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 휴직일기.
교토에 다녀온 뒤로 휴직일기를 작성하지 않았다.
실은 노트북조차 거의 열지 않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약은 그즈음부터 한알도 먹지 않게 됐다.
미리 받아둔 약이, 쉬는 기간만큼의 분량이 아니어서 걱정했는데,
쉬는 기간에 회사 앞에 있던 병원에 다시 찾아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휴직기간은 이번 주로 끝이 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회사에 복귀한다.
복직원을 제출하는데 왠지 송신 버튼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
쉬는 동안 충분히 나와, 나의 상태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편이 여러 가지 덜어내기가 좋았다.
홍천으로 시작된 여행은
2주 좀 넘게 교토에 다녀오는 것을 기점으로 힘을 받아
서촌에서 1주일 살기를 해보고,
짐을 단단히 준비해서 (접이식 자전거까지 2대 구입했다.)
영월, 경주, 남해, 하동, 구례를 22일 동안 다녀왔다.
"세 달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갈 거예요."라는 말을 여럿에게 들었는데,
여행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 같다. 여행으로 꽉꽉 채웠더니 그 시간이 꼭 짧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필요했던 만큼 길었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여행 중에, 어느 센가 "행복하다." 하고 소리 내서 말했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세상엔 재미있는 일,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고
예전엔 왜 발견하지 못했지? 더 넓게 바라보지 못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갗이 거무스름하게 탔고, 딱 그만큼 이전에 바닥까지 소진되었던 무언가가 다시 충전되었다.
쉬는 동안 충전되었던 것이, 다시 시작되는 회사 생활로 소진되어버릴까 봐, 다시 텅텅 비어버릴까 봐 겁이 낫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알게 됐다. 깨달았다.
충전된 무언가는 회사 생활로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100일 쉬는 기간을 통해,
이전에 딱 회사의 크기만큼만 조그맣게 닫혀있던 생활과, 시야가,
앞으로는 그 이상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무엇 때문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변화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됐다. (그래서 이 일기도 갑자기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진도 엄청 찍고, 트위터에도 인스타에도 많이 업로드했지만,
휴직일기 작성을 멈춘 건, 이 시간만큼은 나 스스로만 바라보자.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열면, 너무 많은 것들로 생각이 분산되는 듯했기에…
물론 글을 적고 누군가 반응해 주면, 반갑고 고맙기에 그지없지만,
일단은 최대한 외부로의 연결을 줄이고,
현실에만 집중하고자 했다.
(트위터, 인스타는 참지 못했지만;;)
처음엔 노트에 생각도 끄적여보고, 순서도(?)도 그리고 이것저것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꼭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은 맑은 햇살아래에서 걷는 것 만으로, 조용한 처마밑에서 빗소리를 듣고, 책을 읽고, 고양이를 품에 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일찍 찾아온 시골의 어둠 속에서 아내랑 꼭 붙어 앉아 차를 마시는 순간들이 더없이 행복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정리해야지. 결심해야지. 하고 시작했던 휴직이었는데,
사실상 정리된 건 하나도 없다.
다만 행복을 찾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몇 가지 힌트를 얻었다.
처음엔 찾은 것 만으로 놀랍고, 벅찼는데, 나중엔 담을 수 없을 만큼 세상 속에 힌트가 많았다.
아마 회사를 아주 오래 더 다니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도 확신하게 됐다.
대신 회사 밖에 얼마나 멋진 세상이 있는지, 거기서 내가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험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생활보다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명확히 알게 됐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하고 싶어지지는 않았는데, 돈은 확실히 좀 더 벌고 싶어졌다. (일단 3개월 동안 셀프 용돈지급이 정지됐다.)
나름 그동안 (나 아니고 아내가 차분히, 착실히, 열심히) 모아 왔어서, 남은 기간이 아주 길지만은 아닐 것 같다는 점이 감사하고 뿌듯했다.
직업으로 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어떤 엔지니어였고, 실제로는 어떤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했었는지,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바로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이미 글렀을지...
돌아가면, 이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접근으로 일을 해보고 싶어졌다.
성공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쉬길 너무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 다시 찾아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 천천히 호흡하고, 앞을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책을 잘 읽지 못했었는데, 봤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다가 책을 덮곤 했었는데,
마지막 전국 여행에서는 책을 여러 권 읽었다.
다시 글 읽는 것이 즐거워졌고, 보고 싶은 책도 많아졌다.
브런치 작가가 어렵게 통과됐는데, 이렇게 끝내기는 아쉽고...
아마도 다른 일기를 더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여럿 생겼으니 '복직일기'를 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게,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것에 물론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 더 기대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됐다. 충분하다.