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뉴요커, 표지만 보면 안 되는 이유
'98년' 안목의 힘
더 뉴요커(The Newyorker)를 아시나요. 이 잡지는 1925년에 창간된 이래 98년 간 출간돼 온 주간 교양지입니다. 1면 표지는 늘 사진이 아닌, 그림을 주로 써왔지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더 유명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 몇몇 카페에서는 더 뉴요커 1면 표지를 액자에 넣고 전시하기도 하더라고요.
사실 더 뉴요커는 표지도 예쁘지만, 그렇다고 표지만 보기에는 아까운 주간지입니다. 과거 유명해지게 된 계기도 단순히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거든요. 비록 페이지 수가 얼마 되지 않아도, 거기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이 꽤 높았습니다. 에세이와 단편 소설, 각종 문화 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쓰곤 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을 포함해서요.
개인적으로는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직구까지 하면서 읽겠다는 생각은 사실 딱히 없었습니다. 그저 '언젠가 시간이 되면 우아하게 차나 마시면서 한 번 봐야지'하고만 생각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다가, 또 집에서 책을 읽다가 더 뉴요커와 3번이나 만나게 되면서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한 두 달에 한 번은 사서 봐도 괜찮을 만큼 멋진 잡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직접 사지도, 빌려서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이 가능했느냐고요? 지금부터 하나씩 소개해드릴게요.
1) 경계에 놓인 것을 중앙으로 꺼내는 힘
저는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올림피아 자그놀리 작가의 첫 한국 전시회를 갔습니다. 전시장에는 하나같이 독특한 복장과 머리모양을 하고는 자유분방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어요. 어느 하나 '기성'이라는 표현에 발 묶이는 작품이 없었습니다. 성소수자(LGBTQI+), 난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목소리가 주제로 다뤄졌고, 모두 개성 넘치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내내 눈도 마음도 즐거웠지요. 그러다 몇몇 작품들이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더 뉴요커 표지'라는 설명이 적혀있더군요. 어떤 것은 표지로 선택하진 않더라도 글맛을 살려주는 일러스트로 십분 활용했어요. 출간된 지 100년이 다 돼가는 잡지가 여전히 경계에 놓인 존재들을 놓치지 않고 반듯하게 담론으로 꺼내려 노력하는 구나 싶어 새삼 감탄했습니다.
더 뉴요커 표지. 2019년 6월 24일. 올림피아 자그놀리.
2) 아픔에 공감하는 힘
지난해 김영하 작가님이 추천한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1989년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뮤지션 미셸 자우너가, 애증의 관계였던 엄마를 암으로 잃은 후의 삶과 소회를 담은 에세이인데요. 상실의 아픔을 버텨내려 한 그녀의 갖은 노력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제 무의식에 있던 온갖 상실과 버팀의 기억도 덩달아 소환되는 책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도 한 손에는 휴지를 꼭 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 찰나에도 뜬금없이 '더 뉴요커'가 등장하더군요. 저자가 Thanks to에 더 뉴요커를 향한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말이지요. 알고보니, 이 잡지가 저자의 글을 연재할 수 있게 기회를 줬고, 그 덕분에 저자의 책이 출간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더 뉴요커는, 아무도 저자의 글에 관심이 없던 그 순간에도 그녀의 글 몇 편만 보고서 단번에 알아챘던 듯 합니다. 저자의 아픔과 치유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응어리도 함께 어루만져주는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을요.
3) 역사를 대하는 진중함
얼마 전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해낸 유명한 책이죠. 그녀가 처음부터 대중을 위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워낙 큰 논쟁을 일으킨 책인지라 처음부터 긴장하고 읽기 시작했는데요.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뜬금없이 '더 뉴요커'가 등장했습니다. 알고보니, 더 뉴요커가 한나 아렌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그녀를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보내서 재판을 참관하게 했던 것이더군요. 그 지원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더 뉴요커는 1963년 2월부터 다섯 차례로 나뉘어서 아렌트의 글을 기사로 게재했는데요. 그 때 글 제목은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는데, 이후 1965년에 한나 아렌트가 여기에 후기를 덧붙여서 지금과 같은 책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우주인 가가린을 포함해 세계인들의 눈길을 끄는 이슈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뉴요커가 뚝심있게 이 이슈를 판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진심'이 느껴지죠. 그 결과, 우리는 집에서 편안히 앉아 '사고하지 않음이 곧 폭력'이라는, 아렌트가 정리한 나치의 교훈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60년 전 더 뉴요커 관계자들의 혜안과 역사를 대하는 진심, 그 진중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어렵지 않았을까요.
- 참고 : 더 뉴요커 홈페이지 https://www.newyorker.com/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저자, 정혜윤 번역, 문학동네 출판. 2022/2/28 발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저자, 김선욱 번역, 한길사 출판. 2006/10/10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