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생 워킹맘의 다채로운 삶의 결
안녕하세요! 여기, 1987년생 워킹맘 이슬이 출사표를 던집니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 에이, 그냥 '경력직 어른이'라고 불러주세요! 지금은 식품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식품을 만들고 있지만, 제 삶은 전혀 단순하지 않아요. 중3 사춘기 아들 녀석과의 밀당은 기본, 여기에 퇴근 후 밤마다 출석해야 하는 4년제 야간 산업대학 사회복지학 공부까지! 가끔은 저도 제 열정에 깜짝 놀란답니다.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지만, 제 심장은 아직 뜨겁게 뛰고 있거든요.
사람들은 저에게 "피곤하지 않냐?"라고 묻지만, 제 대답은 늘 똑같아요. "네, 피곤해요! 그런데 재밌는 걸 어떡해요?" 맞아요, 저는 지금 제 삶을 한 땀 한 땀, 아니 매일매일 '업그레이드' 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 레벨을 올리듯, 제 인생의 경험치와 스킬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기분이랄까요?
이 자전적 소설은 87년생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대부터, 월 350만 원 벌던 직장을 뒤로하고 최저임금을 받는 식품 공장으로 이직한 반전 직업 스토리, 그리고 야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저의 좌충우돌 스토리를 담아낼 거예요. 제 삶의 페이지마다 새겨진 웃음과 눈물,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도전의 기록들이 여러분에게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작은 용기나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 그럼 저의 다채로운 삶의 결, 함께 감상하실래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엄마, 내가 중3인데 아직도 폰이 이거야? 친구들은 다 새 거 쓰는데!"
저녁 식탁에서 아들이 삐죽거린다. 벌써 중학교 3학년, 사춘기의 정점을 찍고 있는 내 아들이다. "얘, 이 폰도 쓸 만하거든? 그리고 엄마도 새 폰 쓰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다르잖니?" 잔소리 같지만, 나름대로 현실을 가르치려는 엄마의 마음이다. 1987년생인 나는, 이런 대화가 어색하지 않다. 우리 세대는 늘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과 '있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으니까. 시대는 빠르게 변했지만, 삶의 무게는 언제나 우리 몫이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잔잔하면서도 끈질긴 생활의 압박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우리는 87년생. 88 서울 올림픽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엔 IMF 외환 위기의 그늘을 경험했다. "엄마 아빠가 회사가 힘들대." 어렴풋이 들었던 어른들의 걱정은 어린 나에게도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친구들과는 삐삐 대신 시티폰의 신기함에 잠시 설레기도 했고, 학창 시절엔 싸이월드에서 하루 종일 '도토리'를 모으고 '파도타기'를 하며 행복해했다.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엔, 비로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경험했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손 안의 작은 컴퓨터로 세상을 연결하는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나? 대학 안 갈 거야. 빨리 돈 벌어서 엄마 아빠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그때의 나는 솔직히 대학이라는 문턱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학비를 내고 몇 년을 공부하는 대신, 당장 사회에 나가 돈을 버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스물넷,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았다. 나는 엄마가 되었다. 예쁜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아이를 키우며 당장 생계를 꾸려야 했다. 대학 문턱을 밟아본 적 없는 학력이나 이렇다 할 경력은 내세울 게 없었다. 오직 두 발로 뛰고, 땀 흘려 일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이슬 씨, 자동차 부품 품질에 이상 없습니다! 오늘 출고 준비 완료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자동차 품질관리직으로 일했다. 월 350만 원. 나 혼자 아들을 키우는 데 이 정도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꼼꼼하고 책임감 있게 일한 덕분에 주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기 위해 정말 이를 악물고 일했다. 남들 보기에 괜찮은 직장이었고, 다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냐"라고 말하며 나에게 안정적인 삶을 권했다. 그런데 그때, 내 안에서 뭔가 새로운 갈증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내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나를 만들고 싶다는 깊은 갈증이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 그래서 용기를 내어 4년제 야간 산업대학에 입학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이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배우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건, 국가장학금을 받게 되어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게 된 점이었다. 이는 내가 이 힘든 길을 걷는 데 있어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문제는 곧 닥쳐왔다. "이슬 씨, 오늘도 지각입니까? 강의 시간 맞추기 힘든가요?" 퇴근 후 바로 학교로 향했지만, 직장이 대학과 거리가 너무 멀었던 탓에 퇴근 후 학교까지 가는 통학 시간만 해도 진이 빠졌다. 밤늦게까지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느라 새벽에 잠들기 일쑤였고, 다음 날 아침이면 녹초가 되어 학교 수업에 지각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제때 도착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학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배움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결국, 나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대학에 좀 더 가까이, 그리고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그건 나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자, 현재의 안정적인 수입을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힘든 결정이었다.
"네, 최저임금이라도 괜찮습니다. 배우면서 일하고 싶어요. 대학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월 350만 원을 벌던 자동차 공장을 뒤로하고, 대학과 가까운 식품 공장 생산직으로 이직했다. 월급은 최저임금으로 뚝 떨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내게 이곳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삶의 터전이자, 배움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근하고, 온몸이 쑤시도록 일하지만, 나는 묵묵히 내 자리를 지켜낸다. 87년생인 우리는 그렇게,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선택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왔다. 그 속에서 찾아낸 작은 행복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딸깍, 딸깍.”
새벽 5시,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주방으로 향한다. 피곤함에 몸을 뒤척일 틈도 없다. 아들과 나의 아침밥은 물론, 공장에서 퇴근하자마자 곧장 학교로 가야 하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아들이 혼자 먹을 것까지 미리 해둔다. 국을 끓이고, 반찬을 볶으며, 냉장고에 넣어둘 아들의 저녁 도시락을 준비한다. '오늘은 뭘 먹일까? 잘 먹을까?' 이른 시간에도 아들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곧 내 부지런함의 원천이다. 잠시라도 더 자고 싶은 유혹이 크지만, 내 하루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어둡고 차갑다. 덜 깬 잠을 쫓으며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신다. 고된 하루가 시작되리라는 걸 알지만,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회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식품 생산 라인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생산 라인에 서는 순간,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엄마의 역할은 잠시 내려놓고, 그저 내게 주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슬 씨, 오늘 포장 상태 좋아요! 역시 손이 빠르시네요!" 동료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쉼 없이 지나가는 제품들을 능숙하게 포장하고 검수한다. 반복적인 작업 속에서도 작은 오차 하나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수많은 재료들이 내 손을 거쳐 맛있는 식품으로 완성될 때마다 묘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비록 급여는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최저임금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시간은 나름의 규칙과 안정감을 준다. '이것도 다 아들 학원비, 그리고 나를 위한 투자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인다.
점심시간, 드디어 한숨 돌릴 시간이다. 고단했던 몸에 잠시나마 휴식을 주는 '꿀' 같은 시간이다. 동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웃음꽃을 피우기도 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잠긴 화면을 연다. 아들이 밤늦게 보낸 메시지가 보인다. '엄마, 나 오늘 학원 끝나고 친구랑 떡볶이 먹고 갈게.' 짧은 메시지지만, 피곤했던 몸에 다시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아유, 이 녀석. 떡볶이 타령은 여전하네. 얼마나 잘 먹고 다니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이 난다. 동료들이 "아들한테 온 문자예요? 피곤해도 아들 문자 보면 힘나죠?" 하고 묻는다. "네, 뭐, 별 얘긴 아니고…." 하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결국 아들의 존재였다.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 그리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가장 큰 이유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바로 향하는 대신, 대학 근처 편의점에 들러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운다. 공장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허기를 채우고, 잠시나마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빵 한 조각에 우유 한 모금. 때로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만찬처럼 느껴진다. 집에서 미리 해둔 저녁밥은 아들의 몫이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강의실에서 얻을 배움의 기대로 마음을 다잡는다. 하루 종일 생산 라인 위에서 흐르는 시간과 엄마로서의 시간이 교차하며, 또 학생으로서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의미를 찾아간다.
"엄마, 또 공부하는 거야? 안 피곤해? 나도 좀 놀아줘!"
거실 불을 끈 채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아들이 투덜거린다. 밤 11시가 넘어 겨우 집에 도착한 후, 아들이 잠든 후 시작되는 나만의 시간이다. 사실 아들이 잠들고 난 뒤에도 집안일을 하고 나면 새벽 1시가 훌쩍 넘기 일쑤다. 빨래를 돌리고,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챙겨두고, 주방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서야 조용히 노트북을 켠다. "피곤하긴 한데… 재밌잖아! 아들은 이제 공부하기 싫을 나이인가 봐? 엄마는 다시 배우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농담처럼 되받아치지만, 사실 뼈가 있는 말이다. 내게 공부는 더 이상 지겨운 의무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내일을 살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이 늦깎이 배움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자동차 품질관리직을 관두고 최저임금의 식품 공장으로 이직한 이유도 바로 이 공부 때문이었다. 월 350만 원이라는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고,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이곳을 택한 것은 오직 4년제 야간 산업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대학 문턱을 밟아본 적 없는 나에게, 그리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는 그만큼 간절했다. 단순히 학위를 따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뜨거운 꿈이 나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국가장학금을 통해 학비 걱정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됐다. 그 기회는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야간 대학이라고? 엄마 진짜 대단하다!"
아들도 이제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공부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눈치다. 가끔은 "엄마, 사회복지가 뭐야?" 하고 묻기도 한다. 낮에는 공장에서 몸을 쓰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곧장 학교로 향한다. 대학과 가까운 직장으로 옮긴 덕분에 통학 시간은 줄었지만, 여전히 피곤한 건 마찬가지다. 저녁 6시 30분까지 강의실에 도착해 수업을 듣고, 모든 일정이 끝나면 밤 11시가 되어야 비로소 집 현관문에 들어설 수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강의 중에도 꾸벅거릴 때가 있지만, 교수님의 목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린다. '사회복지정책론', '인간 행동과 사회 환경', '사회복지실천론'…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처음엔 벽처럼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이걸 왜 해?' 했을 일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밤샘 공부를 해야 했고, 젊은 학생들과의 학점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가끔은 '내가 이 나이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교재를 읽고, 과제를 작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내게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사회복지 현장의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내가 가진 삶의 경험과 강점들이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낮은 임금으로 일하지만, 미래를 향한 투자는 결코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부를 통해 내가 걸어온 길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았다. 나의 아픔과 어려움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돕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야. 아니, 꼭 찾아내야 해!"
강의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상은 너무 좁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깎이 학생으로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육체적인 피로와 함께 찾아오는 학업의 부담은 때때로 나를 짓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배움의 즐거움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쁨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게 해 준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처럼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하며, 나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날을 꿈꾸며, 오늘도 나는 펜을 들고 책을 편다. 다음 장에서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얻게 된 변화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