit 엄나영

Photography 김윤이, 배정아

Design 김윤이


© 2025 arttdal. 김윤이, 배정아, 엄나영


우리는 분명 듣고 있는데, 왜 서로에게 닿지 못할까.
〈우리는 모두 달 아래 살아가〉는 아뜨달의 인터뷰 시리즈로, 모두가 같은 달 아래 존재함에도 감각의 위계와 소통의 불균형이 지속되는 현실을 은유합니다. 우리는 ‘불통’을 감각의 부재가 아닌 내면에 자리한 위계의 문제로 바라보며, 그 간극을 드러내고 해체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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