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조교님이 추천하셔서 조교실 근로를 하게 되었다. 추천이라는 건 알바자리로 여기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다.
국가근로 장학은 본인이 직접 한국장학재단에 신청하고 철저히 우선순위에 따라 선발된다. 부서별 배정인원은 학교가 정하는 것 같고, 신청한 소속학과 학생 목록이 부서 조교에게 간다. 여기서 선발되지 않으면 교내 다른 부서(학과 제외)로 가는 듯했다.
나는 바로 조교실로 발령(?) 났다. 도서관에서 근로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는데, 내가 1순위 중에 1번이었단다.
무튼 선배나 교직원 선생님들께 소위 '근로'라고 불리는데 나는 조교님한테 듣는 '노예'소리가 좋았다. '조교실의 노예'
한 학기를 지나 또 한 학기, 또 한 학기 해서 1년 반을 일하고 있으니, 선배님들이 슬슬 이런 말을 꺼내기 시작하셨다.
"너 나중에 조교 할 것 같다"
1년 반 동안, 조교가 2번이나 바뀌었는데 근로학생은 줄곧 나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거기에 대고 늘 "설마요" 하고 웃어넘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일본에 1년 교환유학을 갔다 오고 마지막 한 학기 동안
취업 준비는커녕, 눈앞에 닥치는 발표, ppt준비, 중간고사, 과제들에 정신없이 치이다가 교수님의 제안이 들어왔다.
"조교 할 생각 없니? 한번 생각해 봐"
순간, 지난 근로장학생 시절이 휘릭하고 뇌리를 스쳤다. 나도 모르게 숨도 참았다. 조교님이 조교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어디 가서 경력도 안되고.."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교수님 앞에서 놀란 티를 내진 못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사실 이전에도 본가 쪽 지역에 회사 채용공고를 추천하셨었다. 근데 이번 제안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기회일 거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교자리를 거절하기에 이유가 부족했다. 지금은 11월 중순, 당장 어느 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것도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막상 아무 진로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졸업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고, 본가로 내려가면 나란 애는 히키코모리가 될 수도 있다. 아빠한테 아무것도 안 하는 꼬라지를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여기서 집을 구하고 생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내가 이제껏 취업준비한 게 뭐가 있나. 유학을 갔다 오긴 했지만, 아직 일본어를 그리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영어는 물론 젬병이며 컴맹이다. 다른 자격증도 없고 특기라고 내세울 것도 없다. 이대로라면 난 100번의 입사지원을 다 떨어져 버릴 4학년, 곧 백수였다.
굳이 따지고 보면 조교일이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나는 조교를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결론은, 하기로 했다. 조교.
첫 근로 때 조교님(나랑은 한 학기하고 그만두셨는데
계속 조교님이라 부르고 있음)이랑 요즘도 가끔 연락하는데, 결국 조교 한다고 했더니 적잖이 안타까워하셨다.
"그래도 네가 정한 거니까, 계획 잘 세워서 해봐"
"일단 해볼게요. 어쩌면 의외로 잘할지도 모르고"
결정하고 인수인계 일정을 소화하며-
'잘... 할 수 있으려나... 노예가 신분 상승한 건가... 허허허'
라는 실없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조교가 된 첫날 깨달았다.
'대학교에서 제일 신분이 낮은 건 조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