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받은 좀 멋진 언니

마리아 레사 「권력은 어떻게 현실을 조작하는가」 서평

by 아삼삼

최근 읽은 책 중에 제게 가장 역동적인 재미를 준 책이 있습니다. 재작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필리핀 기자 마리아 레사의 자서전인데요. 일단 그녀가 맞장 뜬 상대들의 면면부터 보시면, 입이 딱 벌어질 겁니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사실상 초법적 처형을 용인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 독재자 아버지에 이어 본인도 권좌에 오른 마르코스 현 필리핀 대통령, 그리고 페이스북과 가짜뉴스까지.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들이라, 전 처음에는 기 센 언니가 소싯적에 짱돌 좀 던져본 이야기(?)일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근데 읽어보니, 이 언니는 전략가였습니다. 짱돌을 혼자 던지기만 한 게 아니라 지지 세력인 동료 기자들과 일반 시민들, 사회 단체, 학자들, 변호인단 등과 함께 일단 짱돌을 나눠 가졌더군요. 그렇게 최대한 많은 이들과 공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다음 팩트와 데이터로 우아하게 역공했습니다. 확실히 자기 객관화가 잘 돼있고 한계도 명확히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문제 접근 방식과 해결 방법도 남다르더군요. 깊이도 있고 통찰력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언니는 패기왕입니다. 국가권력과 가짜뉴스에 좌표 찍혀 두드려 맞고도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났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이 언니네 회사 문을 닫았는데도 무시하고 계속 기사 썼습니다. 언니 한 사람에게만 구형된 기간이 100년이 넘는데도 말이죠. 이런 그녀의 고군분투기는 역동적인 필리핀 현대사와 맞물려서 더 생생한 전쟁일기처럼 읽혔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전장이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있는, 그런 일기 말이죠.


읽다보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미얀마 시민들을 탄압한 미얀마 군부, 어쩌다 미국 대통령이 된 트럼프 등 다양한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레기 욕과 언론중재법, 댓글부대, 미국과 브라질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도 덩달아 연상됩니다. 그만큼 단발적인, 필리핀만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렇게 수많은 생각의 갈래들이 뻗어나가다처럼 난데없이, 축지법 쓰고 공중부양하는 지난 대선의 모 후보도 떠오를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면서 문제의식을 느껴본 분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들이 담겨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법론을 조금 자세히 풀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러 면에서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경고를 다시 환기시켜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좋은 책인 거 같아서 추천드립니다.





# 「권력은 어떻게 현실을 조작하는가 : 마리아 레사의 진실을 위한 싸움」 , 마리아 레사 저자, 김영선 번역, 출판사 북하우스, 2022/12/8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