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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Sep 04. 2019

MinZhu 씀

브런치 작가 신청을 앞두고

브런치 계정을 만들었다. 잘, 못 쓰는지는 나중으로 미뤄 두더라도 부지런히 쓰는 편도 못 되면서 ‘쓰고 싶다’, 꽤 자주 얘기하는 나에게 친구가 권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겨웠을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주자, 그럼 쓸 것이고 일단 쓰면 ‘쓰고 싶다’ 말은 덜 하겠지'. 지난봄 다녀온 포르투갈 여행기를 써 볼 참이었기에 첫 화를 썼다. 그러고 나서 알았다. 발행은 선정된 작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작가 신청을 하려면 이미 썼던 글과 앞으로 쓸 글이 필요했다. 멈칫.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쓰기’를 짚어 보기로 한다.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일 년에 한 번은 백일장 겸 사생대회가 있었다. 요즘도 그런 행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학교 다니던 때에는 학교 밖 야외로 나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둘 다를 해야만 했던 적도 있었지만 보통은 둘 중 하나를 선택했고 나는 무조건 글짓기였다. 글이 좋아서, 글 솜씨가 있어서는 더욱 아니었고 그림을 워낙 못 그려서였다. 나는 그림 솜씨가 정말 없다. 음, 미, 체, 어느 하나도 잘하는 게 없었지만 굳이 못하는 순서를 매기면 미술은 일등이었다. 미술 시간을 제일 싫어했던 건 물론이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리기가 필요한 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남이 대신할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대타를 찾는다. 모두 안 된 경우 죽을 맛이다. 그래서 나는 늘 사생대회가 아닌 백일장에 참여하는 학생이었다. 열심히 썼......을리 없다. 학생들에게는 글과 그림이 중요하지 않았던 ‘소풍’의 의미가 컸다. 빨리 써서 제출한 후 자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갖는 게 그날의 목표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서너 번 상도 탔다. 재주가 있었다기보다 그림 대신 글을 써 온 세월이 필력까진 아닐지라도 백일장에 특화된 요령 정도는 낳았겠지. 생각해 보면 학교는 참 좋은 곳이었다. 별의별 걸 다 가르쳐 줬다. 대학에 가서 몸이 버거워지려던 차 고등학생 때까지는 주 삼일 체육 시간에 운동을 시켜 줬다는 걸 깨달았었다. 이번에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에 ‘쓰기’가, 고등교육과정에는 ‘작문’ 과목도 있었다.


남의 것이 된 나의 이야기


내가 썼으나 남의 것이 된 글들이 있다. 편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도 구태여 직접 쓴 쪽지를 주고받던 여학생 시절을 나도 지났다. 오그라들지언정 소중하지 않은 글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의미가 담기는 편지들이 있다.


언니는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어린 시절, 아빠는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대신 엄마가 경제 활동으로 바빴다. 요즘은 일하는 엄마가 흔하지만 그땐 낮에 엄마가 없는 빈 집은 나를 기 죽일 사안이었다. 엄마의 부재를 메운 건 언니였다. 당연히 언니의 껌딱지였다. 언니가 끓인 고추장찌개가 최애 음식이었고 땋은 머리도 언니 솜씨였다. 가수 이승환의 팬이 된 것도 언니 따라 한 결과다. 그런데 언니가 집을 떠났다. 스마트폰커녕 인터넷이 대중화된 시절도 아니다. 언니와 나 사이 수 통의 편지가 오갔다. 대학생 언니가 보내온 편지에는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많았다. 당시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재현 한마당이 따로 없었다. 반면 내가 쓴 편지들은 언니에게 새로울 게 없었을 것이다. 뻔히 아는 우리 집이었고 이미 지나온 여고 생활이었을 테니. 그렇지만 나는, 별다르지 않아 보여도 엄연히 매일 다른 집안의 공기를 마치 사명을 받은 것처럼 전했고 입시 스트레스와 친구 관계 등 지지고 볶이는 나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니가 유학을 간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자주 집에 왔다. 그런데도 정말 부지런히 썼다. 글은 말보다 감정을 정제하는 재주가 있었고 언니는 내가 백 퍼센트 솔직해도 되는 독자였다. 당시의 내가 편지의 형식을 빌어 진실되게 기록되었다.


한 더미 편지가 쌓인 때가 한 번 더 있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됐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수강 신청 대신 휴학을 신청했다. 휴학 자체가 별 건 아니었다. 한 번을 안 쉬고 내리 4년 학업을 이어가는 공대 여학생이 오히려 드물었다. 다만 전혀 언질 없이 개강 수업에 안 나타난 꼴이었다는 게 아주 조금 별났다. 그때 나는 쉬었으면 하지만 핑계를 찾지 못하는 중이었는데 정말 우연히 기회가 닿아 이십여 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중국으로 갔다. 그 과정이 급박하여 미처 말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편지에 썼었던가. 반년, 오래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꽤 두툼하다. 처음 하는 외국살이는 하루하루가 사건이었고 만나는 이들도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아직 개발이 덜 된 당시 중국은 한국의 대학생에겐 신기한 구석도 꽤 많았다. 편지지를 빼곡하게 채울 소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친구들이 아직 편지를 보관하고 있어 한데 모을 수 있다면 ‘나의 세기말 중국 생활’ 같은 제목으로 엮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편지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없이 잃었으면 싶다. 도망치듯 와서는 모양 빠지게 외로워 죽겠어하는 내가 거기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덕질의 흔적


“좋아하는 게 뭐예요?” 질문을 받으면 바로 답을 못한다. 일초 만에 튀어나올 만큼 보통보다 유독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는 딱히 없다.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본다. 관심이 가는 영화가 개봉하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극장에 가기도 하지만 다 고만고만하다. 그렇지만 덕후 기질이 약한 나도 열성적으로 좋아한 분야가 있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형성되고 급성장한 시기로 꼽는 2000년 전후 10년의 기간 나는 정성을 다해 그 성장을 응원하는 한 사람이었다. 벌이도 시원찮은 학생 신분인 데다가 지방에 거주 중이었음에도 공연을 보기 위해 줄기차게 차비를 들이고 비싼 티켓을 샀다. 노래 한 소절에, 한 장면의 무대에 꽂히면, 지금은 마케팅의 하나가 되어 혜택도 많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 시절에 엔차 관람도 했다. 그리고 남은 여운을 잊지 않으려고 감상문을 썼다. 한두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길지는 않아도 한 편 리뷰의 형식을 갖췄다. 개인 블로그에 주로 썼으나 가끔 작품 공식 홈페이지 같은 곳에 올렸다. 추첨을 통해 공연 초대권을 주는 이벤트가 자주 있었는데 가난한 뮤지컬 덕후의 생존 재테크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 두세 편이 관련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다행히 후에 내가 쓴 글이 얼마나 모자란 지를 알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우쭐하여 감히 뮤지컬 평론가를 꿈꾸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가의 비용이 드는 덕질은 고정수입이 생긴 후 점차 시들해졌다. 없는 재력은 체력과 여력으로 때웠는데 거꾸로 바쁘고 피곤한 직장인은 식는 열정을 돈으로 막지는 못했다. 요즘은 어느 작품이 흥행 중인지, 배우 누가 핫한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일장 연설도 할 수 있던 때가 있었고 인증은 그때 썼던 감상문들이다. 다행이다. 열정의 시간은 글이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여행을 기록하다.


해를 넘기며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 도시를 정하고 일정 기간 머무는 형식을 택하기도 한다. 서점 여행 코너에는 어제는 없었던 책이 오늘 또 새로 출간되어 자리를 잡았을지 모른다. 같이 놓인 에세이들은 하나같이 특별한 계기와 독특한 에피소드들이 있고 거창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에 비하면 일이 년에 한 번씩 여름휴가를 이용해 일주일 남짓 여행을 하는 나는 여행이 흔해진 시대의 흔한 중 흔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쓰지 않았었다. 나의 여행은 글이 될 만하지 않은 줄 알았다. 태도를 바꾼 건 목적이 바뀌어서다. 근사한 글이 아니라 기록이라 여기니 잊지 않기 위한 머스트(must)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 오스트리아, 빈 여행기를 썼는데 기록 이상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 남들 다 하는 것을 했더라도 느낀 것은 나만의 감상이므로 다르다. 여행 중 소소한 변수들은 글로 쓰이니 사건이 되었고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한 여행도 아무튼 글이 되었다. 그리고 완성도와 상관없이 쓰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과정이 유의미했기 때문이다. 본 것, 들은 것을 정리하는 과정은 되새김질이었다. 장면을 떠올리고 여행지에서처럼 또 감탄을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보에 오류가 있을지 몰라 점검하면서, 나 혼자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문서로 남는 것은 차이가 크다, 공부가 되었다. 흥미로운 곳으로 탈바꿈하는 장소가 생기기도 했다. 이유가 더 충분해진 김에 여행을 한 시기는 빈보다 더 앞선 아일랜드 여행기를 썼고, 이제 포르투갈 여행을 되새김하려고 한다. 막 공항에 도착한 것처럼 설렌다.


다음은 무엇을 쓸지 생각해 본다. 브런치 글들을 읽으면서 여러 번 쪼그라들었는데 첫째는 작가님들의 필력 때문이었고 다음은 글감이었다. 일상의 소재를 가지고서 의미를 담아내는 글들이 정말 부러웠다.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덜컥 겁이 난다. 나의 일상에 글거리가 될 게 있을까, 나의 치부를 다 드러내도 괜찮을 지인들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두고 쓸 수 있을까. 그래도 걱정 사십구, 쓰고 싶은 마음이 오십일이다. 공개적 글쓰기를 찬양하는 브런치 여러 작가님들을 믿고 작가 신청을 해야겠다. 단, 유의사항을 유의한다. ‘좌절 금지, 승인이 안될 수 있다.’ 안 돼도 글은 쓸 테다. 나에게도 서랍은 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선정의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쓰고 싶은 마음에 성원 일 퍼센트를 보태 주신 게 아닐까 짐작한다. 그만큼의 걱정은 덜어 주신 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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