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 리뷰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은 이미 다양한 장르에서 수없이 다뤄졌다. 물론 어떻게 변주되든 어느 정도 감동은 보장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너무 식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이기만 했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튜 본(Matthew Bourne)’이라면 굳이 돈과 시간을 낼 법하다. 그는 안무가이지만 토니상 안무상과 연출상을 동시에 받은, 춤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최고의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역시 익숙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었다. 매튜 본이 직접 원작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접근을 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원작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했는데 보기에 따라 비교조차 어려울 만큼 새로웠다. 일단 공간적 배경이 베로나가 아니라 ‘베로나 인스티튜트’이다. 언뜻 감옥 같기까지 한, 강압적인 단체생활이 행해지는 감금 시설이다. 그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장애가 되는 건 가문의 대립이 아니라 통제되는 환경이다. 머큐시오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비극적 결말로 가는 것은 같으나 두 주인공의 죽음도 원작과 다르다. 티볼트의 학대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줄리엣이 로미오를 티볼트로 착각해 죽이게 되고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과오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찌른다. 티볼트가 명백한 빌런으로 기능하는데 아이들을 압제하는 권력자인 인스티튜트의 경비로 설정되었다. 이만하면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차용할 뿐 원작은 간신히 더듬어야 할 정도다.
오히려 공연을 보면서 거듭 겹쳐지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 사춘기 청소년의 성문제를 파격적 연출로 담은 작품이다. 국내 초연을 놓치지 않은 스스로가 대견한 뮤지컬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다. 김무열, 조정석 배우가 주연, 당시 김하늘이던 강하늘도 출연했다. 엄밀히 이들이어서 대견한 건 아니고 ‘Totally f*****.’라는 욕이 섞인 가사마저 거리낌 없게 하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엄격한 규율의 청교도 학교에서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이들은 고민과 아픔이 깊어지고 혼돈과 분노를 분출한다. 아이들이 어른들, 또는 사회가 정한 금기에 억눌린다는 뼈대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데 담은 메시지를 표출하는 기운의 정도도 닮았다.
차이를 집자면 그래도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세세한 이야기를, 또 가사를 무시할 수 없는 뮤지컬이라는 장르 안에서 독창적 안무, 연출에 비중을 높인 쪽이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언어가 완전히 배제된 ‘무용’이라는 점이다. 줄거리의 기승전결은 있지만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줄 의지도, 이유도 없다. 그 장면에서 표현되어야 하는 주제, 감정에만 집중한 몸짓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춤이 가히 경이롭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했다가 역시 사람의 몸이 제일 아름답구나 감탄했다. 혹 ‘잘 못한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감히 줄리엣이 티볼트에게 학대당하는 장면마저 불편하기보다 매혹적이었다. 그러니 로미오와 사랑을 나눌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넋을 놓았다.
솔직히 공연을 보기 전 예상은 부드러운 쪽이었다. ‘매튜 본’이라는 이름의 자동 연상은 가슴은 드러내고 깃털이 달린 바지를 입은, 위협적이기까지 한 강인한 남성 백조이긴 하다. 그렇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백조는 아니니 깃털은 없겠고 사랑 이야기니 마냥 유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도 다시 말하지만 센 쪽이다. 안무들이 빠르고 힘차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죽는 장면에서는 순백의 의상에 붉은 피가 아무러하게 막 묻는다. 비극적 결말을 막연한 관념에 맡기지 않고 직접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춤이 덜 아름다운 것은 아닐 테지만 거센 표현에 더 강렬한 인상이 남는 건 맞다. 매튜 본의 작품을 이제 겨우 두 번째 봤지만 그가 지향하는 안무가 조금 짐작이 된다. 고전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도. 그게 취향에 맞더냐 하면 갸우뚱인데 무대를 보는 중에는 그저 감탄의 연속인 건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